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68. 다시 악마를 받다
스카이가 손을 뻗었다. 손을 뻗은 자리에 수십 개의 창이 생성되었다.
태석은 인상을 찌푸리며 마력을 끌어올리려 했다. 토르나 헬라, 로키, 오딘의 힘을 강신하려 했다.
파지지직.
“끄으으윽.”
아프다. 아파, 정말로 아파. 통증이 심장 내부에서부터 피를 찢어내면서 흘러나오는 느낌이다. 농담이 아니고 심장이 진짜 찢어진 느낌이다. 뭔가 이상한 병에 걸리는 거 아니겠지? 안 걸리긴 왜 안 걸리겠어. 흑수정이 이상한 기운을 흘리고 있는데 안 걸리는 게 더 이상하다.
태석은 인상을 찌푸리며 주먹을 쥐었다. 이제 믿을 건 주먹뿐이다. 속성 단검도 마력 탓에 일반 단검 수준의 위력밖에 내지 못한다. 그러니 태석은 속성 단검을 한 손에 역수로 쥔 채 노려보았다.
“으아아아!”
태석이 달려들었다. 태석을 향해 스카이가 만들어낸 기적, 창들이 일제히 태석을 노리고 덤벼들었다.
빙글.
태석이 몸을 돌려 창을 회피했다. 됐다! 피했다! 이제 찌르기만 하면…….
푹.
찔린 것은 태석이었다. 창 하나가 태석의 손등을 찔러 관통했다. 손에 구멍이 생겼다.
찌익, 짝.
태석이 서둘러 뒷주머니에서 힐링팩을 부착했다. 손등의 상처가 낫고, 움직일 수는 있게 되었다. 그 상태로 몸을 돌려 나머지 창을 피하고 다시 달려들었다. 휘청. 몸이 기울었다. 쿵! 탑이 뒤이어 난동을 부리는 개새끼 마냥 흔들렸다. 어지럽다. 태석은 이를 악물고 속성 단검을 집어 던졌다. 그리고 스카이를 향해 날아들었다.
팅!
스카이가 기적으로 방패를 만들었다.
그대로 공격을 모두 막아낸다.
뭐, 막아낸다 해도 속성 단검뿐이지만.
속성 단검이 기운 없이 땅으로 곤두박질. 하지만 태석은 포기하지 않고 덤벼들었다.
팟!
스카이가 뒤로 슬금 물러났다. 기적을 사용한 것인지 여간 빠른 게 아니다. 태석이 인상을 찌푸리며 스카이를 노려보았다.
“날다람쥐 같군, 스카이.”
“그래, 날다람쥐. 너는, 그럼 뭐지? 개미 새끼인가?”
“시끄러.”
“마력도, 신도 강신할 수 없는 너는 도대체 뭐지?”
“신도 강신할 수 없고, 마력도 쓸 수 없다. 하지만 다른 건 가능해.”
태석이 뭔가 떠올랐다.
굳이 ‘신’을 강신할 필요는 없다. 왜냐면 신을 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굳이 ‘마법’을 쓸 필요는 없다. 왜냐면, 마력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선한 마법을 쓸 수 없다. 요컨대, 악마의 기적을 이용한다면?
예를 들어 강신 세계의 악마의 기적을 사용한다면?
태석은 눈을 감고 집중했다.
그의 의식이 강신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현실의 시간이 멈추었다.
태석은 눈을 떴다.
흑수정이 웅웅거리면서 온갖 곳에 산발해 있었다. 그 어떤 신의 흔적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신의 흔적이 모두 희미해져 있었다. 현실의 흑수정의 에너지 탓에 강신 세계에도 잠시 영향이 간 모양이다. 태석이 비틀거리며 손등을 부여잡고 걸어갔다.
[왜 나를 가둔 거지?]
악마가 물었다.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야 너를 가둬야 했기 때문이지.”
분노의 악마, 데리안을 향해 보이지 않지만 말하며 끊임없이 흑수정의 밭을 뒹굴 듯이 걸어갔다.
상처가 온갖 곳에 나 있고, 지쳐 있는 그였기에 거의 기는 것 같았다. 이 상태로 악마와 싸운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기에 태석은 더욱더 싸우려고 한다.
