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53. 완살?
태석은 더욱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눈이 부셨다. 강한 빛이다. 왜 이렇게 강한 빛이, 여기에 있는 걸까? 눈이 서서히 시력을 되찾고, 게슴츠레하게 주변을 보니 횃불이 가득했다.
횃불은 독특하게도 푸른 빛을 내뿜고 있었다.
“거참 신기하네.”
태석은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푸른 빛의 횃불이라, 세상이 변한 후로 이 정도의 일은 신기한 것이 아니다.
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요즘 세상에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지만요. 그래도 뭔가 뜬금없어서 신기하네요.”
푸른 횃불이라. 어쩌면 스카이의 취향일지도 모른다. 태석은 고개를 저었다. 스카이 생각은 이제 그만두자. 녀석은, 이제 거의 잡았다. 팔 한쪽을 없앴으니 이제는 머리를 없애면 된다. 녀석은 자신의 힘으로 잡을 수 있다.
태석은 그렇게 자신했다.
“태석 씨.”
현지가 어느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길 좀 보세요. 방의 중앙을.”
“뭔데요?”
태석이 고개를 돌려 방의 중앙을 보았고, 그곳에 있는 녀석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너는…… 누구지? 어째서 잡혀 있는 거야?”
태석이 보고 있는 곳에는 남자 한 명이 묶여 있었다. 평범한 서양인 계통의 남자…… 는 아니었다. 서양인이라기보다는 외계의 인간을 본다는 느낌이다. 엘프나 드워프, 뭐 그런 것.
하지만 엘프나 드워프와는 다르다. 태석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악마다.’
특유의 불길한 기운이 느껴진다. 스카이를 만났을 때만큼. 태석이 속성 단검에 손을 얹었다. 허리춤에서 단단한 손잡이의 손맛이 느껴진다. 언제든 뽑아 휘두를 수 있게끔 대기하고, 태석은 현지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잠깐 기다려요.’
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태석이 천천히 의자로 다가갔다.
“너는 누구지? 다시 묻는다.”
대답은 없다.
눈을 감고, 의식을 잃은 듯하다. 태석은 서둘러 녀석의 어깨에 속성 단검을 빠르게 찔러 넣었다.
상처가 나고, 검은 피가 흘러나온다. 그리고 다시 그 상처가 재생되고, 흉터조차 없이 원상 복귀된다.
하지만 통증은 있는 모양이다.
“끄, 끄으으윽.”
녀석이 눈을 떴다.
눈은 화가 잔뜩 난 표정이다. 태석은 그것을 보고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분노의 악마인가?”
분노의 악마, 데리안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붙잡힌 상태라 모양은 덜떨어지지만, 그래도 말한다.
“그래, 분노의 악마, 데리안이다.”
분노의 악마와의 첫 만남이었다.
분노의 악마.
데리안.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녀석의 악마의 사도, 악계자를 직접 처리한 적도 있다.
분노에 사로잡힌 불쌍한 악마라고 했던가. 이성적이지 못하고 충동적인 행동을 한다고 성천주 고란은 그렇게 평가했다.
하지만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다.
직접 보니 느낌은 사뭇 다르다. 분노에 사로잡혔지만, 그 분노를 어느 정도 자신의 뜻대로 통제할 수 있다는 느낌이다. 어쩌면 고란이 보고 난 이후 눈에 뜨이지 않는 동안 성장한 것인지도 모른다. 헌터처럼 악마 또한 스스로 강해지는 성장을 하기도 하니까.
태석이 의자에 묶여 있는 데리안을 보며 물었다.
“어째서 여기에 잡혀 있는 거지?”
“그런 건 상관없지 않나.”
데리안이 고갯짓했다.
“어서 죽여라.”
“죽이기 전에 묻는 거야. 누가 너를 잡았지? 스카이?”
태석이 속성 단검을 목에 들이밀었다.
“말 안 하면 제법 고통스러울 거야.”
“어차피 기운이 다 떨어진 상태다. 기적을 쓰기에도 힘든 상황이야. 나는 너에게 반항할 힘이 없고, 이미 삶을 포기했다.”
“어째서지?”
“그야…….”
데리안이 쓰게 웃었다.
“네 말대로, 스카이가 나를 붙잡아두고, 태석이 나를 죽일 거라 하더군.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면서 남에게 피해가 없고, 대의를 지킬 수 있다면 반드시 하는 녀석이니까, 그렇다더군.”
“그래, 맞아.”
“불행하군. 내 삶은 정말 불행해.”
“그런 거 같아.”
태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은 여기서 죽인다. 완살을 할 것이다.
“그런데 완살의 방법은 아나?”
“아니.”
