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59. 의수
다시 태석 일행.
태석과 현지, 시연과 대한, 그리고 마지막으로 겐세.
이들은 계속해서 길이 반복되는 미로 저주를 통과한 뒤였다. 그리고 이제야 흑수정 TOY 정화를 위해 오크들과 싸울 줄 알았건만…….
일은 그렇게 편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애당초 태석의 일이 그렇게 쉽게 해결된 적은 없잖아? 태석은 한숨을 푹 내뱉었다.
지금 눈앞에 셀 수 있는 것만 따지면 5명. 아니, 5마리. 아니, 마리라고 하기에도 모호하다.
“크르르르, 나는, 크르르르, 싸우기 싫다.”
왜냐면, 짐승의 울음과 사람의 목소리가 동시에 튀어나왔거든. 한국인의 목소리인 것을 보아 분명한 사실이 있다. 그리고 믿기 힘들었다.
설마하니 이 정도로까지 인간을 홀대할 줄은.
태석이 어금니를 악물었다가 겐세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일이죠?”
제발, 태석은 자신이 듣기 싫은 답을 듣기 싫었다. 차라리 짐승을 인간화한 거라고 해줘. 인간과 짐승을 섞어버렸다는 대답은 듣기 싫으니까.
하지만 겐세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키메라이다.”
“키메라?”
키메라.
들은 적이 있다. 짐승과 짐승, 혹은 인간과 짐승을 강제로 결합하여 기괴한 생명체를 만들어낸 것. 그 혼합 생명체를 키메라라고 부른다.
이제 보니 얼굴의 일부분은 인간, 다리의 일부분은 인간, 그리고 짐승의 꼬리, 짐승의 몸, 혹은 인간의 몸. 정신 산만하게 섞여 있다. 마치 질 나쁜 그림판 합성 사진을 보는 것 같았다.
“절대 용서 못 해. 그 자식은, 내 손으로 처리하겠어.”
반드시 묵사발 낼 것이다. 올곧고 정직한 태석은, 악인을 처단하기로 마음먹었다.
대한은 자신의 지팡이를 꽉 잡았다. 대한의 힘은 약했지만, 어떻게든 싸울 수 있다. 이 지팡이로 힘을 더욱 증폭시킬 수 있기 때문에.
“이번엔 농담도 안 나오네. 거참. 태석.”
“왜?”
“어떻게 할 거야? 죽여, 말어?”
“별수 없지.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거야.”
그리고는 태석이 현지 쪽을 보았다.
“현지 씨, 자신 있죠?”
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양손에 마력을 모았다. 푸르딩딩한 빛이 손끝에 모였다. 마력의 실이 사용 완료되었다는 표시이다.
“당연히! 자신감 만반이에요!”
“언제나 자신감이 넘치시네요.”
“뭐.”
현지가 싱긋 웃었다.
“이럴 때는 일판사판 아니겠어요?”
이판사판인데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왔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현지는 원래 그런 인물이니까.
“땅개의 힘을 믿도록 하죠.”
“그러니까 제 별명이 왜 땅개냐니까요.”
“낸들 압니까.”
현지가 고개를 돌려 키메라를 보면서 “땅개, 땅개? 땅개!”라고 혼자 중얼거리고 있다.
……괜찮을 거야. 현지가 아무리 그래도 전투 중에 딴생각을 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으니까.
저 성격은 밝게 보이기 위한 포장. 실제의 성격은 더 차분하고 생각이 깊다. 낭떠러지 밑에 있을 때 알게 되었다.
겐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가자.”
언제나처럼 여자가 아니면 진지해지는 성욕의 천주, 성천주이다. 태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막으로 시연에게 말했다.
“시연 씨.”
“네, 네!”
살짝 피곤해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일까. 어쩐지 모르게 넋이 나간 느낌이다. 왜 저렇게 항상 피곤해하는 걸까.
“잘 싸워보자고요.”
“당연히 최선을 다해서. 그러니까…….”
시연이 얼굴을 붉혔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
태석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더 대화를 할 틈이 없었다.
크르르르-.
녀석이 울부짖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태석은 서둘러 속성 단검을 집어 던졌다. 키메라의 대가리 정중앙에 부딪혔다.
“아파, 크르르르르르! 아프다고, 크르르르르르르!”
