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52. 더욱 안으로
“현지 씨.”
“네, 네?!”
현지가 바보 같은 목소리를 냈다. 창피하다. 어째서 이렇게 긴장한 것일까? 태석과 함께있는 것? 아니면 태석과 달라붙어 있는 것? 아니면…… 역시 현재의 조난당한 상황 때문일까?
태석이 말했다.
“이제 입구에서 안으로 진입했으니 마력의 실을.”
“네.”
현지가 손을 뻗어 지나간 길목에 마력의 실을 박아 넣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손가락에 칭칭 감아 고정했다. 태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면 이미 왔던 길이 어디인지 알 수 있는 거죠?”
“네, 아마 그럴 거예요.”
“기적에 의해서 마력의 실이 잘리거나 할 위험은?”
“절대 없을 거예요. 자신 있으니까요.”
“자신이라…….”
태석이 쓰게 웃었다. 현지가 인상을 찌푸렸다. 뭔데? 그 반응, 마치 현지를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였다. 태석에게 뭔가 따지는…… 것은 아니지만, 적당히 눈치를 주려고 했을 때였다.
“그러면 길을 지날 때마다 마력의 실을 지속적으로 쏘아 주세요. 지금.”
“네. 이번으로 두 번째 마력의 실.”
팡.
“그보다 제가 자신 있다고 하니까 표정이 왜 이렇게 안 좋은 거예요?”
“그게…… 어렸을 적의 저를 보는 것 같아서요.”
“욕이죠? 뭔가 비꼬는 것 같았는데…… 음.”
“그건 아니고.”
태석이 미소를 지었다.
“어렸을 때 전 억지로 자신 있다고 말했거든요. 사람들한테.”
“그런가요? 하긴 태석 씨라면 뭐든지 잘했을 것 같다는 인상이라……. 믿음직하네요.”
“아니요.”
태석이 고개를 저었다.
“저도 할 수 없는 게 많아요. 어렸을 때는 특히 더 그랬죠.”
“그런데 어째서 태석 씨는 어렸을 때 자신 있다는 말을 많이 한 거예요?”
“그야 그렇지 않으면…….”
태석이 살짝 표정이 어두워졌다.
“뭔가 자존심이 상했으니까요. 안 그래도 상황이 열악해서 모두가 동정의 시선을 보내는데, 저까지 자신이 없으면 무너져 내릴 것 같았어요.”
“…….”
현지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태석은 언제나 자신 있다고 했었다. 어렸을 때 그래야만 버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현지처럼 정말 자신이 넘쳤기에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감이라도 있어야, 그래야 그나마 인간 대접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태석이 말했다.
“이번에도 마력의 실.”
“아, 네.”
길모퉁이를 돌면서 마력의 실을 박았다. 이로써 마력의 실은 어느새 다섯 개가 박혀 있다. 현지가 앞으로 나서려 할 때였다.
“어라, 이미 마력의 실이 박혀 있는 곳이네요?”
“그러면 다른 길로 가죠.”
“그보다.”
현지가 어느새 돌아간 화제를 되돌렸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자신감보다는 어쩔 수 없이 아는 척한다는 느낌이 있는데 어떻게 된 거예요?”
“그야…….”
태석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으니까.”
“상황이 바뀌었다?”
“그야 현재는 소중한 인연들도 많이 생겼고, 저에게도 힘이 생겼고, 어렵던 상황이 반전되었어요. 그러다 보니 오히려 자신감이 떨어진 걸지도 모르죠.”
“하긴, 그렇겠네요.”
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현재의 태석은 오히려 중압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최고의 헌터인 S랭크에, 최초로 천사로 변신한 헌터. 과거에는 불행했지만, 현재는 지구상 최강의 사나이를 노리고 있는 남자.
그런 사람이 되어 버렸다면, 현지는 어땠을까?
“분명 내가 한 일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다시 할 수 있을지, 그 뛰어난 일들을 넘는 성장을 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을 거예요.”
“그렇죠. 그런 겁니다.”
“하지만 태석 씨.”
현지가 태석을 똑바로 보았다.
“태석 씨는 어느 순간 운이 좋아서 성공한 게 아니에요.”
“그렇다는 말은?”
