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
57. 고문하다
“으으으으.”
겐세가 머리를 부여잡고 있다. 전격에 당했을 때의 후유증이 아직도 남은 모양이다. 대한은 거의 기절 상태였다. 죽은 거 아닌가 싶을 정도.
태석조차 이 상황에서는 살짝 미안함을 느꼈다. 태석이 너무 고지식했던 거 아닐까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겐세 씨가 변태 짓을 하는 건 좀…….’
아무래도 용서할 수는 없다. 성희롱 아닌가, 여자 몸을 훔쳐 보는 것은.
하지만 태석은 남자는 물론 여자 쪽에서도 훔쳐보려는 소동이 있었다는 것을 모른다.
대한이 말했다.
“야, 그보다 이 숙소, 우리밖에 없는 거냐?”
“나는 처음이라 잘 모르겠지만, 이 숙소에서 딱히 다른 사람의 흔적을 보지는 못했는데.”
태석이 적당히 답했다.
그야 그럴 것이, 태석은 헌터 경력이 그리 길지 않았다. 헌터 전용 숙소에 머문 적도 없다. 그렇기에 원래 이 정도로 조용한 장소이겠거니 했는데, 아닌 모양이다.
현지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전에 여기 왔을 때는 상당히 시끄러웠던 거 같아요. 술판을 벌이고 있었으니까.”
“그랬나요.”
겐세가 이제 괜찮아진 듯 의문에 답하고자 했다.
“그 이유를 말해주도록 하지.”
이유는 간단했다.
현재 북한 쪽에서 흑수정 TOY의 큰 파장이 일었고, 한국의 평범한 헌터들은 감당할 수 없는 정도의 괴수들이 등장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헌터들은 이곳의 출입을 삼가고 있다.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겁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헌터도 인간이다. 아무리 강해도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은 무섭기 마련. 태석은 그것을 별로 탓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별난 편이니까.
“그렇군요. 이유는 알겠어요.”
“하아.”
대한이 하품을 늘어지게 했다. 옆에서 시연 또한 옮은 건지 하품을 길게 하고 의자에 축 늘어져 잠에 들었다.
“피곤해애애애애.”
“자면서 저러는 건 대체 뭐지.”
대한이 현지의 잠꼬대를 들으면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태석이 피식 웃었다.
“뭐, 피곤할 수도 있겠지.”
“시연 씨는 잠이 많더라고요. 목욕탕에서 깨우느라 고생했어요. 헤헤.”
현지가 활짝 웃으며 태석을 보며 말한다. 대한이 그 둘을 보다가 한숨을 뱉었다.
“너무 친해지신 것 같은데요, 현지 씨.”
“질투인가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대한이 드물게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그냥, 보기 좋아서.”
“그런……가요.”
태석이 싱긋 웃었다.
“뭐, 사지를 건너왔었으니까. 그 낭떠러지 밑에서 일어난 일들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났었으니까.”
“그러니까 하는 말인데.”
대한이 인상을 찌푸렸다.
“엄청 걱정했다고. 도대체 뭐하는 짓이야. 낭떠러지에 몸 날리는 놈은 처음 봤다.”
“살았으니까 된 거 아니야?”
“이게…….”
대한이 한숨을 뱉었다.
“아냐, 아니다. 너 같은 무모한 바보한테 더 할 말 없다. 훠이훠이.”
손을 핑핑 내저으면서 대한이 말하자 태석 또한 할 말이 없었다. 현지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도 용감하니 좋죠.”
“네네, 그렇겠죠~.”
대한이 그렇게 적당히 대답했을 때였다.
“맞아요, 태석 씨. 왜 그러셨어어어어어여어어어.”
시연의 잠꼬대.
그러면서 현 상황에 맞는 적당한 말이라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에 잠이 깬 시연은 의아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겐세가 그들의 잡담을 잠시 듣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시연도 깨어났고, 이제부터 의논에 들어가도록 하겠다.”
본론으로 들어가자. 태석을 비롯한 모두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확인된 오크 집단은 이 정도이다.”
간단했다. 아니, 간단하기보다는 지나칠 정도로 정직한 자료였다. 대기실에 놓인 칠판에 그려 놓은 붉은 표식이 오크 집단의 위치였고, 거의 대부분의 지역이 붉게 칠해져 있다. 안 칠해진 곳에는 사람 모양의 낙서 같은 것이 그려져 있다.