인간의 목소리와 짐승의 소리 동시에 들린다. 태석은 마력의 실을 잡아당겼다. 미리 속성 단검에 연결해둔 것이다. 마력의 실을 잡아당기면서 자신의 손에 손잡이를 안착시켰다. 그리고 자신의 왼편에서 돌진해오는 키메라에게 검을 휘둘렀다. 역수로 잡은 속성 단검이 깔끔하게 키메라의 몸을 갈랐다.
들어갔다.
이 정도면 하나는 처리…… 겠지?
크르르르르르!
어라? 아니다.
태석은 뒤로 한 걸음 번쩍 물러났다. 옆에서 현지가 마력의 실로 태석이 한 번 베었던 키메라를 깔끔하게 일도양단한다.
이번에는 정말로 죽었을…….
크르르르르르!
아니 뭐야, 왜 안 죽어?!
태석은 당황했다.
키메라를 분명히 죽고도 남을 정도로 상처를 냈다. 시체같이 살이 부식된 탓인지, 두부 써는 것처럼 간단하게 썰린 것이다.
하지만 썰림과 동시에 다시 회복된다. 마치 찰흙을 다시 뭉쳐서 합치는 것처럼, 녀석들이 합성된다.
겐세가 서둘러 중력 기적을 사용한다. 손을 뻗어 키메라의 몸에 손을 얹고, 중력 기적을 발동.
키메라의 몸 전체의 중심에 강한 중력이 작용한다.
그리고 키메라의 몸이 찌그러져서 완전히 고무공 크기만큼 압축된다.
과연, 대단한 능력이다.
겐세의 능력은 중력에 관련된 것이 많았다. 그렇기에 그 중력을 이용해 별의별 짓을 할 수 있다. 본인의 중력을 약화시켜 하늘로 떠오를 수도, 거꾸로 땅을 밟을 수도, 상대방을 압축시킬 수도 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즉사. 헌터는 조금 버티겠지만 그래도 즉사이다.
그러니까 키메라 정도라면 한 번에…… 가 아니다.
키메라의 압축된 몸이 서서히 흐믈흐믈거리며 액체화된다. 그리고 그것이 찰흙을 빚듯이 다시 뭉친다. 그리고 찰흙이 모양을 잡는 듯이 움직이고, 키메라의 육체로 다시 복구된다.
“뭐야, 대체!”
대한이 참지 못하고 비명과도 같은 불만을 터트렸다.
이번엔 동감이다.
태석 또한 짜증이 났다.
도대체 이 녀석들을 어떻게 죽여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태석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시연 쪽을 보았다.
“합, 합! 합!”
시연이 검술을 활용하고 있다. 양손검에 빛 마법을 도핑하여 쓰고 있는 것이다. 언데드나 기타 사악한 괴수들에게 잘 통하는 마법이니, 도핑하는 것만으로도 제법 뛰어난 효력을 발휘할 테지만…….
크르르르르르-!
키메라의 무식한 회복 능력에는 못 당한다. 태석이 입을 악물었다.
대체, 대체 어떻게 해야……. 죽지 않는 적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태석이 인상을 찌푸리고 생각을 거듭하고, 마침내 결론을 내린다.
강마.
악마를 다시 한 번 강마하는 것이다. 불멸의 존재를 죽이는 데에는 악마의 힘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어떤 이론이나 논리는 없다. 그저 그럴 거라는 감이다.
태석이 손을 뻗고 악마를 강마하려 한다.
[데리안의 응답을 기다립니다.]
[데리안의 응답을 기다립니다.]
[데리안의 응답이 오기까지 아직 시간이 걸립니다…….]
‘뭐야, 왜?’
태석은 그때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동기화율.
데리안과 자신의 동기화율은 그리 높지 않았다. 태석은 악마보다는 천사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로키에게 동기화율 조작을 받아 천사로 변신까지 했었다. 그러니 악마로 강마하려면 특수한 조건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악을 받아들여야 할 정도로 절박하거나 하는 그런 것.
그런데 태석은 악마를 받아들일 정도로 지금이 절박한지는 모르겠다. 그저 편하게 해결하려고 강마하려는 거 아닐까 싶다.
강마는 안 되는 건가?
그렇다면 헬라다.
손을 뻗어 헬라를 강신하려 할 때였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태석 일행이 모조리 그쪽을 본다.
“아니 됩니다, 어르신. 여러분들께는 무리이신 겁니다.”
이상한 말투였다.
어린아이 같은 말투였지만, 차갑다.
태석보다도 비극을 많이 겪은 목소리 같다. 태석은 그 목소리의 과거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태석과 같은 상황에 놓였던 아이. 허나 전혀 다른 운명의 아이.
