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54. 악마를 받다
태석이 강신 세계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 눈을 감으려 할 때였다.
“잠깐.”
헬라가 태석을 불렀다. 태석이 눈을 떠 헬라를 보았다. 헬라가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태석은 한시가 급했다. 그렇기에 빠르게 강신 세계에서 나가 동굴 밖으로 나가 일행과 조우해야 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지? 중요한 일인가? 중요하지 않다면 바로 빠져나올 생각이었는 데.
“중요하게 할 말이 있어.”
“뭔데?”
“음, 그러니까.”
헬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 결심한 모양이다. 사뭇 진지한 표정이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태석도 긴장하게끔 하는 표정이다.
헬라가 말했다.
“데리안의 머릿속을 뒤적여 봤는데.”
“뒤적이는 게 가능한 거야?”
“뭐, 이곳은 그런 게 가능한 세상이니까. 강신 세계라고 하던가?”
“아무튼, 무슨 내용인데?”
“그러니까 데리안이 스카이라는 녀석과 대화하던 장면에서 알아낸 거야.”
“말해봐.”
“데리안에게 스카이는 이 세상이 게임 같은 것이 아닐까 하더라고.”
“게임 같다라……. 확실히 옛날에 비해서는 게임 같지. 괴수들도 웬만하면 게임에서 본 존재들이고. 오크나 드워프나 엘프들도…….”
“아니, 그 정도의 의미가 아니야.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게임 같다고 한 거지.”
“근본적인 문제?”
“그래, 근본적인 문제.”
근본적인 문제라,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태석이 그것을 더 자세히 캐물으려고 할 때, 헬라가 미소를 지었다.
“이 세상을 관리하는 관리자가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의견이었던 모양이야. 기적이라는 것이 사실 관리자가 캐쉬 아이템을 주듯 건네주는 거고, 성천주는 그것을 이용한다는 거지.”
“음, 그런가.”
“이상한 얘기지?”
“확실히 이상해. 확실한 정보야?”
“아니. 정확히는, 스카이의 뇌피셜. 상상 속의 이야기야.”
“그러면 일단 무시하도록 해야겠지. 스카이가 이런 상황까지 예상해서 헛소리를 한 걸 수도 있으니까.”
“그보다.”
헬라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데리안을 이곳으로 끌고 오면서 외벽에 상당한 충격이 간 모양이야.”
“뭐?”
태석은 화들짝 놀랐다. 벽에 충격이 갔다고? 그렇게 약해 보이는 벽에 충격이 갔다니. 얼마만큼의 충격인지는 모르지만, 큰일이 일어난 걸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동굴이 무너지기 시작한다거나.
서둘러 강신 세계에서 빠져나왔다. 태석의 모습이 흐물거리며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헬라가 고개를 저었다.
“이런, 가버렸네.”
헬라가 키득 웃었다.
현실로 돌아온 태석은 눈을 떴다. 손을 뻗고 있던 의자 쪽에는 아무도 없다. 현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있었다.
태석이 손을 대자 사라지는 이 상황이 이상하다. 게다가 악마라는 존재였다. 설마하니 도망친 건…… 아닐 거다. 그것은 태석의 표정을 보고 알 수 있었다.
묘하게 분위기가 달랐다. 예전부터 느낀 건데, 태석에게는 절대적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분위기였다. 완벽한 존재 같다는 것이다. 지금은 그것보다 더 완벽해진 느낌이다. 현지가 침을 삼켰다. 긴장한 것이다.
태석이 말했다.
“현지 씨.”
“네.”
“이제부터 벽이 무너질 거예요. 상당한 충격 때문에 동굴이 난장판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간단하죠.”
태석이 현지의 손을 붙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토껴야지.”
“네?!”
“도망가자고요!”
“으아아아아아아아!”
그 말과 동시였다.
쿠구구구구구-.
동굴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현지의 뒤통수로 바위 하나가 스치고 떨어졌다.
“끄아아아앙!”
비명이 요란하다.
태석과 현지는 도주를 시작했다.
“태석 씨가 악마한테 손을 댄 이후로 뭔가 팡 하고 터져나가긴 했는데, 그것 때문에 동굴이 무너지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괜히 악마 받아들였어요!”
“악마를 받다니 그게 무슨.”
“나중에 천천히 설명하기로 하고, 일단 도망치자고요!”
“그보다 지금 전속력으로 달리기 곤란하다고요!”
현지가 발을 절기 시작했다. 태석이 당황했다.
“이런, 발의 상처가 다시 터진 건가요!?”
“몰라요! 아마도!”
“그러면 어떻게 방법을 찾아요!”
“찾고 있어요. 아, 알겠다! 태석 씨, 잠깐 스톱!”
“네!”
