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46. 헬라, 강신
선공은 스카이였다. 스카이는 손을 활짝 펼쳤다. 나비 같다. 그녀가 악마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웃으며 그 장면을 지켜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태석은 그녀가 악마라는 사실을 안다. 그렇기에 그 나비 같은 손짓이 벌침과도 같은 공격을 퍼부을 것이라는 것도 당연하지만 알고 있다.
순순히 당할 수는 없다. 태석이 손을 뻗어 로키의 힘을 받아들였다. 순간 변신했다. 겐세 노르도의 여성 버전이라고 보면 좋을까. 금발의 여성의 모습으로, 겐세 특유의 짙고 긴 눈매를 한 여자의 모습이 되어 화려한 금색의 빛들을 만들어냈다. 태석의 등 뒤로 수없이 많은 금색의 창들이 나타났다.
기적이다.
성천주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기적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로키의 힘을 강신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반면 스카이의 등 뒤로는 수없이 많은 남색의 창들이 돋아났다. 그리고 그 창들이 모조리 쏟아져 태석을 노린다. 동시에 태석이 손을 휘두르자 금색의 창들이 남색의 창을 깨부수었다. 그중 하나가 남색의 창의 세례를 빠져나와 스카이를 노리고 돌진한다. 스카이가 히죽 웃었다. 겨우 이 정도야? 겨우? 이 정도라면 스카이 한 명으로도 막을 수 있다. 손을 뻗어 금색의 창을 잡기 위해 시선을 집중한다.
하지만 그때였다.
금색의 창이 스카이의 손이 닿기도 전에 부식되어 사라진다. 금색의 가루가 되고, 기체가 되어 소멸한다.
“?!”
스카이가 당황하여 멈칫했을 때였다.
로키의 변신을 해제한 태석이 스카이의 근처까지 다가온 뒤였다. 토르를 강신한 듯, 푸른 안광을 번갯불 마냥 휘날리며 다른 한 손으로는 속성 단검을 들고 있다. 스카이가 속성 단검을 후려쳤다. 속성 단검의 날이 부수어진다. 태석은 인상을 찌푸렸다.
‘속성 단검은 내버려두면 재생한다. 내구성이 낮지만, 부수어져도 나중에 사용이 가능해서 좋은 무기야. 하지만 날이 날아간 이상 나는 녀석에게 무기를 휘두를 수 없는 상황이라고 보면 될까.’
하지만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태석은 의외의 한 수를 두기로 했다. 날아가는 날을 입으로 물었다. 마치 자신이 속성 단검의 손잡이라도 된 마냥, 돌진하여 스카이의 팔 한쪽을 속성 단검으로 잘라낸다. 그리고 날을 입에서 뱉고, 팔 할 쪽을 공격하면서 벌은 시간으로 마침내 토르의 묠니르를 소환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묠니르의 망치 부분을 날려 스카이의 머리를 후려쳤다.
“크으으으으으윽!”
아프다.
미치도록 아팠다.
스카이는 머리가 울리고 기절할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정신을 유지했다. 뛰어난 정신력이다. 악마이기에 가능하다.
태석이 미소를 지었다.
“제법이네.”
“인간치고는 그쪽도 제법이야.”
스카이가 헝클어진 붉은 머리칼을 더욱 헝클었다. 그리고 사납게 웃었다. 어찌나 사나운 미소였는지 태석이 다 긴장할 정도의 표정이다. 하지만 태석은 무섭지 않았다. 이대로만 계속 싸운다면, 자신의 승리였다.
태석은 그렇게 확신하고 스카이에게 말했다.
“포기해. 이대로 가면 너는 죽는다.”
[네가 죽어. 네가 죽을 정도의 위험에 처한다면, 내가 튀어나올 수 있어. 나를 강신하는 방법은 그것뿐이야.]
[헬라가 조언합니다.]
[헬라는 태석의 죽음으로 강신이 가능한 신입니다. 태석 님에게 죽음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뭐?”
태석이 시스템 메시지에 순간 놀랐다.
태석이…… 이제 죽지 않는 존재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순간 알 수가 없어서 당황한 사이였다.
