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51. 기다림
분노의 악마, 데리안.
그는 의식을 잃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자신의 손발이 묶이고, 기적을 쓸 수 없도록 막힌 뒤였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일까? 데리안은 천천히 머릿속을 뒤적여 보았다. 서서히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스카이, 이 개년.’
스카이를 찾아갔을 때였다. 스카이는 이상한 말을 하며 데리안을 공격했고, 제법 강한 데다가 예상치 못한 공격에 데리안은 속수무책으로 당해 묶인 상황이었다.
데리안은 눈을 감고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빠져나갈 방법은 있나? 없다. 기적을 묶이고 손발을 묶인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보다 여기는 어디지? 무언가 동굴 내부 같다. 횃불이 불을 밝히고 있고, 동굴처럼 불규칙적인 구덩이가 방을 이루고 있다.
인위적으로 만든 동굴 같다. 왜냐면, 깎아낸 흔적이 상당히 인위적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동굴을 만드는 것은 이종족, 혹은 괴수일 것이다. 드워프의 솜씨일까? 아니다. 그 정도로 정교하지 않다. 요즘 들어 신사복을 입고 다니는 오크들의 짓일지도 모른다.
그보다 스카이는 어디에 있지? 이 개자식은, 데리안은 어떻게든 벌주고 싶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빠르게 맥동한다. 분노를 거세게 느끼고 있다는 의미였다. 데리안은 화가 나 무언가를 부수고 싶었지만, 손발이 묶인 지금은 불가능하다.
“으아, 으아아아아!”
그저 괴성을 지를 뿐.
“그렇게 화내지 마.”
스카이가 다가왔다. 한팔이 없다. 오른팔이 깔끔하게 도려져 있다. 자신이 기절하기 전에는 분명 있었는데, 최근에 당한 것인가?
“그 팔은 뭐지?”
“강신자에게 당했어.”
“강신자…… 태석을 말하는 모양이군.”
어느새 태석은 거의 모든 악마들에게 강신자라는 별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마치 원래의 이름이라는 듯, 세계가 정한 것이라는 듯, 아카식 레코드는 태석을 강신자라고 칭하고 있었다.
“웃기는군. 뭔가 대단한 계획이 있어서 나를 납치했나 했더니 강신자 따위에게 당하다니.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렇게 분노의 악마라는 것을 티 내다니. 너처럼 순수한 악마는 처음 봐.”
“악마가 순수하다라…….”
“뭐, 그건 됐고.”
스카이가 혀로 입술을 핥았다.
“뭔가 질문은?”
“너에게 묻고 싶은 거? 많다. 하지만 대답하지 않을 테니 묻지 않겠어. 내 무지만 드러날 뿐이니.”
“의외로 차분하네?”
“화를 삭이는 법은 나에게 있어서 어려운 일이지만, 이제는 어이가 없어서 화가 나지 않아.”
“그래도 우리 둘의 합작으로 아이언 월드 대회 때 성천주 한 명을 골로 보냈잖아?”
“그 녀석은 어차피 죽을 녀석이었고. 그보다 질문.”
“말해봐.”
“나를 왜 가둔 거지?”
“근본적인 질문이네.”
“대답 안 하면…….”
“뭘 어떻게 하려고? 묶인 상태로?”
“시발.”
“아무튼, 대답해줄게.”
의외였다. 스카이가 무슨 바람이 분 걸까? 데리안이 스카이를 노려보는데, 스카이가 입을 열었다.
“나는 태석이 악마의 완살을 배우는 것을 원해.”
“어째서? 어째서 그 녀석이 우리 동족을 죽이는 법을 알게 하려는 거지?”
“재밌을 것 같거든.”
“재밌을 것 같다?”
“처음에는 같은 편이 되어 내가 마왕이 되려고 했어. 그런데 녀석과 몇 번 부딪쳐 보니까 알겠어. 마왕이나 그 외의 지위는 이제 더 이상 관심 없다고.”
“뭐?”
무슨 소리지? 악마들은 모두 마왕을 꿈꾼다. 최고의 악마가 되어 강해지는 것을 꿈꾼다. 그것이 악마로서 최고의 행복이다.
그런데 그게 관심이 없다고? 드디어 미친 걸까? 팔이 없어서 그런 걸까? 미친 건가. 그런 거겠지?
스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친년 보는 눈. 정말 좋아.”
“미친년 맞으니까. 그렇게 볼 수밖에 없어 아쉽군.”
“뭐, 설명하자면.”
스카이가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어째서 기적을 쓸 수 있을까.”
“그야 악마들은 누구나…….”
“아니, 애당초 기적이란 게 뭐지?”
“뭐?”