태석과 현지가 멈췄다. 현지가 마력의 실을 자신에게 박았다. 그러자 삐걱거리면서도 몸이 움직였다.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저를 인형처럼 쓰는 거예요! 마력의 실은 본디 조종에 능한 종류의 마력. 그러니까 저 자신을 억지로 조종하여 제가 움직이기 힘든 방향도 억지로 움직이게 하는 거죠!”
“그렇게 하면 뭐가 다른 거죠?”
현지가 키득 웃었다.
“아프거나 힘들어 죽을 것 같아도 몸을 억지로 움직이는 게 가능하죠.”
태석이 미소를 지었다.
이 여자도 무모하다. 묘하게 마음에 든다. 태석이 서둘러 소리쳤다.
“그러면 어서 달립시다!”
“네!”
현지와 태석이 도주를 시작했다.
태석과 현지가 모퉁이를 돌았다. 목적지까지 얼마나 걸렸지? 언제쯤이면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는 거지? 짜증 난다. 그보다 무섭다. 여기까지 왔는데 개죽음당할 수는 없다. 태석이 서둘러 몸을 움직여 달려간다. 현지 또한 마력의 실로 강제로 자신을 컨트롤 해 움직여 도망친다.
슬슬 태석도 힘에 부친다. 쉬지도 못하고 악마 둘과 조우하고, 오크들과 싸우고, 거대 거미와도 싸웠다. 이 정도라면 지금 당장 쓰러져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고개를 젓는다. 여기서 쓰러지면 끝장이다. 대한과 시연을 보지 못하고, 겐세와의 관계도 끊긴다. 그러니 죽을 수 없다. 반드시 살아 돌아와 TOY를 정화하여 영웅이 될 거다.
죽은 자는 영웅으로 대접받는다 하지만 태석은 죽어서 모든 걸 잃기는 싫었다.
태석이 소리쳤다.
“으아아아아아아아!”
더욱 빠른 속도의 달리기. 현지가 서둘러 마력의 실로 자신의 몸을 가속하여 따라 붙는다.
쿵! 쿵! 쾅!
태석과 현지의 뒤로 바윗덩이들이 떨어오고 길이 막히기도 한다. 그리고 바윗덩이는 태석의 앞으로도 떨어졌고, 결론적으로 길을 막고 말았다.
현지가 헉헉거리며 소리쳤다.
“어떻게 하죠?”
“생각 중이에요.”
“동굴이 무너지는 중이에요. 빨리 생각하자고요!”
“그보다 길이 막힌 상황인데. 젠장, 뒤쪽도 막혔어요.”
“그러면, 그러면, 제가 마력의 실로.”
태석이 고개를 저었다.
“현지 씨는 자신의 몸 조작에 온전히 힘을 발휘하세요.”
“네? 하지만 저 바윗덩이는…….”
“부수면 돼요.”
“부수면 더 충격이 가게 되고, 무너지고 말 거예요. 개죽음이라고요!”
“정확히 말하자면, 마력의 실로 깎아내는 거죠.”
“하지만 저보고 마력의 실을 다른 데 쓰지 말라면서요.”
“그러니까.”
태석이 미소를 지었다.
“제가 해보겠다는 겁니다.”
“네?”
그때였다.
현지는 보았다.
태석이 손을 뻗고, 눈을 감고 집중을 하는 모습을.
마치 마력의 실을 쓰겠다는 듯이.
마력의 실.
언제 쓰이기 시작한 기술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오크와 엘프, 드워프 등의 인종들은 마력의 실이라는 기술을 몇몇 종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인간들에게는 당연히 미지의 학문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소수의 귀족들의 학문이나 다름없었다.
마력은 본디 다양한 형태로, 마치 기적처럼 신비한 힘을 쓸 수 있게 하는 기술.
그렇기에 마력의 실은 무궁무진한 방법으로 쓰일 수 있었으며, 그것 중에는 마력의 실의 성질은 날카로운 칼의 형태로 쓰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보통은 물체 조작에 이용하지만…… 마력의 실의 발전에 따라 용도가 더욱 폭이 넓어진 것이다.
태석은 눈을 감고 집중했다.
마력의 실에 대해서는 며칠 전 알아보았다. 기차에 타기 직전 현지와 함께 TOY 정화를 한다는 이유로, 더욱 현지와 싸울 때 적절히 지시를 내리기 위해 연구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태석은 스스로 마력의 실을 사용하기 위한 많은 노력을 했고 실패했다.
‘손끝으로, 손끝으로 마력을 응축한다. 조금씩 압박하여 천천히 꺼낸다.’
여기까지는 가능하다.
문제는 그렇게 압축해 얇게 한 마력의 실을 마법의 형태로 방출하는 것.
태석은 그 과정에서 항상 통증을 느꼈고, 병원에도 몇 번 실려갈 뻔했다.
하지만 그런 실패가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의 성공에.
팡!
태석의 손에서 마력의 실이 뻗어 나왔다. 태석은 눈을 뜨지 않았다.