“으아,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스카이가 괴성을 질렀다. 엄청난 열기가 주변으로 퍼진다. 장독의 노란 기체가 모조리 사라지고, 태석이 제대로 서 있기 힘들 정도로 비틀거렸다. 그리고 현지의 몸이 정신없이 날아가 오히려 스카이의 근처까지 굴러갔다. 태석이 소리쳤다.
“뭘 하는 거야!”
“각성이다.”
스카이가 히죽 웃었다. 눈매가 노랗다. 고양이처럼 동공이 죽 째져 있다. 그리고 흰자위는 검게 변질되어 있었다. 악마 같다. 징그럽게 생겼다. 죽이고 싶다. 본능적인 혐오감이 치밀어 오른다.
스카이가 손을 뻗었다. 손톱이 검날처럼 길게 뻗어 가 한손검 정도의 길이로 길어졌다. 그리고 그 다섯 개의 손톱을 웅크려 모은 뒤에 돌진한다. 아니, 정확히는 돌진하려 했다.
푹.
검날 하나가 스카이의 복부를 뚫고 들어갔다.
“이, 게, 무, 슨……?!”
태석이 벌인 짓인가? 충분히 가능하다. 태석이 전기를 이용하는 토르의 힘으로 미리 떨어진 검날을 조종하여 스카이를 찌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태석은 그런 낌새가 보이지 않는다. 지쳐서 제대로 움직일 수 없기에 최대한 강신으로 일어나는 마력 소모를 줄이고 있는 상황이다. 태석 특유의 전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면 누구 짓이지? 마력을 감지하니 처음 느끼는 마력이다. 아니, 정확히는 처음은 아니다. 여태까지 미약했던 마력의 흐름이 강해졌다는 느낌이다. 그래, 마치 기절하거나 반죽음 상태였던 마력이…… 아.
알겠다.
견현지다. 현지가 스카이의 근처까지 몸을 굴려 날아간 척하고 어느새 빈틈을 노리고 일어나 기습을 가한 것이다.
태석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덤벼들었다. 현지가 스카이의 복부를 더욱더 깊게 검으로 찔러 누르면서 소리쳤다.
“가세요!”
“알겠습니다!”
태석이 돌진했다. 현지가 만들어낸 빈틈으로 스카이를 공격하기 위해, 스카이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스카이는 색욕의 악마였다. 그러면서 수많은 악마 추종자들을 이끄는 최악의 존재였다. 무슨 나쁜 짓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악마는 절대악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니 죽이는 데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다. 그렇기에 태석은 토르의 묠니르로 악마를 완살하기 위해 몸을 움직인다.
하지만 스카이가 더 빨랐다.
스카이가 남색의 창을 만들었다. 그리고 태석의 얼굴에 남색의 창을 날렸다. 태석이 미처 피하지 못했다. 아니, 방심했다는 편이 옳다. 어째서일까. 태석은 그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첫 번째 죽음을 맞이했다.
태석은 순간 누워 있었다. 별이 보였다. 밤하늘인가? 자신은 여태 잠들어 있던 걸까. 깊은 꿈을 꾼 느낌이다. 아니, 현실이라기에는 평범한 밤하늘은 아니었다. 별이 정신없이 동그랗게 돌아가고 있다. 북극에서 별자리를 감상하는 것처럼, 그리고 수없는 시간 동안 촬영하고 그것을 빠르게 감아 보고 있는 것처럼, 수많은 별들이 하나의 별을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 그 중심의 별이 마치 자신과 닮았다고, 태석은 바보 같지만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볼을 발로 툭툭 건드리는 여자가 있었다. 태석은 눈을 돌려 그 다리를 본다.
다리 사이에 무언가를 보고 태석이 문득 중얼거렸다.
“의외로 귀엽네.”
“이 변태 새끼가!”
퍽!
태석의 복부를 발로 짓눌렀다. 도대체 어떤 여자이길래 태석에게 이렇게 막 대하는 것인지 태석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몸을 일으켜 여자 쪽을, 정확히 얼굴을 본다.