“그러면 나를 죽일 수 없어. 다행히도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당장 알려줘라.”
“싫다. 내가 죽을 방법을 네 녀석에게 알려 줄 것 같아?”
분노의 악마, 데리안이 땅에 침을 뱉었다. 피가 섞여 나왔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러면 알아내는 수밖에 없겠군.”
“그러던가.”
태석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완살의 방법.
어쩌면 알지도 모른다.
스카이는 태석만이 완살이 가능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렇다면 태석에게 있어서 가능한 일들을 떠올리면 된다.
태석에게 가능한 일은 뭘까? 말할 필요도 없이, 강신이다.
지금까지 세 명의 신을 다룰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신들뿐이고, 악마나 천사는 없다. 그렇기에 자연히 신만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말이 안 된다.
‘내가 신만 다룰 수 있다고? 그보다 하위 녀석들은 다룰 수 없고? 말이 안 돼.’
태석은 싱긋 웃었다.
예를 들어, 다른 것도 강신할 수 있다면, 아니 가둘 수 있다면?
요컨대, 악마를.
태석의 표정을 보고 데리안이 말했다.
“알아냈나 보군.”
이제 죽을 때가 온 것일까. 데리안은 쓰게 웃었다. 좋은 삶이었다. 비록 해낸 것도, 이룬 것도 없이 허송세월을 보냈지만,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 편하다.
도피였다.
태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냈어. 하지만 그 방법은 살인이나 그런 것이 아니야.”
데리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리지?”
“애당초 살이라는 단어에 너무 묶였어. 스카이는 나에게 완살을 요구했지만, 나는 다른 것을 택하겠어.”
“무슨 소리냐? 무슨 헛소리를…….”
“나는.”
그의 표정이 해맑다. 데리안이 그 표정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저건 살인을 하겠다는 표정이 아니다. 마치 데리안 자신을 돕겠다는 식의 표정……. 도대체 무슨 표정이지? 완살의 방법을 알았다면서? 설마하니 죽이지 않을 생각인가? 그렇다면 악마를 어떻게 처리한다는 거지?
다시 생각하는 것이지만, 데리안은 만약 자신을 놓아준다면, 다시 난동을 부릴 것이다. 세상을 망가트리는 것이 악마의 욕구니까.
태석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너를 구하지 않아.”
그리고는 정답을 말했다.
“나는 너를 가둘 거다.”
가둔다.
다시 말해.
“너를 내 전력으로 쓸 거란 소리.”
데리안이 눈을 꿈벅였다.
무슨 소리지? 이해할 수 없다. 태석이라는 자는 미친 건가? 그래, 미친 거다. 미치지 않고서야 지금 상황에서 쓸데없는 헛소리만 늘어놓을 리 없다.
그렇기에 킥킥 웃음을 내며 뭐라 비꼬려 할 때였다.
태석이 데리안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자, 강신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한다.”
쿵.
그 순간이었다.
데리안은 세상이 뒤집히는 것을 느꼈다.
“커어어어억!”
데리안은 구토가 나올 정도로 어지러움을 느꼈다.
“이게 뭐야, 시발!”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손발이 묶인 것이 풀려 있다. 하지만 다른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주변에는 온통 평야가 펼쳐져 있다. 무너진 건물, 불타는 도시, 그런 느낌의 모습이다. 하늘을 보니 별이 미친 듯이 돌아가 새하얀 원형의 빛들을 수없이 만들고 있었다.
“여긴 대체…….”
데리안은 스스로가 미친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이상한 풍경을 볼 리가 없다. 환각이다. 태석이 자신에게 환각을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환각이자 환각이 아니야. 분명 어느 차원에는 실존하는 세상이라고 토르가 말해줬거든.”
태석의 모습이 보였다. 태석은 상처 하나 없었다. 크로스 백을 차고 있지 않고, 평상시의 캐쥬얼한 복장을 하지도 않았다. 맨손이었고, 하얀 도복 같은 것을 입고 있었다.
“그 복장은 뭐지?”
“아, 이거?”
태석이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다.
“아무래도 이곳에서는 내 생각대로 내 모습을 바꿀 수 있거든. 지석이 형처럼 입고 있었어. 재밌잖아?”
“그보다 여기는 어디냐? 대체…….”
“강신 세계.”
태석이 씨익 웃었다.
“앞으로 네가 있을 세계다.”
“지랄하지 마. 내가 왜 이런 미친 세상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거냐?!”
데리안이 손을 뻗어 기적을 사용한다. 검은 도검이 날부터 손잡이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허공에 있는 그것을 낚아채어 잡고, 데리안이 태석에게 소리쳤다.
“이 세상에서 너를 죽이겠다.”
