# 74
74.분명히
“벌써 열 번째네, 저 븅신.”
고란 홀이 드워프가 태석에게 쓰러지는 꼴을 보면서 드워프에게 한소리 했다. 물론 그들은 성천주들에게 마련된 대기실에서 대련실 상황을 구경하고 있기에 여기에 있는 성천주 외에 다른 이들에게 목소리가 새는 일은 없었다.
하레니아가 하품을 길게 늘어져 하다가 물었다.
“태석이라는 인물은 원래 저런 인물이야?”
“뭐가요, 언니?”
“아, 그러니까 태석이라는 인물은 원래 저렇게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싸우는 인물인가 해서.”
왠지 예전에 다른 부하들에게 들었던 소문과는 달랐다. 묘하게 자신을 챙기지 않고 남을 돕는 이타적인 인물이라 했는데, 지금은 평범하기 그지없다.
자신을 괴롭힌 존재를 싫어하고, 자신의 소중한 존재를 지키려 하고, 또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고, 재미있어 보이는 일을 하는 사람.
그냥 평범한 범인 그 자체 아닌가?
“원래라면 남을 위해서 헌신하는 인물이었지만, 뭔가가 태석 님의 심정을 바꾼 모양이야.”
“무언가라면?”
이번에는 겐세가 담배를 입에 문 채 말했다.
“당연히 TOY 사건이겠지. 누님이 상까지 주게 만든 그 사건.”
“그런가. 대단하네. 그보다 TOY 정화에 태석이 얼마만큼 도움이 되었어?”
“나 참.”
겐세가 다 아는 걸 왜 묻는다는 듯하다.
“다 알면서 왜 물어봐? 이미 서류로 다 봤으면서.”
“서류로 봤으니까 물어보는 거란다아. 바보 멍충이, 겐세 노르도.”
“나는 바보도 아니고, 누님에게 그런 소리 들을 만큼 이상한 짓은 안 했어.”
고란이 그런 겐세를 노려보며 툭 내뱉었다.
“이봐, 겐세. 네가 얼마나 여자를 후리고 다녔는지 하레니아 언니한테 다 이를 거다.”
“윽. 아무튼, 그래도 나는 주장할 거야. 누님보다는 행실이 바르다고.”
“뭐, 짐승 같은 욕구를 잘 채운다는 점에서 충족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지, 겐세, 너는 인간 이하, 가축의 존재야. 어떻게 된 게 매번 욕구 불만인 거야? 나한테 대쉬는 또 왜 했고. 카톡 좀 그만 보내, 새끼야.”
“……뭐, 남자가 여자를 원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어?”
겐세가 하품을 길게 하면서 담배를 비벼서 껐다. 재떨이에 쑤셔 박고는 하레니아에게 말했다.
“아무튼, 태석은 말이지, 대단한 존재입니다, 누님.”
“대단한 존재? 겐세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진짜겠네.”
“제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요?”
“겐세, 너는 귀족 의식이 강해서 인간을 깔보는 경향이 있으니까 대단하다고 칭찬한 건 네 부하 헌터 현지에게 한 이후로 처음인걸.”
“뭐, 그렇긴 합니다만.”
겐세는 이번에는 와인을 기울여 잔에 따랐다.
“아무튼, 대단한 존재입니다. 태석이 있는 것만으로도 전투의 양상이 바뀌었어요. 너무 쉽게 해결했다는 느낌입니다.”
“그에게는?”
“그라뇨?”
“태석에게는 간단한 일이었어?”
“그건…….”
겐세가 콧잔등을 긁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본인에 대한 정보를 잘 감추고 있는 모양이야.”
“아무래도 토르나 오딘 같은 신을 강신하는 듯한데, 잘 모르겠습니다. 신을 다루다니. 신은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말이죠. 다른 세상을 관리하고 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던데.”
“그건 모르는 일이지. 그저 갇혀서 아무것도 못 할지도 모르고. 고대의 인류는.”
“고대의 인류라……. 하긴, 그렇다는 설도 있죠.”
“태석이 말했었지? 고대의 인류라고, 신들은. 인간 세상에 위험을 막고 추방당한, 그런 불쌍한 존재가 신이라고.”
“예.”
하레니아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신이 태석으로부터 강신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생겨날 확률도 있겠네.”
“강림말입니까?”
“그래. 어차피 그것을 알고 싶어서 태석을 상을 주겠다는 빌미로 만난 것이기도 하고.”