[너는 네가 불행해지는 걸 원하는 거냐? 아니면 계속 구르고 구르다가 죽는 걸 원하는 거냐? 아니면 그걸 이겨내서 모두를 구원하는 길을 원하는 거냐?]
“전부.”
[네가 신이라도 되는 거냐? 지금의 너의 행동은 신들과 지나치게 동기화되어 벌이는 객기에 불과해. 그러니 포기해.]
“싫어, 데리안.”
[이름 부르지 마. 기분 나쁘니까.]
“나는 네가 필요해.”
[너를 돕는다고 나에게 이득이 있나?]
“당연히 있어.”
[뭐?]
“당연히 있다고.”
[뭔지 말해봐.]
“너를 붙잡아 두고 나의 강신 세계에 갇히게 만든 스카이와 맞짱을 뜰 수 있는 거야.”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쾅!
데리안이 태석의 눈앞에 있다. 태석이 헉헉 신음하며 겨우겨우 서 있었다. 데리안은 감옥 같은 장소에 붙잡혀 있었다. 손발이 전부 묶여 있었다. 대자로 묶인 채 어정쩡하게 앉아 있는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악마가 따로 없다. 더럽고 추잡해 보였다. 하지만 필요한 존재였다. 지금의 태석에게는.
데리안이 말했다.
“재밌는 농담을 해줬으니 기꺼이 도와주겠어.”
데리안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태석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뒤로 주욱 내뺐다.
감옥을 주먹으로 부수었다.
산산히 부수어진다.
정말로 이렇게 부수어도 되는 걸까? 악마를 이렇게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내버려둬도 되는 걸까? 정말로? 이러다가 태석에게 손해가 되는 것 아닐까?
손해는 보지 않는다.
게다가 알까 보냐.
태석은 자신이 손해를 입건 말건 현재의 사태를 해결하는 것에 중점을 두는 광기 어린 영웅이다. 미친 영웅이다. 오딘과 그는 별반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둘 다 광기를 갖고 파멸을 막으려는 존재니까. 오딘은 라그나로크를, 태석은 아직 찾아오지 않은 어떠한 위험을.
그렇기에 태석은 완전히 풀려나 고삐 풀린 망아지 꼴이 된 데리안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니 힘을 내놔.”
“기꺼이.”
데리안이 히죽 웃으며 손을 잡았다.
강신 세계의 흑수정이 요란한 광기 어린 흑빛을 내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요동치고, 태석은 현실로 돌아왔다.
데리안을 강마했다.
스카이는 그렇게 확신했다. 저 눈빛, 저 분노하는 표정. 모두 데리안의 것과 닮아 있었다.
하지만 역시 마력은 쓰지 못한다. 그저 신체 능력이 좋아졌을 뿐이다. 흑수정 앞에서 데리안 또한 평범한 악마에 불과하다. 조금 신체 능력이 뛰어난 헌터 정도이다.
반면 스카이는 신체 능력이 약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그녀에게는 기적이 있다. 기적으로 데리안을 압도하면 된다. 데리안은 기적은 약하고 신체능력이 강하니까.
태석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스카이.”
“왜 그러지? 그보다 너는 데리안인가, 태석인가.”
“둘 다.”
그리고는 태석이 달려들었다.
스카이가 다시 흑빛의 창을 꺼내 들었다. 이번에는 총합 스무 개. 모두 한 번에 태석을 향해 쏘았다. 태석은 그것을 피하지 않는다.
잠깐, 피하지 않는다고? 어째서? 저것에 맞으면 금방 골로 갈 텐데? 인간 주제에 어째서…….
아아, 그래서 데리안을 강마했군.
태석을 향해 날아간 창이 그대로 온몸에 꽂혔다.
명치에, 심장에, 다리에 팔에. 온갖 곳에 스무 군데 정도 구멍이 났다.
하지만 이내 그 구멍들이 천천히 회복된다. 재생된다. 그 와중에도 태석은 달렸다.
그리고 주먹을 휘두르기 위해 뒤로 주욱 뺐다. 스카이는 미처 피하지 못했다.
태석이 히죽 웃으며 소리쳤다.
“잘 들어, 악마.”
그리고는 주먹을 주욱 뻗어…….
“내가 불행해지기 위해 너는 죽어줘야 하니까.”
팡!
그대로 뻗어 스카이의 복부를 후려쳤다.
“커어어억?!”
