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71. 탄생일
기차에 탔다. 여러 가지 뒷정리가 마무리된 후의 일이었다. 태석은 꾸벅꾸벅 졸음이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옆에서 시연이 태석의 어깨에 고개를 기댄 채 자고 있다. 더 웃긴 것은 왼편에는 대한이 어깨에 고개를 기대어 잠에 들어 있던 것이다. 현지는 아예 기차 의자 세 개를 차지하고 누워서 잠들어 있었고, 강지는 처음 타보는 기차에 살짝 어안이 벙벙한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잠을 자는가 싶다가도 쿵 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기계팔을 휘두르려고 할 뻔했다. 어쩌면 야생의 감이 강지에게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고 태석은 졸면서 생각했다.
겐세는 잠에 들지 않았다. 성천주였기에 잠이 필수가 아니었던 것일까, 아니면 휴식의 방법이 인간과는 다른 걸까. 잘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성천주 고란 홀이 자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듯한 느낌도 든다.
겐세가 말했다.
“자는가?”
“아니요. 근데 곧 잘 것 같기도.”
“하긴, 피곤할 테니까. 태석 너에게는 특히 힘든 일의 연속이었겠지.”
“그렇죠. 이번에는 저도 부정하지 못하겠군요.”
겐세가 미소를 지으며 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창가를 보았다. 정신없이 나무나 바위, 산 등이 지나가면서 흘깃흘깃 보였다. 태석 또한 그것을 보다가 문득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저는 많은 일을 겪었군요. 이 며칠간.”
“그래.”
“어쩌면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사건들은?”
“……아닙니다. 뭐, 말해봤자 쓸모없는 영양가 없는 말이었으니까요. 그냥 이야기하지 않는 편이 좋겠군요.”
“네 판단이 그렇다면 상관없다.”
“그보다 겐세 씨.”
“왜 그러지?”
“에덴의 조각 말입니다. 정확히는 에덴의 열쇠.”
“그래,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만, 대외적으로 공개하지 않는 것이지.”
“그거, 제가 맡아둬도 되겠습니까?”
“어디에 숨길 생각인가? 집의 금고라던가, 서랍장 안이라면 안전하지 않아. 그런 간단한 장소에서 숨겨질 물건이 아니다.”
왜냐면, 수색할 방법이 많으니까. 마력의 근원, 아니 진리의 근원이라고 할 정도니까 어떤 수단이든 찾아낼 방도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집의 금고나 은행의 금고 따위에 숨겨두면 금방이라도 발견 당할 것이다. 에덴이라는 것은, 굉장히 유용하고, 많은 인물들이 노리고 있고, 국가도 이를 노리고, 타 행성의 외계인도 노리고 있었으니까.
태석이 미소를 지었다.
“숨길 곳이 있습니다. 어서 주시죠.”
태석은 그런 시시한 장소에 숨길 생각은 물론 없었다.
겐세가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묘하게 표정이 달랐는데. 설마하니 이번 사건을 겪고 태석이 변한 것일까? 하지만 불안하거나 불길한 감정이 들지는 않았다. 부정적이지 않은 감정, 그러니까 긍정적인 감정이 들었다.
태석이 성장했다는 기분.
겐세가 미소를 지으며 태석에게 손을 뻗어 열쇠를 건넨다.
에덴의 조각.
푸르고 하얀 기운을 내뿜고 있고, 손에 쥐는 것만으로도 마력이 충만해지는 착각이 든다. 아티팩트라고도 불리는 이 물건은, 고성능 분석 특화 장치 에덴이라는 물건을 열어서 그 속의 진리를 얻을 수 있게끔 한다.
그리고 이런 물건을 태석은 강신 세계에 가두기로 했다.
눈을 감고 집중한다.
세상이 뒤집혔다.
오딘이 서 있었다.
태석은 강신 세계에 있었다.
현실의 몸은 자고 있다.
주변을 둘러보니 평소처럼 푸른 언덕에 하늘은 검고, 밝은 별이 미친 듯이 공전하여 원형의 선을 잔뜩 그려놓고 있었다.
태석은 그것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정상으로 돌아왔네.”
“그만큼 너의 감정이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거다.”
“오딘. 아니, 오딘 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너는 지나가던 똥개에게 존칭을 듣는다고 해서 기분이 좋나?”
지나가던 똥개라. 어쩌면 고대의 인류에게 신인류인 태석 같은 존재는 인간이 아닌 원숭이로 보일지도 모른다. 원숭이라기보단 불쾌한 골짜기일지도 모르고. 그러니 혐오의 감정이 들지도 모른다.
“뭐, 신기해서 잠깐 놀아주기는 하겠네.”
“능글맞아졌군.”
“여러 사건들을 겪으며 변한 거야.”