“기적은 마법과도 달라. 우리 내부의 에너지를 쓰는 것도 아니야. 그래서 한계량이 없는 듯하면서도 순간 막혀. 마치 지구상의 온라인 게임의 캐시가 부족한 것처럼. 그런데 거기서 생각이 전환 되었어.”
“……?”
“캐시라는 것은, 게임 내의 캐릭터가 본다면 어떤 것처럼 보일까?”
“응?”
“잘 생각해봐. 게임 내의 캐릭터는 플레이어의 도움 없이는 캐시 아이템을 구매할 수 없어. 캐시 아이템으로 강해질 수 없다는 거야. 하지만 플레이어가 현실, 그러니까 게임 밖에서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캐시를 구매해서 아이템을 사지. 그런데 이걸 게임 캐릭터 입장에서 보면 어떨까?”
“그야…… 게임 내의 캐릭터 입장에서는, 마치 신이 자신에게 하사한 것처럼 보이겠…… 지.”
뭔가 생각이 날 듯하면서도 안 난다. 스카이가 말했다.
“그래, 나는 기적이라는 것이 캐시와 똑같다고 느꼈어. 그렇다면 이 세계의 플레이어는 누구일까? 우리는 아닐 거야. 우리는 게임 내의 캐릭터에 불과하니까.”
“미친 소리.”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게임이고 뭐고, 마치 그렇게 따지자면 이 세계를 관리하고 조종하는 관리자라도 있다는 뜻 아닌가. 그런 게 있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
“아무튼, 그런 요상 망측한 생각으로 나는 너를 감금했어. 이곳에 곧 있으면 나의 계획대로 태석이 방문하겠지.”
“나를 완살하게 할 생각인가?”
“그래.”
스카이가 미소를 지으며 서서히 모습을 감춘다. 분신을 녹여 없애는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분신을 갖고 있는 걸까. 데리안은 눈을 감았다.
“완살…… 이라.”
죽는 것은 그리 두렵지 않다. 하지만 이 분노를 풀지 못하고 죽는 것은 조금 아깝다.
하지만 별수 없지.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태석은 현지와 함께 동굴 내부로 발을 들이밀었다. 축축한 공기가 느껴진다. 아니, 축축하다기보다는 눅눅하다. 다 녹은 과자를 입에 씹어 넣은 채 걷는 느낌이 호흡에서 느껴진다. 폐에서 눅눅한 과자향이라도 날 것 같다.
현지가 말했다.
“기분 나쁜 공기네요.”
“여기 온 뒤로 좋은 공기 맡은 지 꽤 오래된 것 같은데.”
“그러게요.”
“그보다 여기는 뭔가 이상합니다.”
태석이 눈동자를 돌려 자신에게만 보이는 시스템창과 목소리에 집중했다.
[토르가 이곳은 뭔가 이상하다고 합니다.]
[곧 있으면 죽음을 맛볼지도 모른다고, 헬라가 기대합니다.]
[이곳에는 미로의 기적이 있다. 제대로 된 길을 택하지 않으면 영원히 반복되는 장소야. 위험하다고.]
[……라고, 로키가 조언합니다.]
[웬일로 로키가 착한 짓을 하는군]
[라고, 토르가 말합니다.]
[그러게요. 저희 아버지치고는 착한 말이었어요.]
[라고, 헬라가 같이 놀립니다.]
[…….]
로키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삐진 모양이다. 여자로 변신하는 취향이 있어서 그런지, 어쩐지 잘 삐진다는 느낌이다. 여자보다 여자다운 성격인 걸까. 그건 됐다.
일단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간단하다.
“현지 씨.”
“네.”
“일단 계속 걸어가도록 하죠. 하지만 하나 명심하셔야 합니다.”
“뭘요?”
“이곳에는 미로의 기적이라는 기묘한 기적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서로 흩어져서 영영 만나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거 큰일 아니에요? 이제 다 온 것 같은데, 다시 조난당하면, 게다가 혼자라니.”
끔찍하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현지는 끝장이다. 죽는 게 더 나을지도. 하지만 태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해요.”
“뭔지는 몰라도 이제는 믿음직스럽네요, 태석 씨.”
“언제는 안 그랬어요?”
“뭐, 제가 사람을 잘 믿기는 하지만 그 사람들은 모두 좋은 사람이었거든요! 제가 자신감 넘치게 그건 자언할 수 있어요.”
현지가 자신의 가슴을 텅텅 치면서 말한다.
뭐랄까, 사기당하기 좋을 것 같았다.
태석은 흠흠 기침을 했다.
“자신감을 넘어서서 자만 같기는 하지만…… 뭐, 그건 나중에 말하도록 하고.”