“저 인간 표식은 뭐죠?”
궁금하다. 궁금하다기보다는 일을 위해 알아야 하는 정보였다. 딱히 비밀로 할 것은 아니었는지 겐세가 바로 말했다.
“노예 인간.”
“노예…… 라고 하셨습니까?”
이 시대에 노예라니. 하지만 인류가 처음으로 발견한 대륙에 살던 자들을 노예로 부렸던 것처럼, 오크들이 새로운 생명체가 존재하는 행성, 지구에 도달해서 인간을 노예로 부리는 것은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개자식들.”
“뭐, 그자들 입장에서는 별로 나쁜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지.”
“그런데 궁금한 게 있습니다.”
“열렬한 학생이군, 태석. 그래, 질문해봐라.”
태석이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엘프나 드워프, 그러니까 그 집단들 말입니다.”
“연합을 말하는 거군.”
“그래요, 연합. 그 연합 쪽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오크들이 인간을 노예로 부린다는 거 말인가?”
“네, 알고 있습니까?”
“알고 있지만 내버려두는 입장이다.”
“어째서요. 그들은 오크들의 사악한 행동을 막기 위해 나서는 집단 아니었습니까?”
“너무 정직해. 태석, 그게 네 단점일지도 모르겠군.”
겐세가 현지 쪽을 보았다. 현지가 고개를 끄덕이고 의문을 풀어주기 위해 말을 이어주었다.
“그러니까 태석 씨.”
“네.”
“연합 쪽에서는 웬만하면 오크의 악행을 막지만…… 손익도 많이 따지는 편이에요. 정확히는 최저한의 소모로 최대한의 악행을 막는 거죠.”
“그렇다는 말은…….”
“이들에게 있어서 북한의 노예 인간 사건은 최대한의 악행이 아니거나, 최소한의 소모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소리죠.”
“…….”
맞는 소리였다.
우주의 수많은 구역에서 오크들이 악행을 벌이는 상황. 외딴 섬 같은 반도에 일어나는 사건은 그들 스스로 해결하게 내버려두는 게 이득일지도 모른다. 더 큰 사건들을 막기 위해 고의로 무시한 거다.
하지만…… 하지만 이건 아니잖아.
인간이 노예가 된다니. 생리적으로 불쾌하다.
태석이 말했다.
“반드시 해결해야겠군요.”
“일단 상황 파악은 됐겠지.”
“네, 확실히.”
“대한도?”
대한이 씨익 웃었다.
“당연하죠. 그러니까 오크들이 노예 인간을 부리면서 흑수정 쪽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는 거 아니에요?”
“신기하군.”
“신기하네요.”
“나도 솔직히, 친구지만 신기한 입장.”
모두가 입을 모아 신기하다고 한다.
“……저기요?”
대한이 뭔가 반박하려 했지만, 그들은 짐을 챙기고 나갈 채비를 하는 중이다. 대한은 한숨을 푹 내뱉었다.
‘뭐, 내 인생이 그렇지. 내 인생은 항상 그런 거야…….’
그렇게 자기 한탄을 하는 중이었다.
쾅!
순간 벽이 부수어진다.
그리고.
벽이 부수어진다. 정확히는 바깥쪽에서 누가 부수었다. 이전에 기차에 중력자 에너지가 폭발하여 덮쳤을 때의 악몽이 떠올랐다. 태석은 순간적으로 분노의 악마, 데리안을 강마했다. 그리고 기분 나쁜 에너지를 다루어 더 이상의 강력한 폭발을 막기 위해 손을 뻗었다.
붉은 기체가 떠올라 기차에서 날아왔었고, 이번엔 숙소 벽을 부순 에너지를 가두었다. 그리고 저 멀리 하늘로 날렸다.
휭-.
허공으로 날아간 에너지가 공중에서 폭죽을 연상케 하면서 스스로 자멸한다.
태석이 데리안의 강마를 풀고 천둥을 휘감았다. 토르를 강신한 것이다.
그리고 부수어진 벽의 시멘트 안개를 본다. 아예 폭풍을 휘몰아쳐 먼지를 날려보냈다.
그리고 태석, 현지, 겐세, 시연, 대한이 벽 쪽을 노려본다.
그곳에는, 신사복을 입은 덩치 큰 사내들이 잔뜩 있었다. 아니, 사내들뿐인가? 분명 종족을 기준으로 보자면 여자도 있을지 모른다. 실제로 머리가 긴 생김새도 있었다.