스카이가 괴성을 지르며 탑의 밖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땅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피슉.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태석이 훅훅 숨을 들이켜며 고통스러워 한다. 데리안의 강마가 풀렸다. 의식이 흐려진다. 이제 다 내팽개치고 자고 싶다. 피곤하다.
이제 그냥 누워 있어도 되지 않을까? 스카이도 무찔렀고, 카락스도 무찔렀고…… 물론 태석이 있는 탑이 무너지는 게 단점이지만, 일행이 노예들은 전부 구출할 것이다. 그럴 거라 믿는다.
그렇기에 눈을 감고 휴식하려 한다. 영원한 휴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편안할 것이다. 그렇기에 천천히, 천천히 의식을 놓고 잠에 들려고 한다.
하지만 그때였다.
“포기하면 안 되는 겁니다.”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비틀거리며 눈을 뜨니 기계팔이 보였다.
아아, 저 기계팔은 분명…….
그보다 어째서 그 소녀가 태석의 앞에 있는 건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시간은 5분쯤 전으로 돌아간다.
“젠장! 이걸 어떻게 해야!”
대한이 쿵쿵 벽을 두드렸다. 하지만 부수어지지 않는다. 물론 마법으로 뚫고 진입하면 되지 않느냐 할 수 있다. 하지만 갑자기 흑수정이 공명하면서 뭔가 사악한 기운을 뿜기 시작했고, 어떤 마법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겐세가 말했다.
“이거 난감하군. 기적도 통하지 않아.”
악마의 기적은 통할 테지만, 성천주의 기적은 쓸 수 없다. 왜냐면, 흑수정을 정화하기 위한 것이 성천주의 기적이기에 흑수정의 에너지로 가득찬 공간에서는 막대한 양의 기적을 써야 제대로 원하는 기적을 활용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불가능한 상황. 태석은 어째서 벽을 만들어 일행이 들어오지 못하게 한 것일까?
방금 전에 오딘을 강신했을 때, 뭔가 깨닫고는 불행을 자초하는 짓을 하는 걸까?
젠장, 젠장, 젠장!
대한이 땅을 발로 내려찍었다. 태석은 너무 미쳤다. 너무 올곧아서 도리어 미쳐 보인다. 정신 나간 녀석이다. 왜 스스로를 사지로 몰아넣는 건데? 그게 멋져 보였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떻게 하지?
일단 어떻게 해야 태석을 도울 수 있는 거지?
그때였다.
옆에서 기계팔을 내밀며 강지가 등을 보이며 섰다.
늠름해 보인다. 어찌 저 어린 소녀에게서 믿음직스럽다는 감정이 돋아나는 건지 신기하다.
강지가 말했다.
“자, 여러분들은 모두 노예 구출에 나서세요. 지금에 이르러서는 오크들은 다 도주했을 겁니다. 왜냐면, 탑이 무너지기에.”
“강지는, 강지는 어떻게 할 거야?!”
시연이 소리쳤다. 강지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멍청한 아저씨를 구해야죠.”
그리고는 강지는 기계팔에 흑수정의 에너지를 방출했다.
파직, 파직, 파지지직!
막대한 에너지가 흑수정에 파고들었고, 강지가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 강해. 과부하가 걸릴 지경이야.’
사방에 흑수정 에너지가 가득하다. 흑수정의 에너지를 만들어 쓰는 기계팔이 전력 과다 현상처럼 터질 지경이다. 하지만 억지로 힘을 만들고, 대포 형태로 변형, 벽을 향해 쏘았다.
쿵!
탑 전체가 흔들렸다. 어쩌면 위에 있는 사람이 넘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다.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다.
강지가 탑의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현지가 그 모습을 보다가 소리쳤다.
“이번만큼은 자신 없지만, 어서 노예 구출에 나서야겠어요!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그래, 좋다!”
“으아아아!”
대한이 달리기 시작했다. 뒤이어 분위기에 잘 휘둘리는 시연이 따라 달렸고, 겐세가 달렸다. 그리고 겐세의 부하 헌터인 현지가 강지 쪽을 보다가 따라 달렸다.
대한 일행은 노예를 구출하기 시작했다. 강지는 태석을 구하기 위해 사지로 뛰어들었다. 태석은 거의 반죽음인 상태로 태석 자신을 불행하게 하면서까지 모두를 구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들의 행동은 분명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래야 모양새가 좋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