태석이 현지의 손을, 아니 허리를 꽉 잡아 붙들어 맸다.
“일단 이렇게 걷는 걸로.”
“……네?”
순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허리가 꽉 붙들어 태석과 1mm의 거리도 두지 않고 있는 상황. 현지는 태석의 땀 냄새와 묘한 체취를 맡을 수 있었다.
부끄럽다.
얼굴이 벌게지고, 심장이 쿵쿵 뛴다.
생각이 일순간 정지되는 기분. 이 시간이 영원히 지속되는 감각이다.
태석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미로의 기적 때문에 서로 흩어지지 않도록 이렇게 가도록 해요.”
“네?!”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태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보았고, 현지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절대로요.”
그리고는 현지가 슬그머니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걷기 시작했다.
묘하게 부끄럽다. 아니, 부끄러운 상황 맞다.
이래서야 마치 연인 같다.
자괴감이 들게도 현지는 시급한 현 상황 속에서 연애 감정을 느끼고 말았다…….
퉁.
동굴에서 일정 이상 안으로 들어가면 뭔가 튕기는 소리와 함께 대한을 비롯한 겐세와 시연 전원이 튕겨 날아갔다. 대한이 또다시 튕겨 날아가 바닥에 등을 처박고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대체, 대체 왜 못 들어가는 건데!”
화가 난다.
어째서 태석이 있는 데 자신은 들어가지도 못하고, 입구에서 뭔가 결계에 막혀야 하는가.
시연이 아예 마법을 쏘아댔다.
“으아, 으아아아아아!”
빛 마법이 정신없이 결계에 부딪친다. 결계에 무언가 흡수되듯 녹아서 사라진다는 느낌으로, 결계에 하얀 액체 같은 것을 늘어트리며 둥둥 파동을 일으킨다.
시연이 더 마법을 쏘려 할 때, 대한이 서둘러 시연을 밀치고 덮치듯이 넘어트렸다.
결계에, 시연이 마법을 쏘았던 그 장소에서, 그대로 빛 마법이 산발하여 터지듯 번진다. 시연이 아까 전 있었던 장소에 여태껏 시연이 쏘아온 빛 마법을 모두 합친 크기의 마법이 날아간다. 그것인 바윗덩이에 맞았고, 쿠구구구 하며 바윗덩이가 천천히 무너져 가루가 된다.
대한이 소리쳤다.
“일단 진정을.”
“하지만…… 하지만 저기에 태석 씨가…….”
겐세가 한숨을 뱉었다. 그렇게 진정하라고 말하는 대한도 동공이 떨리고 손이 떨리고 있다. 사고라도 칠 것 같았다.
겐세는 손을 뻗어 기적을 사용한다. 대한과 시연의 정신 상태를 안정시키는 기적이다. 마인드 컨트롤계의 기적이다. 물론 이 기적은 겐세의 주로 쓰는 기적인 중력 마법과는 상반되었기에, 사용을 꺼리고 잘 쓰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급박했기에 시연과 대한을 진정시키고자 쓴 것이었고, 다행히 통했다.
대한이 차분해진 눈으로 겐세에게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하죠?”
“우리는 충분히 이것저것 시도해봤어. 그리고 난관에 부딪혔다.”
“그러니까 이 결계를 부수면.”
“괜시리 부수었다가 태석에게 안 좋은 상태가 벌어지면?”
“…….”
겐세가 둘을 보며 말했다.
“이 동굴 내부에 있는데 동굴이 무너져 죽는다면?”
“그런…….”
“그러니까 알겠느냐?”
겐세가 파르르 떨리는 손을 움켜쥐었다. 그 손을 보고 대한과 시연이 입을 다문다.
“나도, 현지가 저 안에 있다. 죽었을지도 몰라. 태석은 S지만 현지는 F니까. 땅에 떨어지는 순간 어딘가 부러지거나 사망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두렵다. 현지를 제외하고 태석만이 나올까 봐.”
“…….”
“그러니까 나는 오히려 기다릴 거다. 다 된 밥을 마지막에 무너트리는 것은 멍청이나 하는 짓이니까.”
겐세가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무슨 소리는 하는 건가. 이번 작전이 어설펐던, 작전 설계자였던 자신의 탓인데, 누구의 탓을 하는 것인가. 마치 태석이 구하지 못하면 태석 탓을 하겠다고 들리지 않는가.
이래서야 성천주가 아니다. 세상을 정화하겠다는 천사의 사도가 아니다.
겐세가 미소를 지으며, 변명하듯 덧붙였다.
“그러니까 기다리자꾸나.”
대한과 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할 일은 대기.
하지만 지독하게도 불안한 기다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