“별 소득은 없을 겁니다. 알려주지도 않을 거고, 우리에게 당할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고, 솔직히…….”
“솔직히?”
“우리를 이만큼 도와준 인물을 배신하기는 싫습니다. 배신해도 저희는 좋은 꼴 못 보고요.”
“그렇긴 하다만…… 아아, 아깝다. 내 걸로 하고 싶은데.”
이번에는 하레니아의 말에 고란이 반박했다.
“절대 누구의 것이 되지 않을 거예요, 언니. 태석은 길들여지지 않는 사냥개와도 같으니까.”
“사냥개라…….”
하레니아가 화면 속의 태석을 응시했다.
“사냥개는 아니고, 파수견 같은 느낌이지만. 아니, 개 따위로 취급할 정도로 급이 낮은 존재는 아니야.”
하레니아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평범한 검은 눈이었지만, 짙고 음침했다.
“태석은 신화 속의 존재와도 같을지도.”
신화 속의 존재.
어쩌면 현신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세상을 구하기 위한 그런 존재.
에덴의 분석에 따르면 그렇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다. 대단한 존재이기에,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곳에 있어서 그런지 전혀 모르겠다. 그래도 상관없다.
하레니아가 입술을 핥았다.
천천히 접근할까. 좋은 사람이니까 친해져서 나쁠 것은 없다.
태석은 드워프를 내려다보았다. 드워프가 비틀거리면서 일어나려다가, 아예 누워 버렸다.
드워프가 누운 이유는 간단했다.
‘더 이상 일어났다가는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
벌써 열 번째 재경기다. 다시 일어나면 열한 번째 재경기가 펼쳐질 것이다. 그것은 바라는 바가 아니다. 애당초 왜 태석과 대한에게 시비를 걸어서 이런 꼴을 당하는 걸까. 드워프 자신도 이해하기 힘들다. 솔직히 후회된다. 과거의 자신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끌고 가고 싶다.
죽을 것 같다고.
갈비뼈도 아프고, 다리도 망가진 것 같고, 팔도 아프다. 솔직히, 병원에서 치료받으면 나을 것 같지만, 그 재활 치료 비용이 얼마일지 모른다. 왜, 외계 행성에서 온 드워프는 보험이 없다고. 한국이란 곳의 보험 처리 따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얼마나 깨질지 벌써부터 걱정된다.
안 되겠다. 힐링팩 적당히 붙이고 뻐겨야지. 치료는 행성에 돌아가서 하기로.
태석이 말했다.
“이봐요, 드워프 씨.”
“왜 그러십니까.”
누운 채로 말했다.
“앞으로 우리 대한이 무시하지 마세요. 아시겠죠?”
“당신들 집단은 무시 안 할 겁니다.”
“집단?”
집단이라니. 태석은 그런 조직 따위는 기르지 않는다. 애당초 조직의 수장을 맡을 적합자가 아니라고, 태석은 태석 자신을 그렇게 평하고 있었다. 하지만 드워프가 말했다.
“뭐요, 사실이 아닌 거요? 태석, 대한, 시연, 세희, 현지, 그 외에 겐세 노르도나 고란 홀. 당신을 포함해서 이 자들이 당신 조직의 일원이라고 들었는데?”
“무슨 소리인지……?”
“왜, 팀명도 있잖소. 팀 가즈 나이트(God’s Night)라고.”
“신의 밤?”
“신의 밤. 그래, 한국말로는 그렇게 하던가. 아무튼, 그런 팀명이라고 들었소.”
“그 소리를 누구한테 들었습니까?”
“당신 오른팔이라는 대한이 대대적으로 홍보하던데?”
“?”
이게 뭔 소리야.
신의 밤이라니.
가즈 나이트라니?
그런 괴상한 조직은, 수상쩍다.
애당초 태석은 그곳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거지?
“어떤 위치에 제가 있다고 알려졌습니까?”
“당신이 대장이라던데?”
“…….”
대한이 네 이놈!
태석은 대충 대련을 마무리하고 대한에게 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봐야 한다.
태석이 서둘러 대한에게 찾아갔고, 가즈 나이트라는 이상한 조직명을 짓고 퍼트린 계기에 대해 물어보려고 했다.
“뭐야? 몰랐던 거야?”
“몰랐다. 애당초 그런 조직이 있는 줄도.”
“왜, 멋있잖아. 솔직히 우리 팀은 굉장한 팀이잖아? TOY도 정화한.”
“그렇지않다…… 고는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솔직히 뭔가 중2병 같아서 싫어.”
