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
67. 덤벼라, 악마
쿵-.
탑이 공명하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태석은 아무래도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억지로 확신했다.
‘옳은 일이었어. 결코 내가 스스로 불행해지려고 한 일이 아니야. 그저 일행이 안전하면서 모두가 행복해지는 결말을 원할 뿐이지.’
해피 엔딩.
그것이 태석이 원하는 것이었다.
그때 오딘의 목소리가 들렸다.
[허나 그 해피 엔딩에 너는 없다. 스스로 그렇게 정해놓지 않았느냐.]
‘확실히 그럴지도 몰라.’
태석은 휘청이면서 탑의 공명을 견뎌내고 다시 계단을 올랐다.
젠장, 지진이라도 난 것인지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간신히 마력을 사방팔방으로 분출하여 견뎌낸 것이다. 그리고 뒤뚱거리며 걸어갔다. 꼴사납다.
머리가 아팠다. 탑의 공명이 귓가에 이명을 만들었다.
그 와중에도 오딘과의 대화는 선명하다.
[어쩔 셈이냐. 결국, 너의 죽음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 거냐.]
‘아니야, 절대로.’
[하지만 태석, 너는 이기적인 이타심으로 가득한 자다. 그 증거로 끊임없이 이 몸 오딘과의 동기화율이 오르고 있지 않느냐? 네가 위험해질수록 이 몸과의 동기화율은 기하급수적으로 오르고 있다. 이미 토르를 초월할 지경이다.]
‘그렇다 해도 나는 내가 불행해지는 걸 원하지 않아.’
[아니, 절대 아니다. 너에 대해서는 내가 잘 알아.]
‘네가 뭘 안다는 거지, 나에 대해서. 기껏해야 몇 분 전에 강신한 주제에!’
[하하, 그러면 증명해보아라.]
‘뭐?’
오딘의 목소리가 정곡을 찌르듯이 외쳤다.
[이 몸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라.]
‘…….’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라.
태석이 피식 웃었다. 드디어 오딘이라는 녀석이 할 소리를 알아낸 것 같았다. 태석을 욕하거나 태석의 몸을 빼앗으려는 사악한 수작이 아니었다. 오딘은 태석에게 원하고 있었다.
이상한 가치관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라고. 이기적인 이타심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라고.
“그래.”
태석이 계단을 오르면서 소리쳤다.
“나는 나의 행복도 원해.”
그리고는 중간층에 도착, 그곳에서 카락스가 비틀거리며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태석이 마력의 실을 부착한 속성 단검을 빠르게 던졌다. 카락스의 허리춤에 그것이 맞았다. 다시 마력의 실을 팽팽하게 하여 태석 쪽으로 날리고, 손잡이가 착 감겨 들렸다.
태석은 속성 단검을 역수로 쥔 채 카락스를 노려보았다. 카락스가 비틀거리며 자신의 허리에서 흘러나오는 혈액을 틀어막은 채 소리쳤다.
“도대체 언제까지 나를 쫓아올 셈이지? 나를 그만 내버려둬! 나를 내버려둬도 너에게는 이미 많은 동료들이 있잖아?! 안 그래? 그런데 어째서 사서 고생을 자초하는 거냐! 많은 사람을 구하겠다는 어이없는 신념으로!”
“그야 이미 시작해버렸거든. 그리고 노예들로서 인간이 고통받는 꼴은 못 보거든. 그리고…….”
태석이 입꼬리를 올렸다. 행복에 겨운 미소였다.
“나 또한 행복해지고 싶으니까. 그래서 나는 너와 싸우는 거다.”
“뭐 그렇게 말이 자주 바뀌는 거냐.”
카락스가 주먹을 굳게 쥐었다. 이미 망가진 장갑이 피식피식 연기를 흘렸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하지만 카락스는 탑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태석을 향해 돌진했다. 태석이 발을 뒤로 죽 내빼서 피해냈다. 그리고 속성 단검을 흘리듯 휘둘러 카락스의 팔꿈치에 상처를 냈다. 그리고 카락스의 등 뒤로 이동, 속성 단검을 들지 않은 한 손으로 손잡이의 밑동을 움켜잡고 뒤로 꾹 눌렀다.
푹.
카락스의 등에 태석의 속성 단검이 꽂혔다. 그리고 빙그르르 돌며 마치 춤사위를 하듯, 카락스의 목에 속성 단검으로 상처를 냈다.