“당연히 언제나 준비해왔기에, 그 준비된 일들이 차례로 마무리되면서 겉으로는 갑자기 성과가 일어난 것처럼 보이는 거죠.”
“그런…… 겁니까?”
“그래요.”
“잠깐.”
태석이 멈춰 섰다. 이야기를 하느라 제대로 못 보았는데 마력의 실이 박히지 않은 길목만 차례로 가면서 마력의 실을 박고 지나가는 것을 반복했었는데…… 현재 그들의 눈앞에 척 보아도 출구로 보이는 곳이 있었다.
“여태까지와 길 모양이 다르죠?”
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는 마구잡이로 깎아낸 동굴이라는 느낌인데, 지금 지하 통로처럼 벽돌로 깔끔하게 마감 처리가 되었네요.”
현지의 말대로다. 지금 그들이 앞으로 나아갈 길목은 기술력이 있는 인간이 직접 벽돌로 지은 마냥, 지하로가 이루어져 있었다.
똑, 똑, 똑.
무언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어떻게 할까요?”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가도록 하죠.”
태석이 발을 내디뎠다.
“조심하세요. 보니까 벽이 의외로 약해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군요.”
“네.”
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태석의 뒤를 밟았다.
“확실히 땅이고 벽이고 약하네요. 오래된 곳이라 그런 걸까요?”
태석은 아직 마르지 않은, 벽돌 사이를 채우는 시멘트 비슷한 것이 물컹한 것을 보고는 말했다.
“아뇨, 오히려 반대입니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마치 방금 전 지은 것처럼, 고체화가 덜 이루어져 있군요.”
“그렇다는 말은…….”
“우리를 이곳으로 끌고 온 자가 누구였죠?”
“그야 스카이…… 아.”
“그렇습니다.”
태석이 사뭇 진지한 눈으로 말했다.
“스카이가 만들어놓은 장소일지도 몰라요.”
태석이 철조망이 처져 있는 벽면을 향해 걸으면서 말했다.
“아직, 스카이는 우리를 놓아주지 않았어요.”
철조망이 처져 있는 벽면에 도착했다. 서슬 퍼런 철조망이 단단하게 벽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안쪽에 뭐가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태석이 한숨을 뱉었다. 이걸 부수어 봐야겠다. 뭔가, 뭔가가 있다는 느낌이다. 위험한 물건이지만, 태석이 직접 눈으로 보아야 할 무언가가.
[토르가 부술 것을 요청합니다.]
[로키가 토르의 머리를 툭툭 치며, ‘약한 벽이라 무너질지도 모른다고!’라며 경고합니다.]
[이번에는 아버지의 말이 맞아. 토르 말 듣지 마. 아빠 말 들어, 라고 헬라가 로키의 말에 동의합니다.]
[부수지 않는 편이 좋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부셔야 해.”
“네?”
현지가 자신에게 한 말인 줄 알고 되물었다. 태석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이거 거슬린다. 태석에게는 신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타인들에게 들리지 않으니 대답하기도 힘들다. 앞으로는 육성이 아닌 생각으로 대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태석이 철조망을 손으로 툭툭 쳤다. 현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기 안을 들어가 보고 싶은 건가? 하지만 벽면이 약해서 파괴력이 강한 태석의 힘으로는 부수었다간 큰일 난다. 현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수어 보게요?”
“아무래도 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안에 뭐가 있을까요.”
“저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봐야 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봐야 한다라……. 알았어요.”
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 힘이라면, 가능해요.”
“벽면이 무너지지 않게끔 조심해서 부수어야 합니다.”
“알아요. 현재 벽면은 너무 약해 보이거든요. 그럴 때는 다 저에게 방법이 있죠.”
무슨 방법일까. 태석은 한순간 깨달았다.
마력의 실이다. 마력의 실로 현지가 벽면을 얇게 파내어 뚫는다면, 그리 큰 충돌 없이 철조망만 떼어내는 것이 가능하다. 현지가 손을 얹고 미소를 지었다.
‘좋아, 할 수 있다.’
철조망 정도라면, 특별한 기적이 없는 한 현지의 마력의 실로도 부술 수 있다. 정확히는 커팅하는 것이지만.
현지가 손가락을 철조망에 얹었다.
찌지지지지지지직-.