“이 몸을 강신해서 그런 건 아니고?”
“그런 걸 수도 있고.”
태석이 손을 폈다. 에덴의 열쇠가 있었다. 오딘은 그것을 보고는 눈가를 찌푸렸다.
“이건…….”
“뭔지 알아?”
“알지. 우리가 개발한 물건이니까.”
“우리?”
“고대의 인류. 내가 개발한 건 아니고, 고대의 인류 중에서도 유독 유명했던 작자가 개발했다. 자신을 신인류에게 하늘의 신이라고 부르던 자였지.”
“하늘의 신?”
“기독교 말이다.”
“아아.”
태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고대의 인류가 신이라면, 신인류가 믿던 신들도 사실은 존재하던 녀석들이라는 소리겠구나. 태석은 미소를 지었다.
과학의 극한은 마법의 영역이라더니. 고대의 인류들은 과학의 극한에 달해 신격화 받은 존재들이었구나.
태석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 우리도 누군가에게는 신이라는 것일까.
“에덴에는 뭐가 숨겨져 있어?”
“?”
“엄청난 게 숨겨져 있다던데.”
“아아! 그래, 중요한 게 있지.”
“말해줄 수 있어?”
“아아! 그래, 중요한 게 있지.”
“……?”
“그래서 그 물건은 무엇인가.”
반응이 이상하다. 뭔가 프로그래밍이 어긋난 것처럼, 말을 반복하거나 딴소리를 한다. 오딘의 성격이 괴팍해도 일부러 그런 짓을 할 정도로 유치한 존재는 아닌데. 설마하니 고대의 인류인 하늘의 신이 뭔가 조치를 취한 것일까?
에덴에 대한 정보를 발설하는 걸 세뇌 비슷한 것을 통해 고대의 인류들에게 발설 못 하도록 막은 걸지도.
그렇다면 정말로 중요한 물건이 에덴의 내부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에덴의 열쇠는 더욱더 숨겨야 한다. 적어도 하늘의 신에게 중요한 물건일 테고, 하늘의 신에게 중요하다면 굉장히 중요한 것이 틀림없을 테니까.
어쩌면 세상이 뒤집힐지도 모른다. 하늘의 신은 세상을 창조한 존재라고 신인류인 태석에게 알려져 있다. 그럴 정도의 존재가 이렇게 감출 정도라면 도대체 얼마나 대단할지…….
“아무튼, 이건 중요한 물건이야. 숨겨줘.”
“그래, 알았다. 내가 맡도록 하지.”
오딘이 열쇠를 잡아 들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품에 넣었다. 태석은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잘 맡아줘.”
“그보다 악마 녀석을 왜 풀어준 거지?”
“아아, 맞다. 그런 일도 있었지.”
“그 녀석을 딱히 미워하는 것은 아니다. 나의 아들이나 같은 존재니까.”
“뭐, 그렇지. 너도 일단은 신이니까.”
“‘일단은’이라니. 이 몸에게 너무하는 말 아닌가?”
“가끔은 이렇게 대화하다 보면 신이라는 것이 실감이 안 가서.”
“원숭이와 대화하는 것도 가끔은 실감이 안가.”
“성격하고는.”
“너도 버릇없는 건 아나?”
“하하.”
태석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면 나는 강신 세계에서 나갈게.”
“그래. 계속 지켜보겠다.”
“그건 좀 소름 끼치는데.”
태석이 손을 흔들며 강신 세계에서 빠져나왔다.
깨어나자마자 기차의 내부 풍경이 보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서울에 도착한 모양이다. 겐세가 모두를 깨우기 위해 말했다.
“모두 일어나라. 여정은 끝났다.”
드디어 끝난 건가.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서울의 풍경이 신기한 건지 기차 밖으로 나온 뒤에도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기차를 통통 두드려보기도 하고, 가게를 구경하기도 했다. 그런 강지를 향해 말한 것이었다.
“강지야.”
“왜 그러십니까?”
“그, 지낼 곳은 있어?”
“지낼 곳?”
“그러니까 집 말이야. 고향이라던가.”
“저는 태어난 곳이 그곳이었습니다.”
“그곳이라…….”
왠지 말하기 껄끄러워지는 그 장소. 태석은 쓰게 웃었다. 그 장소에는 끔찍한 일들이 가득했을 것이다. 카락스에 의해 죽은 인원도 꽤 될 테고. 어째서 그런 걸 내버려둔 걸까. 내버려둬야 할 필요가 있었나? 찾아가서 묵사발 내면 안 되었던 걸까. 왜, 태석 일행만으로도 막을 수 있을 정도면, 국가 단위로 나서면……. 설마하니 건드려서는 안 될 이유라도 있던 건…….
생각을 거두고, 태석이 말했다.
