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49. 거대 거미
색욕의 악마의 분신이 있었다. 본신과 모든 감각을 공유하지만, 거짓된 존재가 바로 분신이다. 색욕의 악마, 스카이는 한숨을 푹 내뱉으며 분신으로서 아직 낭떠러지 밑, 그러니까 태석과 현지가 갇혀 있는 그 장소에 있었다.
그녀는 낭떠러지 밑을 던전이라 불렀고, 던전에는 거대한 거미 괴수 한 마리가 있었다.
거대 거미에게 스카이가 천천히 인간 형체의 무언가를 들고 다가온다.
키기기기긱-.
거대 거미가 기괴한 긁는 소리를 냈다.
“이봐, 거대 거미.”
키기기기긱-?
“거대 거미인 너에게 시킬 일이 있어.”
키기기기기긱-!
“너에게 먹을 것을 줬으니까. 오크 시체라 맛은 없을 테지만, 적어도 먹을 만은 했을 거야.”
스카이는 거대 거미에게 먹을 것을 줬다.
맛있지는 않았을 거다. 오크 시체니까.
던전에서 태석으로부터 도망치던 오크들은 다른 장소에 있던 스카이의 분신에게 당했다. 그리고 시체를 하나둘 끌고 거대 거미에게 먹을 것으로 준 것이다.
거대 거미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뿐일까?
뭐가 좋다고 스카이는 거대 거미에게 먹을 것을 준 것일까? 자신에게 도움될 것 하나 없는데?
거대 거미는 물론 의구심은 없었다. 지능이 낮은, 힘만 무식하게 센 인간 다섯 명 정도의 키의 괴수니까.
스카이가 히죽 웃었다.
“너는 정말로 멍청하구나. 한 대 치고 싶을 정도로.”
그리고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었다.
“나는 섹시한 남자가 아니면 관심 없어. 그 외로는 나에게 도움이 된다 싶으면 좋아하려고 노력은 해줄 거야. 이제부터 너는 나에게 도움이 될 예정이라 노력하고 있고.”
스카이의 손에서 마력의 실이 뻗어 나왔다. 그리고 마력의 실에 방대한 정보를 담은 채 거대 거미의 신경계를 교란시켜 한 가지 목표를 심어 주었다.
“자, 너는 이제부터 태석과 현지를 죽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게 내가 바라는 거야.”
그리고 분신이 녹았다. 스카이의 분신이 액체처럼 녹고, 검은 기체를 흩뿌리며 사라졌다.
이것이 스카이의 악행이다. 스카이는 이제 태석을 죽이고자 하는 것일까?
아니, 스카이는 태석을 시험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아직도 스카이는 태석에게 붙고 싶어 했다.
키리리리리리릭!
거대 거미가 울부짖었다.
태석과 현지는 계속해서 길을 걷고 있었다. 태석은 슬슬 다리가 아팠다. 언제까지 걸어야 하는 걸까? 아무리 걸어도 길의 끝은 보이지 않고 묘하게 반복되는 길을 걷는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태석은 계속해서 길이 묘하게 변하는 점이 있다고 느꼈다. 그러니 제대로는 가고 있는 것이지만…… 길의 끝이 어디에 있는지 태석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입이 시리다. 입이 살짝 마비되어 혀가 움직이기 힘들다는 느낌이다. 이런 느낌, 별로 좋지 않았다.
‘언제쯤 도착할 수 있는 걸까.’
태석은 한숨을 뱉었다.
현지 또한 피곤에 절어 있었다.
태석보다 더욱 피곤했다. 마력의 실로 다른 이의 머릿속에 들어가는 감각은 별로 좋지 않았다. 아직도 태석과 의식이 섞여 있다는 느낌. 현실 감각이 많이 떨어진다는 느낌이다.
“언제쯤 도착할까요.”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뭔가, 이야기라도 하면서 걸으면 안 될까요.”
현지가 뭔가 이야깃거리를 요구했다.
태석은 잠시 입을 다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한이랑 있었던 일을 얘기할까요.”
“네, 좋아요.”
둘 다 유명인이다. 유명인들끼리의 우정이라. 아주 좋다. 특히 현지는 태석과 대한이 어릴 적부터 친구였으며, 아이언 월드 대회 때 결승에 동시에 올라온 것을 알았기에 더욱 상상할 거리가 많았다. 일부에서는 벌써 그 둘의 팬픽이 써지고 있었다. 그 팬픽을 떠올리면, 대한과 태석을 보는 것이 송구스럽고, 또 상상력을 자극했다.
하악, 하악.
순간 이상한 호흡을 할 뻔했지만, 간신히 참고 입가의 침을 닦았다.
“빨리 얘기해주세요.”
“?”