마력의 실이 날카롭게 변질되어 철조망에 얇은 선 모양의 단면을 만들었다. 그 상태로 사람 두 명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철조망 단면으로 잘라내어 떼어냈다. 현지가 조심스레 그것을 잡아 천천히 눕힌 후에 뚫린 구멍 내부를 보며 손짓했다.
“들어갈까요?”
“당연히.”
“알았어요.”
현지가 침을 삼켰다.
“그런데 뭐라도 있으면 어떻게 하죠? 위험한 게 있다면, 예를 들어 괴수라던가, 아니면 오크라던가. 그러고 보니 오크들 도망치던데 어디로 간 걸까요?”
“위험한 게 있어도 제가 처리하면 되니까요.”
태석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걱정 안 해도 됩니다.”
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라면 다행이지만, 뭐 어떻게든 되겠죠.”
좋아, 걱정은 하지 말도록 하자. 태석을 믿고, 그의 의지대로 행동하자. 현지는 태석을 완전히 신뢰하도록 했다.
흔들다리 효과일지도 모른다. 둘 다 심각한 상황에 노출되다 보니 애정이 싹튼 결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건 이제 상관없다.
생각이 가는 대로, 옳다고 생각되면 행동한다. 그뿐이다.
태석과 현지가 철조망 구멍 안쪽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콜록! 콜록!”
기침이 나왔다. 태석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무슨 공기가 이렇게 탁하냐?!”
하지만 그래도 장독보다는 낫다. 장독은 아예 통증까지 느껴질 정도였지만, 이건 단순한 먼지였다. 호흡 곤란으로 재채기를 한 것 외에는 큰 이상은 없다. 현지도 마찬가지였다.
“뭐, 장독보다는 낫네요.”
“그렇긴 하지만 묘하게 기분 나쁘네요.”
“애당초 스카이 때문에 짜증 나는 건 사실이죠.”
“그렇긴 하지만…….”
태석이 고갯짓했다.
“저건 뭘까요?”
“저게…….”
현지가 고개를 돌려 의자 위에 놓인 상자 같은 것을 보았다. 그곳 위에는 편지 봉투가 있었다. 태석이 그곳으로 다가가 편지 봉투를 잡았다. 겉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사랑하는 태석 님에게.]
“스카이 이 년.”
태석이 인상을 찌푸렸다. 현지도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한숨을 뱉었다. 스카이가 도대체 언제까지 이곳에서 장난질을 할지 궁금하다. 팔도 잃어버렸을 텐데, 그런데도 장난이 하고 싶을까? 다음에 만난다면 태석의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고 현지는 확신했다. 아니, 죽이지 않더라도 자신이 죽여 볼 것이다. 악마 따위, 완살하는 법은 모르지만, 마음만은 벌써 수십 번 죽였다.
태석이 천천히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태석 님에게 선물이 있어. 상자야, 상자. 열쇠가 필요하지만, 그 열쇠는 어디 있는지 잘 몰라. 뭐, 언젠가는 알게 될지도 모르지만, 내 힘으로는 열 수 없지. 당신에게 동료가 되자는 선물 겸 나에게 그 내용물을 보여달라는 부탁이야. 어찌 됐건…… 음.”
“그 뒷내용이 뭔데요?”
현지가 재촉했다.
“스카이는 싫지만, 묘하게 궁금하네요.”
아무래도 여자의 편지라 더 그런 걸지도 모른다.
태석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 내용은, 말하기에 기분 나쁘다. 그러니 고개를 저었다.
“뒷내용은 별거 없어요.”
태석이 상자를 손으로 집어 들었다.
“이거, 들고 갈까요?”
제법 무게가 있었다. 내용물이 뭔지는 모르지만, 뭔가 중요해 보인다. 이걸 들고 가야 하나? 태석이 그 고민을 하며 물은 것이었고.
“당연히 들고 가야죠.”
현지는 고민 없이 들고가야 한다 했다. 태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크로스백에 쑤셔 넣었다.
“뭔지는 모르지만, 들고 가도록 하죠.”
그리고는 철조망으로 들어온 곳에 더욱 안쪽을 보았다.
“더 안으로 들어가 볼까요.”
“……네.”
여기까지 온 이상 끝을 볼 수밖에 없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태석과 현지는 사건의 핵심부에 접어든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 안으로.”
태석이 발걸음을 옮겼다.
현지가 서둘러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