“묶을 곳이 없다면, 내 집에서 지내는 건 어떨까 하고. 내 여동생도 있으니까. 편안할 거야.”
“여동생?”
“응? 그러니까…… 가족.”
“가족…… 가족이 뭡니까?”
태석이 순간 철렁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이 소녀는 가족이 뭔지 모른다. 가족이라기보다는 어쩌다 태어나 괴롭힘 받는 인생을 살았으니까 그럴지도 모른다. 태석이 미소를 지으며 강지의 머리에 손을 턱 얹었다.
“앞으로 우리가 될 거야. 가족.”
“…….”
살짝 표정이 부끄러운 건지 웃는 건지 모를 그런 것이 된 강지였다. 태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면 가자.”
그리고는 모두를 돌아보며 고개를 꾸벅 숙이며.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대한이 말했다.
“그래, 너도 고생했어. 꽤나 재밌는 일들이었던 것도 같고.”
“재밌는 일은 무슨…… 얼마나 끔찍했는데요.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고요.”
시연이 핀잔을 줬고.
“그러면 다음에는 좋은 일로 만나요. 이거 한잔 어때요?”
술잔을 기울이는 시늉을 하면서 현지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왜, 저는 술이 세다고요!”
겐세가 현지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툭 튕기며 말했다.
“주량이 소주 두 잔인 주제에 무슨 주량이라는 거냐.”
“아얏!”
“반응이 느리군.”
“그야 때린 걸 늦게 눈치채서요.”
강지가 웃음을 터트렸다.
태석이 그것을 보았다. 일행도 보았다. 강지가 입을 감춘 채 눈을 옆으로 흘리며 무감정한 특유의 목소리로 말했다.
“딱히 웃은 건 아닙니다. 그러니까 기침을 한 거예요.”
“정말로?”
“정말입니다.”
태석이 장난스레 말했다.
“그러면 병원이라는 곳을 가야겠네. 감기라면.”
“……?!”
병원이 무엇인지는 아는 것인지 강지가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그곳은, 그곳은 안 됩니다.”
“그래, 알았다.”
태석이 미소를 지으며 모두에게 손을 흔들었다. 강지의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좋아, 이제 한동안은 쉬어볼까.
“그래서 이 아이는 누구야? 설마 나 없는 사이에 사고를 친 거야?”
여동생, 태희가 의심의 눈초리로 태석을 노려보았다. 뭔가 표정이 무섭다. 나쁜 짓이라도 한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 눈길을 피했지만, 태희가 고개를 움직여 계속 눈을 마주쳤다.
강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이 여자는 누구입니까?”
“여자…….”
묘하게 거리를 두는 말투에 태석이 살짝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태희는 당황하지 않고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태석 오빠의 여동생이야. 너는 누구니?”
그보다 집에 도착했는데 현관문에서 뭔가 관문 심사를 당하는 기분이라 조금 그런데……. 왜, 태석은 자신의 집인데도 들어가서 쉬기 힘들어지는 건지 의아했다.
“강지입니다. 흑수정 TOY에서 카락스에게 지배를 받던 노예 출신입니다.”
“……그런 건.”
말하지 않는 편이 좋다, 라고 말하려 했지만, 태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일단 들어와서 쉬자.”
“일단은 강지도 우리 집 가족이니까, 이제.”
“아아, 그런 거였어? 그러면…….”
태희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우리집 막내가 새로 태어난 거네.”
“태어났다라.”
태석이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태어난 거 맞네. 강지야, 혹시 너 생일이 며칠인지 아니?”
“생일?”
강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로 모른다는 눈치였다. 그래, 모르는구나. 뭐, 잘 되었다. 태석이 달력을 훑어 보았다.
“그러면 오늘부터 생일로 하자.”
“오늘부터……?”
“그래, 오늘부터.”
“생일이라는 것은 탄생일을 기념하기 위함이라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태어난 지 한참이 지난 오늘이 생일인 거죠?”
태석이 뭐라 말할 수 없었다. 태희가 대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 그거야 그렇지만…… 태어난다는 거에는 여러 경우가 있어.”
“그게 무슨…….”
“일단은 생물학적인 탄생이 있고, 사회적인 탄생이 있지. 우리는 강지의 사회적인 탄생을 기념하는 거야.”
“아…….”
강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저는 노예에서 벗어나 사회적으로 탄생하게 된 날이 오늘이라는 거군요.”
“그래, 그러니까 오늘이…….”
태석은 그간 사건을 겪으며 날짜 감각이 사라진 지 오래라 달력을 찾았고, 태희가 먼저 답했다.
“4월 28일.”
“그래, 4월 28일.”
태석이 강지를 쳐다보며 말했다.
“4월 28일, 2018년. 이제부터 강지의 생일은 이 날이야.”
강지가 진정으로 탄생하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