지금은 이 마력의 실을 유지하는 것도 힘든 상황이니까. 그러니까 최대한의 집중을 위해 눈을 감은 채 작업을 진행한다.
마력의 실이 팽팽하게 뻗어져 바위에 닿는 느낌이 든다.
‘마력의 실의 성질 변경. 날카롭고 뭐든지 벨 수 있는 형태로.’
팟.
마력의 실이 금색의 빛을 냈다, 라고 생각했다. 확신은 못 한다. 보이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바위를 조금씩 커팅하고 있었다.
쿵! 쿵! 쿵!
동굴이 무너지는 소리. 그렇기에 빠르게 해야 한다.
팟!
마력의 실로 바윗덩이에 구멍을 내고, 그 구멍을 사람 한 명 지나갈 수 있는 크기로 바꿨다.
태석이 눈을 떴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성공했다.”
마력의 실로 바위를 잘라내는 데에 성공했다.
현지가 잠시 멍한 표정으로 그것을 보다가 정신 차린 듯 소리쳤다.
“어서 먼저 들어가요!”
현지가 서둘러 말했다.
태석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통과했다. 입구가 보인다. 저 멀리에 대한과 시연이 보였다. 겐세 또한 보였다. 그들은 태석을 발견하고는 손을 뻗으며 미소를 지었다.
태석 또한 손을 흔들며 달려가려 한다. 현지 또한 뒤따라 걸어갔다.
좋아 이걸로 탈출 성공이다, 라고 생각했을 때였다.
쿵!
태석의 뒤로 바윗덩이 하나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서둘러 고개를 돌려 현지 쪽을 본다.
그 순간, 바윗덩이가 멈추고 현지 또한 멈춰 있다. 당황하여 고개를 돌려 겐세 일행 쪽을 본다. 그 일행도 멈춰 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다시 고개를 돌려 현지를 본다.
‘시간이 멈춘 건가?’
어쩌면 위기 상황에 의해 강신 세계를 일부적으로 불러들인 걸 수도 있다.
왜냐면, 지금 이 상태로 시간이 정상으로 돌아오면 현지가 바위에 깔려 죽으니까.
태석이 한숨을 뱉었다.
“좋아, 수술 시작이다.”
현지를 살리기 위한 수술이라고 해야 할까. 태석이 손을 뻗었다.
분노의 악마, 데리안을 강신할 준비를 한다.
데리안은 놀랍게도 현지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태석은 고개를 밑으로 내려 데리안을 보았다.
“왜, 웃기냐?”
데리안이 툭 내뱉듯이 말했다. 기분이 상당히 안 좋아 보인다. 태석이 데리안을 가두었기에 그런 것일까. 아마 태석이 당했다 해도 기분이 좋을 리는 없다.
“태석.”
“왜 그러지?”
“나를 강마하려 한 거냐? 나로 뭘 하려고.”
“애당초 이렇게 시간이 멈춘 이유를 알 수 없어. 그러니까 너를 이용해보려고 한 거야. 이참에 너의 힘을 알아야 하니까.”
“내 힘이라.”
“그래, 네 힘.”
데리안이 피식 웃었다.
“시간이 멈춘 건 내 힘이 아니야.”
“그러면 무슨 일이지? 대체…….”
“뭐든지 이상한 일이 일어나면 신의 탓으로 돌리지 마. 이번 힘은 순전히 너의 힘이니까.”
“내 힘이라고?”
“그래. 잘은 모르지만, 강신이라는 힘은 독특해.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고, 신의 힘을 빌려 더 강해지는 거지. 하지만 중요한 게 있어.”
“……뭐지?”
데리안이 흠흠 기침을 했다.
“천사가 되어봤으니 알 거야. 신이라는 존재는 그 천사보다 강하니 신이 된다면 어떤 기분일지도 대충 예상이 갈 테고."
“그래.”
태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말은 확실히 와 닿는다. 천사가 되었을 때의 감각은 아직도 선명하다. 모든 걸 조종할 수 있을 듯했고 모든 게 하찮아 보였다. 조금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된 거다.
“그런데 너는 그 대단한 신들의 힘을 빌릴 수 있을 정도야. 그 정도의 인물이 과연 신비한 힘을, 신의 힘을 빌린 것이 아닌 순전히 자신의 능력으로 활용 가능한 거지 않을까?”
“확실히 그렇군.”
태석은 동의했다.
신의 힘을 빌릴 정도의 인간이, 스스로만의 특이한 능력이 없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 시간을 멈춘 것도…… 어쩌면 태석의 능력 중 극히 일부가 발동한 것이 아닐까?
이렇게 고민만 할 때가 아니다.
태석이 그를 보며 말했다.
“어서 나에게 힘을 내놔.”
“후…….”
데리안이 잠시 고민하다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래, 좋아. 까짓거 해보지.”
그렇게 악마를 강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