“응? 태석이 너 중2병 아니었어?”
“그건 또 뭔소리냐?”
“안광이 흩날리잖아. 싸울 때마다 ‘모두의 행복을 원해.’ 하면서 멋있게 치고 들어오고.”
“…….”
“그리고 천둥을 휘날리면서 멋지게 대사도 뱉잖아. ‘나는 모두가 행복해지고, 내가 불행해지는 걸 원한다. 이 몸은 그런 것을 원해!’ 하면서 웅장하게 말하면서 지팡이 들고, 한눈 가리는 가면 쓰고, 멋지게 화려한 스킬들 쓰고. 중2병인 줄 알았는데?”
“중2병 아니다. 그건 단지…….”
“굳이 그렇게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아도 능력은 쓸 수 있잖아?”
“…….”
뭐라 할 말이 없다.
태석은 자신이 중2병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기본적으로 신을 강신하면서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상당수 변신을 하여 신의 힘을 빌려 쓰는 시스템이다. 강신 세계에 가둔 신들 중 하나에게 부탁해서 힘을 쓰기 때문에 태석의 취향도 잔뜩 가미되어 변신하곤 하는 것이다.
안광의 푸른 전기라. 그리고 한눈을 가린 가면에 지팡이를 들고 있는 모습이라.
……중2병이잖아, 완전.
그렇게 반박도 못 하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대한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너 좋으라고 팀명도 지어서 퍼트리고 있는데. 왜, 인터넷에서는 벌써 난리라고. 오늘도 KEWP 현황이라면서 태석이 네 사진도 인터넷에 막 올라오고, 기사도 올라오는데? 그리고 대한이를 위해 나섰다면서 BL 팬픽도 급증하고 있고.”
“……그만.”
“그리고 또 팬픽 중에 출판까지 된 게 있는데, 그걸로 얻게 된 수익 일부는 태석이한테 보내기로 했거든. 그러니까 계좌 좀 불러봐. 수익 넣게.”
“……으음.”
돈이라. 그래, 돈 좋지.
태석은 이것도 사업의 일환이라고 생각하기로 했고, 불편한 생각은 자제하기로 했다.
그냥 넘기자. 어떻게든 굴러가겠지. 딱히 부끄럽지만 나쁜 상황은 아니기도 했으니 신경 쓰지 말자.
음, 그래.
정말 신경 안 쓰여.
“그러면 팬픽 낭독해볼까?”
아니, 신경 쓰인다.
정말, 부끄럽다.
제발 낭독하지 마라. 사람 많은 곳에서, 제발!
태석은 대한의 입을 틀어막아 막고는 그대로 샤워를 하기 위해 자신에게 배정된 숙박실로 향했다.
조금 걸음이 빨랐다. 주변 시선도 신경 쓰인다. 자의식 과잉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방금 전 대한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즈 나이트라…….
의외로 멋질지도. 그렇게 생각한 자신이 부끄러워서 샤워를 하면서 몇 번 헛발질을 했다.
아무리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 되어도, 자신의 수치스러운 부분이 모르는 사람들의 귀에까지 들어오고 서로 이러쿵저러쿵하는 걸 생각하니 부끄럽기 그지없다.
샤워를 하는 시간이 그나마 해방구였다.
쏴아아아-.
뜨거운 물이 태석의 몸을 적셨다.
샤워를 하면서 어느 정도 뜨거운 물 덕분에 심신이 안정된 탓인지 차분한 생각들이 떠오른다.
나 참, 정말 많은 일이 있었군.
태석은 처음에는 은호에게 죽을 뻔하고, 토르를 각성하고, 리치를 잡으며 로키를 강신하고,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꼼짝없이 죽을 뻔하고, 색욕의 악마와 싸우고, 카락스와 싸우고, TOY를 정화하고, 에덴의 열쇠를 얻고 하는 장면들이 떠오른다.
단편적으로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이 떠오르듯, 차분히 연속해서 필름의 형태로.
그러면서 태석은 미소를 지었다.
나름대로 잘 해결해왔어. 힘들었지만, 지독하게 힘들었지만, 잘 해결되었고 모두는 행복해졌어.
태석 또한 행복해질 것이고.
이제 태석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도 행동할 거니까.
태석이 미소를 지으며 샤워를 끝마쳤다.
끼릭, 끼릭.
샤워기를 돌려 끄고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 잘 되고 있어. 정말로.”
확신할 수 있다.
불안하지만, 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