뭐지. 뭔가 위험한 부분을 건드렸다는 기분이다. 하지만 태석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일단 처음부터 이야기하자면, 대한이랑 어렸을 때, 학창시절 때.”
“네, 네.”
“학교에서 제가 괴롭힘당할 때의 이야기예요.”
“괴롭힘?”
“그래요, 괴롭힘. 저는 부모님이 없었기에 괴롭히기 좋아하는 애들에게 아주 좋은 타깃이었죠.”
“정말 나쁜 녀석들이네요.”
“수련회에 갔을 때, 저는 일진이라고 자칭하는 녀석에게 밤새 얻어맞았어요.”
“…….”
끔찍한 이야기였다. 학창 시절의 일진이라면, 덩치가 크거나 크지 않더라도 힘은 셌을 것이다. 그런 녀석이 태석을 때리다니.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때 대한이는 옆 방에 있었는데, 이 사실을 모르다가 잠에서 깨자마자 그 소식을 듣고는 뛰어와서 일진 녀석이랑 신명 나게 싸웠죠.”
“대한 씨가 어렸을 때 싸움을 잘했나 봐요?”
“아니요, 못했죠.”
“그런데 때렸다면서요?”
“사실…… 처음 한 대 때리고는 대한이가 두들겨 맞고 있었어요.”
“아…….”
대한도 그렇게 싸움을 잘하지는 못했구나. 현지는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었다.
“그래서 저도 같이 가세해서 대한이랑 저랑 편 먹고 그 일진 녀석을 일방적으로 후려쳤죠.”
“하긴, 이대 일이라면, 아무리 싸움을 잘해도 학생에게는 무리수죠.”
“그 결과, 일진 녀석은 뼈라도 부러진 건지 병원에 갔고, 저희는 선생님에게 엄청 혼났죠. 불쌍한 애 괴롭히는 거 아니라고.”
“……음, 뭔가 상황이 역전된 듯한데요.”
“그 뒤로 딱히 저희를 괴롭히는 녀석들은 없었어요. 평범하게 학교생활을 보낼 수 있었죠.”
“정말이지…… 어렸을 때부터 독특하셨네요, 둘 다.”
“뭐, 그렇죠.”
키리리릭-.
그때였다.
무슨 소리가 들렸다.
태석이 단검을 역수로 잡아 경계 태세를 했다. 현지가 마력의 실을 뿜을 준비를 했다.
키리리리릭-!
뭔가 오고 있다.
태석이 긴장했다.
그리고 녀석이 등장했다.
녀석의 모습은 거대한 거미를 연상케 했다. 다른 게 아니라, 거미처럼 생겼고, 인간 다섯 명 정도의 크기의 괴수였기 때문이다. 아마 이 지역에서 흑수정에 의해 탄생한 괴수일 것이다. 태석은 인상을 찌푸리며 단검을 꺼내 든 채 거대한 거미를 보았다. 거대 거미가 징그러운 다리를 바스락거리며 움직였다.
태석이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현지 씨.”
“네!”
현지가 마력의 실을 터트려 거대 거미의 몸을 묶었다. 다리 두 개 정도가 묶였다. 이것으로 움직임이 아주 살짝 억제되었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않는다.
태석이 서둘러 토르를 강신했다.
[토르와의 동기화율 상승.]
[묠니르 소환 대기 시간이 줄어듭니다.]
꽈르르르릉-!
천둥이 순식간에 울려 퍼지고, 토르의 묠니르가 태석의 손에서 등장했다. 한 손에는 단검을 역수로 든 채 묠니르를 집어 던졌다. 거대 거미에게 날아간다. 그리고 그것을 뒤따라 태석이 달렸다.
타다다다다다-!
좋아, 공격을 먹이자.
태석의 묠니르가 거대 거미의 몸에 부딪혔다.
콰륵!
거대 거미의 몸에서 녹색의 징그러운 피가 새어나왔다. 머리가 찌그러졌다. 태석이 사납게 웃으며 다음 공격을 가한다. 단검으로 가볍게 거대 거미의 몸을 휘저은 것이다. 등 부분이 깔끔하게 칼날이 새겨졌다.
키리리리리리리릭-!
태석은 서둘러 현지에게 소리쳤다.
“지금입니다!”
“네!”
현지가 태석의 말을 듣자마자 마력의 실의 성질을 바꾸었다.
마치 도화선이라도 된 마냥, 불길이 번졌다. 거대 거미의 몸에서 화려한 불길이 새겨졌다.
키릭! 키리리릭! 키리리리릭!
거대 거미가 비명을 지르며 뒤뚱거렸다. 그리고는 태석을 노려보았다.
키리리리리리리리리리리릭-!