수풀을 잘라냈다. 뭘로 잘라낸 거지? 모습을 드러낸 아이는, 흑장발의 소녀였다. 한 손은 기계 의수를 단 듯, 강철 갑옷 같은 기다란 팔이었다. 왼팔이었다. 그 왼팔 끝의 손등 부분에는 흑수정이 박혀 있었다.
치익.
뭔가를 의수 쪽에서 빨아들이는 소리가 났다. 기계팔 소녀의 기계팔이 번쩍 하고 검은빛을 냈다. 이내 빛은 보라색 안개로 변질하고, 거대한 대포 같이 변했다.
그것을 오른팔로 지탱한 소녀는 대포로 변한 왼팔이 떨어져 나갈 정도의 반동을 일으키며 꽝! 불을 머금은 탄환을 쏘았다.
콰지지지지직!
키메라가 단숨에 불길에 타들어 가 녹아 들어간다. 다 죽었나? 불꽃 안개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흙까지 하얗게 타들어 갈 정도였다.
태석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때였다.
“두 마리 더!”
태석이 서둘러 소리쳤다. 기계팔 소녀는 앞쪽을 보았다. 정말이군. 기계팔 소녀는 두 마리가 용케도 살아남아 자신에게 뛰어드는 모습을 보고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정말이지 키메라 님들은 항상 정도를 모르고 날뛰시는군요.”
치이이익-.
이번에도 기계팔이 무언가 액체 같은 것을 빨아들이는 소리를 냈다. 곧이어 검은 빛이 새어나오고, 보라색 안개로 덮였다. 그 직후 왼팔이 이번에는 대포가 아닌, 거대한 검날의 형태로 변했다. 그것도 날 부분이 화르르 불타고 있다. 그 검날을 빠르게 휘둘러 키메라들을 일도양단한다. 일도양단 된 키메라 두 마리가 흔적도 없이 타들어 갔다.
“끝이시군요.”
뭐가 ‘시군요’인 걸까. 지나치게 존댓말이 심하다. 굳이 존칭을 취하지 않는 부분에서까지 쓰니까 오히려 비꼬는 것 같았다. 태석이 살짝 얼빠진 얼굴로 물었다.
“너는 누구지?”
“당신 님들은 누구십니까?”
당신 님……? 무슨 의미인지는 알아들을 수 있었기에 태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려 했지만, 기계팔 소녀가 선수를 치며 말했다.
“만약 적이시라면, 반드시 죽여드릴 겁니다.”
“적이라…….”
태석이 살짝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우리는 흑수정 TOY를 정화하기 위해 왔어. 그러기 위해서 오크들을 죽여서 노예가 된 인간들을 풀어줄 생각이고.”
“……정말이십니까?”
“정말이야.”
“그러면 제 편이군요.”
기계팔 소녀가 자신의 기계가 아닌 오른손을 내밀었다. 악수의 자세였다. 태석은 슬쩍 왼팔을 보았다. 기계팔이 다시 평범하지만 소녀의 몸 비율치고는 긴 팔로 변한 것을 보았다.
기계팔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는 강지. 노예 인간이었지만 탈출하고, 다른 노예분들께서 탈출하실 수 있도록 돕고자 하고 있습니다.”
“나는 태석, 그리고 나머지는 순서대로…….”
이름들을 전부 말해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S랭크 헌터, 엄태석이다. 강지, 너도 헌터인 거야? 그 왼팔은?”
“헌터가 아닙니다.”
“헌터가 아니라고?”
“네.”
“그러면 뭐지, 그 왼팔은…….”
“헌터가 아니지만, 헌터를 흉내 내어 탈출하기 위해, 스스로 왼팔을 자르고 의수를 장착했습니다.”
“…….”
태석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탈출하기 위해 의수를 달았다까지는 괜찮다. 하지만 자신의 왼팔까지 잘라낼 정도로 절박하다니.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어째서 이 어린아이가 고통받아야 하는 걸까?
태석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 그러면 함께 힘내보자.”
“함께…… 행동해주시는 겁니까?”
“그래, 당연하지.”
태석이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지금은 일손이 부족하니까 강지 같은 사람이 있다면 대환영이야.”
“그렇…… 군요.”
강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심한 모양이다.
“그러면 잠시 동안 행동을 함께 해주셨으면 합니다.”
태석이 미소를 지었다.
“좋아.”
그렇게 갑작스럽게 일행이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