그래, 오크였다.
오크들이 어째서인지 벽을 에너지를 방출하여 벽을 부수면서까지 이곳으로 쳐들어온 것이다.
“너희들은 누구지?”
태석이 물었다.
취익! 취익! 취익!
한참을 추임새를 넣던 오크 일당 중 머리가 길고 땋은 녀석이 외쳤다.
“우리는 카락스의 부하!”
카락스의 부하라니, 무슨 소리지? 카락스가 대체 뭐지? 뭐하는 놈이야, 그놈은. 일단 오크인가? 오크겠지? 그렇다면 카락스 또한 태석 일행의 적이다. 태석이 속성 단검을 역수로 잡아 앞으로 내민 채 전투 자세를 잡는다.
현지가 마력의 실을 터트려 허공에 휘적인다.
시연이 빛 마법을 몸에 휘감고, 새로 장만한 무기인 장검에 빛 마법으로 도핑한다.
대한 또한 지팡이를 든 채 어둠 마법을 휘감아 모으고 있다.
겐세가 기적을 쓸 준비를 하고 손을 내밀었다.
태석이 말했다.
“오크들.”
혀로 입술을 핥으며.
“이제부터 너희들의 목숨은 없다.”
“그러니까 그 중2병 발언 그만하라니까!”
대한이 태클을 걸었지만, 아무도 웃거나 반응하지 않는다.
“알았어요, 알았어. 상황적 허용이라고 쳐 줄게.”
태석이 그제야 피식 웃었다.
“좋아. 그러면 시작!”
일제히 전투를 개시한다.
결과는 압도적이었다.
어라, 이렇게 약한 녀석들이었나? 오크 일당을 손쉽게 격파한 태석 일행은 물론 태석조차 신기하다고 느꼈다.
예전에 낭떠러지에서 만난 녀석들은 이보다 힘들었던 거 같은데. 뭐지? 태석이 강해진 건가?
아니면 동료들과 함께 싸워서 유리했던 건가? 그런 건가?
잘은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쉽게 이겼으니 다행이다. 솔직히, 태석은 조금 귀찮았으니까. 오크들은 덩치가 커서 체급상 불리한데다가 그들은 싸움을 잘했으니까 몇몇 헌터들은 오크들과 싸움은 되도록 피하려고 한다.
태석이 현지에게 말했다.
“뭔가 쉽지 않았어요?”
“그렇긴 한데…… 확실히 우리가 강해진 걸 수도.”
“그런가.”
“그런 거 같아요.”
태석이 오크들 중 목숨이 붙은 녀석에게 다가갔다. 방금 전, 머리가 길고 땋은 녀석이다. 태석은 오크의 뺨을 몇 번 후려갈겼다.
“으, 으으윽 취이이이익.”
“일어나. 일어나, 새끼야.”
“뭐지? 진 건가.”
“그래, 네가 졌어. 우리가 이겼고.”
“그렇단 말인가. 재밌군. 역시 카락스 님이 주의하라 할 만했어.”
“그보다 질문이 있어.”
“적에게 정보를 풀지 않는다.”
“현지 씨.”
“네.”
현지가 마력의 실로 오크에게 박는다. 그리고 신경 계통에 교란을 일으켜 통감각을 일제히 자극했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비명.
괴롭다.
아프다.
뭐야, 이거. 죽을 거 같아.
살려줘.
고통스럽다고-!
그만, 그만, 그만, 그만, 그만!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아파, 아프다고. 죽을 것 같아. 뭐야, 이 고통, 어떻게 견딜 수 있는 게 아니야. 도저히…… 죽을 것 같…….
의식이 흐려지기까지 한다.
이대로 가면 위험하다.
오크는 생명의 위험을 느꼈다.
“온몸의 통감각을 최대한 자극하고 있어. 아마 이대로 5분 정도 지난다면 너는 폐인이 되거나, 쇼크로 죽겠지.”
“그, 만, 뭐든지, 말할, 테니까!”
“그래, 말해.”
현지에게 신호를 보내자 마력의 실을 거두었다.
오크가 호흡을 거칠게 하면서 말했다.
“그래, 말해줄게.”
그리고는 심호흡을 한다.
“어디서부터 말해주면 되지?”
“네가 아는 것, 전부.”
태석이 미소를 지으며 그리 말했고, 오크는 그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