마치 용서 못 한다는 표정이다. 태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공격해봐라.”
키릭! 키리리릭! 키리릭!
거대 거미의 몸에서 샘솟던 불길이 사그라들고, 거대 거미가 서서히 다리가 접히고 죽음을 맞이하려고 한다. 곤충을 불로 지졌을 때의 행동과 같다.
태석이 살짝 긴장이 풀렸을 때였다.
키릭!
거대 거미가 다시 울부짖었다. 이번 공격으로는 죽지 않은 모양이다.
거대 거미의 몸에서 서서히 하얀 갑주가 뒤덮이기 시작한다. 하얀 액체가 거대 거미의 겉 몸에서 흘러나와 그것이 굳어 마치 단단한 갑옷을 만든 것이다.
“끝이 아니었어요! 어서 여기로 오세요!”
태석이 현지의 말에 따라 뒤로 살짝 물러났다. 거대 거미의 앞다리가 태석이 있던 장소를 찍었다.
쾅!
대지가 울릴 정도의 굉음과 함께 태석이 있던 자리에 놀라울 정도로 큰 크레이터가 새겨졌다.
거대 거미의 얇은 다리에서 일어난 현상이라고는 믿기 힘들다.
태석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 이리 힘이 세?”
현지가 동의했다.
“그러니까요. 여기 괴수들은 다른 괴수들보다 좀 더 끈질긴 것 같아요.”
“일단.”
“알아요.”
“그래요.”
태석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느새 현지와 말을 하지 않아도 생각이 통한다는 느낌이다. 현지가 자신의 머릿속을 탐방한 이후로 더욱.
“계속 싸워야겠죠?”
태석이 확인차 그렇게 말하고는 이번에는 로키의 힘을 받아들였다.
변신한 모습은 현지. 하지만 S랭크 버전 현지였다. 물론 여자의 모습이 아닌 남자의 모습이었다.
아하.
여자로 변신하면 남자 버전이 되고, 남자로 변신하면 여자 버전이 되는구나.
태석이 쓰게 웃었다. 현지가 묘한 표정으로 태석을 보았다.
“알아요. 이상하죠? 저도 이상하게 느껴져요.”
“그거 저 따라 한 거예요?”
“네.”
“그보다 사타구니가…….”
태석은 사타구니를 내려다보았다. 현지 특유의 좍 달라붙는 옷까지 따라 했기에 남자 버전인 그로서는 아주 부끄러운 장면이 연상될 수밖에 없다.
태석이 엉거주춤한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다음에 변신할 때는 주의하겠습니다.”
“뭐, 주의할 필요는…… 없지만.”
현지가 흠흠 기침을 하며 그리 말했고, 태석이 소리쳤다.
“그럼 시작!”
거대 거미를 무찌를 준비는 끝났다.
이제 행동만 하면 된다.
대한과 시연, 겐세는 현재 머리를 맞대고 생각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이 아이템으로 정말 추적이 가능한 건가?”
겐세가 말했다. 대한이 대답했다.
“길드장님에게 물어본 바로는 맞대요. 이걸로 추적이 가능하다던데.”
“어떻게 쓰는 건데요?”
시연이 물었고, 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이 버튼을 누르면…….”
띡.
버튼을 누르자 기계 장치에 불빛이 들어오고,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에덴에 접속합니다.]
“에덴……?”
“에덴의 힘 일부를 빌리는 거라서요. 시연 씨, 설마 에덴이 뭔지 모르는 거 아니겠죠?”
“지구상에서 인공지능 개발을 통해 만든 거잖아요. 제법 대단한 일들이 가능하다고 알고 있어요.”
“그 에덴을 통해 태석의 정보를 입력하고 이 근처에서 태석과 비슷한 걸 찾아낼 거예요. 모두 에덴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죠.”
“그러면 어서 찾아내라.”
겐세가 말했고, 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입을 다물고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서 하지 않고 뭐하는 거지?”
“그게…….”
대한이 볼을 긁적이면서 말했다.
“태석과 관련된 물건이 있어야 해요. 예를 들어서 머리카락이라던가, 침이 묻은 물건이라던가 하는 거요.”
“이런.”
겐세가 입을 다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팀원의 머리카락을 수집해둘걸. 이거 낭패다. 태석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시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있어요.”
“뭐라고?”
“아아, 그러고 보니…….”
대한이 미소를 지었다.
“어서 태석 콜렉션을 여기에 입력시키자고요.”
“네!”
시연이 배낭에서 무수히 많은 물건을 꺼냈다. 겐세와 대한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뭐…… 도움이 되는 일이니 뭐라고는 할 수 없다.
어쨌든, 대한 일행은 태석 콜렉션을 통해 태석의 위치를 알아내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