“나를 죽일 생각인 거야? 어째서?”
“그야 나를 이상한 곳에 가두려 하니까.”
“너는 이 세상에서 악이 되는 존재. 그러니까 내가 가두겠다는 건데, 왜 반항인데?”
“너는 네가 아무리 사악한 존재라 해도 가두겠다는 것에 순순히 응하겠나?”
“하긴…… 그렇지. 나라도 반항할 거야. 하지만…….”
태석의 뒤로 세 명의 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토르, 헬라, 로키. 이 셋과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네가?”
“…….”
토르, 헬라, 로키.
이름만 들어본 신화 속의 신들이 태석의 뒤에 서 있는 장면.
데리안은 겁에 질렸다. 차라리 항복하고 갇히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선택을 바꾸어보자.
“이봐, 잘못했어. 내가 갇힐 테니까…….”
“아니, 싫다.”
토르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고, 로키가 말했다.
“뭐, 심심했는데 악마 놈 한번 때려잡는 것도 좋을지도.”
헬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킥킥 웃었다.
“아버지랑 삼촌이 그렇다면 저도 싸워보도록 하죠.”
“아니, 잠깐? 잠깐만? 잠깐만요……?!”
악마가 달려드는 세 명의 신을 보며 손을 휘저었다.
이후에 벌어진 일은 간단했다.
끔찍하면서도, 멀리서 보면 희극적인, 일방적인 폭행이 일어났을 뿐이다.
태석이 쓰게 웃으며 생각했다.
‘그러게 까불지 말지.’
긴장이 풀린 듯 느긋하게 하품을 하며 장면을 지켜보았다.
“으아아아아아아! 잠깐만요! 형님들! 누님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시발아아아아아아아!”
쿵! 쾅! 퍽! 퍼어어어억! 빠아아아아악!
끔찍한 비명과 타작 소리. 하지만 태석은 자신의 일이 아니니 무관심했다. 아니, 오히려 재밌다.
‘그러면 조금 기다리도록 할까.’
세 명의 신이 신이난 지금, 내버려두는 것도 보기에 재밌다.
물론 데리안은 불쌍하지만.
퉁퉁 불어 있다. 데리안은 얼굴이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쳤다. 강신 세계에서 세 명의 신에게 신나게 처맞은 대가이다. 물론 본인이 까분 것이 원인이었지만, 불쌍했다.
태석이 흠흠 기침을 했다.
“그러면 반항할 수 없는 건 알겠지?”
“……그래.”
“그래 좋아.”
“그러면 나는…… 이제 여기서 사는 건가?”
“그렇지.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가둘 생각이야. 헬라.”
헬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준비 완료야.”
“그래, 잘했어.”
데리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준비됐다는 거지? 설마하니 감옥을 말하는 걸까? 자신은 악마이니 믿을 수 없어서 가두는 것인지도 모른다.
“감옥인가?”
데리안이 물었다. 태석이 답했다.
“그래, 감옥.”
“나를 가둔다라……. 현명하군.”
“아무래도 악마니까. 믿기 힘들지. 그래도 힘이 필요하면 네 녀석을 사용해볼 생각이다.”
“그러던가. 물론 순순히 힘을 내주지는 않을 거야.”
“토르, 헬라, 로키?”
세 명의 신이 웃음을 지었다. 데리안이 폭력의 경험을 잊지 못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안쓰럽다.
“말, 듣겠습니다.”
그제야 세 명의 신의 표정이 풀어졌다. 데리안은 울고 싶었다.
‘내가 도대체 왜 이런 꼴이 되어 버린 거지…….’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대단한 악마였는데, 악계자를 잃은 이후로 점점 망가지기 시작했고, 지금은 거의 샌드백 신세였다. 게다가 강신 세계라는 이상한 세상에 갇히기까지 했다. 완전한 몰락이다.
태석이 쓰게 웃으며 데리안의 목덜미를 잡아 헬라가 만든 감옥에 밀어 넣었다. 평원 한복판에 세워진 감옥은, 헬라가 해골의 뼈들로 철창을 만들어 자그마한 감옥을 만들어놓은 뒤였다.
물론 강신 세계이니 음식도 필요 없고, 그 외 다른 욕구를 해결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갇혀 있는 것이 문제였다.
‘지겹겠군.’
데리안은 앞으로 태석의 강신 세계에 갇혀 있는 나날을 상상하고는 지겨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물론 정말로 지겨울지는 미지수지만.
좋은 의미가 아니라 부려 먹힐지도 모른다. 태석이 필요하다면서 힘을 빌릴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좋아, 이걸로 전력 상승이다.’
태석은 데리안을 이용할 생각으로 만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