피슉-.
피가 흘러나왔다.
“어라?”
카락스가 이상하다는 듯이 휘청이며 쓰러졌다.
태석이 말했다.
“크리티컬 히트다.”
장난스럽게, 현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카락스의 급소를 노렸으니 어쩌면 치명타가 맞을지도 모르지만…….
“이건 게임이 아니야. 현실이다.”
카락스가 기운을 잃고 쓰러지면서 말했다.
이건 게임이 아니라고. 현실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카락스의 몸이 빠르게 식어갔다.
카락스의 부모님,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여동생.
모두가 죽었다.
오크들의 행성에서, 그들의 거주지에서.
가족을 죽인 괴수는 아마 사자 형태의 은호였을 것이다. 20년 전에, 카락스가 어렸을 적에 은호가 저택으로 침입해 많은 인명피해를 낸 사건이 있었고, 그 사건 속에 카락스 또한 저택에 있던 것이다.
가족을 잡아먹고, 그 저택에서 일하는 집사를 잡아먹고, 여러 메이드니 하는 하녀들도 잡아먹었다.
그리고 카락스는 도주했다. 그리고 울먹이면서 다시 돌아왔을 때, 오크들이 은호를 잡은 뒤였고, 가족은 이미 모두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다.
아아, 그때 카락스는 생각했다.
살리고 싶다고. 어떻게든 살려내서 다시 화목한 가족을 만나고 싶다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오크들이 고통받아도 상관없다. 괴수들이 잡아먹은 거니까 괴수들의 근원인 흑수정을 조사해보자.
그렇게 생각하고, 상대적으로 약한 존재들인 인간의 행성, 그것도 이미 멸망한 나라에서 흑수정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연구가 거의 끝나는 과정 속에서 태석이 멋대로 나타났다.
태석은 죽어가는 카락스를 보며 말했다.
“카락스.”
독백한 것이다. 카락스는 아직 의식이 희미했지만 답하지 않는다.
“너는 가족이 죽었다고 들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야. 하지만 그 이후의 선택은 달랐다.”
선택이 달랐다. 그것은 카락스도 잘 안다.
“너는 가족을 살리고자 했고, 나는 남은 가족과 함께 생존하고자 했다. 그 선택이 달랐던 이유는 뭘까? 어째서 나는 이타심으로 뭉친 정신병자가 된 것이고, 너는 남들을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인물이 된 걸까? 대체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갈라놓은 걸까 고민했어.”
“그야…….”
카락스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인간이건 오크건 태생적인 차이가 있는 법이야. 태생적인 차이로 나와 너는 서로 다른 선택을 한 거지. 네가 지나치게 사람이 좋았던 탓이다, 쓰레기야.”
“뭐,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달라.”
카락스가 고개를 들어 올려 태석을 보았다. 태석은 쓰게 울고 있었다. 고통스러워 보였다.
“나에게 여동생마저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은 상상만 해도 두렵다.”
“어서 죽여라.”
“싫어. 너에게 쓸데없는 이타심이 생기고 말았어. 죽이지 않아.”
“그렇다면 자결해야겠군.”
오크가 주먹을 쥐고, 고장 난 장갑의 마지막 힘을 분출한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에 주먹을 한 방 꽂았다.
푹.
터져 나갔다.
머리가 잔혹하게 터져 의식이고 뭐고 시체조차 제대로 남겨지지 않은 상황이다.
태석이 쓰게 웃으며, 눈조차 감겨줄 수 없게끔 부수어진 머리를 보며 말했다.
“미친놈이야, 정말 너는.”
카락스가 아직 살아 있다면, 태석에게 말했겠지.
미친놈이라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없지만, 태석은 어째서인지 이해가 되었다. 여동생이 없었다면, 태석도 비슷한 인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잠시 여운에 잠겨 있다가.
쿵!
탑이 다시금 비명을 울렸다.
태석이 비틀거리다가 겨우 균형을 잡았다.
탑이 무너지는 것이 멈추었다. 다시 이명이 울리지 않는 공간이 되었다.
좋아, 이대로 다시 내려가서 일행에게 사과하고 적당히 넘기면 되는 걸…… 까?
하지만 그때였다.
“카락스, 정말 착하고 불쌍한 아이였지. 악계자 중에서 유독 정이 많이 가서 정사도 많이 했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울려 퍼졌다. 태석이 긴장하며 속성 단검을 역수로 들었다. 그리고 구두 소리가 울려 퍼진 쪽을 보았다.
스카이였다.
색욕의 악마, 스카이 할 블랜드.
그녀가 히죽 웃으며 태석을 향해 말했다.
“안녕, 태석.”
“또 만나는군.”
“너의 일행들은 모두 어디 간 거야? 죽인 거야?”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하긴, 그럴 리가 없지. 목숨을 걸고 낭떠러지에 뛰어내릴 정도로 동료를 소중히 하는 녀석이니까.”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악계자와 놀고 있었어. 저 흑수정 TOY는 나도 관심이 많거든. 그리고 태석 너도 관심이 많고. 그러니까 이곳에 있는 것이 당연하지. 관심사 두 개를 다 같이 만날 수 있으니까.”
“어쨌든, 여기서 안 좋은 짓을 하고 있던 건 확실하지?”
“그렇게 악인이어야지 싸울 맛이 난다면, 그래, 확실해.”
“그러면 가두어야겠어.”
“분노의 악마처럼?”
“그래.”
태석이 미소를 지었다. 사나운 미소였다.
“나와 싸우자.”
“좋아, 싸우자.”
스카이가 고개를 내려 카락스의 시체를 본다.
“그 전에.”
그리고는 스카이가 손을 뻗어 기적을 일으켰다. 불길한 검붉은 기운이 카락스의 몸에 스며들었다. 카락스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머리가 없는 카락스가 마치 듀라한이라도 되는 것처럼, 검은 안개를 뿜으며 일어나 있던 것이다.
“무슨…….”
“잠시 극적인 연출을 위해서 해야 할 게 있거든.”
그리고는 카락스의 시체, 그것도 움직이는 시체를 향해 명령한다.
“탑을 무너뜨리는 기능을 다시 작동시켜, 시체.”
우웅-.
카락스의 시체가 빠르게 움직여 아무런 쓸데없는 곁다리 동작 없이 움직였다. 그리고 탑을 파괴하는 시스템을 작동했다.
쿵!
흑수정에서 퍼져나간 에너지가 탑을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탑을 향해 검붉은 기체가 화악 퍼져나가 스쳐 지나갔다.
그 직후.
쿠루르르르르르르르를-!
탑이 미친 듯이 진동하고, 태석이 코피를 흘렸다.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게 무슨…….”
“간단해. 흑수정은 본디 헌터에게는 해롭거든. 그러니까 흑수정의 에너지를 잔뜩 분출해서 탑을 무너뜨리는 중인 지금, 이 탑 내부에서는 그 누구도 마력을 쓸 수 없어. 오직…….”
스카이의 몸에서 흑색의 기적이 소용돌이쳤다.
“기적만이 유효할 뿐.”
파직!
창이 태석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다행히 상처는 없었지만, 흑빛의 창이 벽에 부딪히자 벽이 파열음을 내며 터졌다. 거대한 웅덩이 같은 파편이 흩날렸다.
“하하.”
태석이 쓰게 웃었다.
“그래, 반갑군.”
“왜? 무슨 이상한 생각이라도 하는 거야?”
“이제야 싸울 맛이 나.”
불리하다. 지독히 불리하다. 하지만 이상하게 투쟁심이 들었다. 이래야 싸움이지! 라는 느낌. 그러니까 태석은 주먹을 쥐고, 속성 단검조차 뒷주머니에 단단히 쑤셔 넣고는 말했다.
“좋아, 덤벼라.”
그 어떤 능력도 없이 스카이를 쳐죽이겠다.
자신의 강신 세계를 이용해.
스카이가 그 꼴을 보고는 웃었다.
“하하.”
더욱 크게, 더욱 거세게.
“푸하하하하하하하하!”
한참을 웃어댄 스카이는 속으로 비웃었다.
무슨 미친 짓을 하는 거야. 그런 짓을 해서 무슨 이득이 있다고? 악마인 자신을 이길 수 있다고, 설마 착각하는 걸까? 그래, 착각은 자유이다. 하지만 그 착각으로 인해 끔찍한 일을 당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책임져야 할 사항이다.
그러니까 스카이는 전력을 다할 거다. 봐주는 일은 없다.
“좋아, 붙자.”
싸움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