붉은 머리, 아니 새하얀 머리였다. 새하얗게 바란 머리로, 시체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또한 아름다운 이십 대 여성처럼 보이는 그런 여자였던 것이다. 그 여자는 귀여운 얼굴로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드디어 내가 나설 차례네.”
“나는 죽은 건가? 너는 헬라인 거야?”
“내가 있기에 너는 더 이상 죽지 않아. 삼촌이 간신히 너에게 나를 주었기에.”
“헬라구나.”
“헬라 맞아. 아무튼…… 나는 죽음의 신으로서, 로키의 딸이면서, 네가 죽었을 때 강신할 수 있는 유일한 신. 그렇기에 죽음에 가까운 상태인 너의 몸에 강신할 생각이다.”
“그래, 어서 강신해. 스카이를 무찔러야 해.”
“알아. 하지만.”
“하지만……?”
“아니,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강신을 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말했을 뿐이야.”
“뭔데? 어서 해.”
“미친놈아, 그걸 왜 어서 하라고 재촉하는 거야. 안 그래도 부끄러워 죽겠는데. 나만 왜 이런 짓을 해야 강신이 가능한 건지…… 이게 다 너와 내가 동기화율이 적기 때문이야.”
“동기화율? 그것에 따라 강신 방법이 달라지는 거야.”
“그래.”
헬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시작했다.
“동기화율은 신과 강신자의 상태가 비슷한 정도를 뜻해. 토르를 강신할 때도 너는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마치 신과 같은 마음으로 싸움을 했기에 가능한 일이고, 로키를 강신할 때도 자신이 아닌 남이 되어 싸우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기에 가능한 거였고, 나를 강신할 수 있게 된 이유는…… 죽음을 무릅쓰고 다른 자를 구하기 위해 나섰기 때문이야.”
“그러면 어찌 됐건 죽음과 관계되었기에 나와 너는 동기화율이 높은 거 아니야?”
“아니.”
“……?”
“같지 않아.”
“같지 않다고?”
“너의 죽음을 대하는 자세와 나의 죽음을 대하는 자세는 결코 같지 않아. 그래서 몸의 접촉이 필요해. 강신하려면.”
“그게 뭔데? 손이라도 잡는 거야?”
“키스.”
“……?”
“키스라고, 이 멍청아!”
헬라가 에라 모르겠다며 태석의 턱을 잡고 끌었다. 그리고 태석의 입술이 거하게 입을 맞추었고, 순간 공간이 하얗게 바랐다. 강신 세계가 요동치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태석은 뭐라 감촉을 느낄 새도 없이 헬라를 강신하고 말았다.
태석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번엔 여자가 되었나 싶어 밑을 보니, 다행히 가슴이 자라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리 사이의 그것도 건재하다. 그렇다면 헬라를 강신한다 해서 여자가 되는 일은 없는 것이다. 정말 다행이다. 그보다 로키의 딸이 헬라라니. 그것은 미처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북유럽 신화를 좀 더 공부해둘걸. 태석은 쓰게 웃었다.
눈앞의 스카이가 겁에 질린 표정을 짓는다. 태석이 죽지 않고 부활한데다가 부수어진 얼굴의 반이 다시 재생되어 멀쩡해졌으니 그럴 법하다.
태석은 히죽 웃었다. 묘하게 살인 욕구가 치밀어 올랐다. 어쩌면 죽음의 신인 헬라를 강신했기에 일어나는 현상일지도 모른다. 태석은 손을 뻗었다. 손톱이 묘하게 검었다. 검은 연기를 흩날렸다.
그러고 보니 헬라에 대한 정보들이 마구잡이로 떠올랐다. 뻗지 않은 손으로 얼굴의 반신을 만져 보았다. 검은 가면이 정확히 얼굴의 반을 가로막고 있었다. 헬라는 반신이 해골이고, 반신은 원래의 미녀의 얼굴을 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직접 만난 헬라는 평범한 소녀 같은 모습이었는데…… 어쩌면 백발이라는 점에서 반은 노인이라는 설화가 맞을 수도 있다.
손톱이 검은 이유는, 손톱으로 만든 배로 라그나로크 때 오딘을 배신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것이 가능할까? 태석이 사납게 웃었다.
손을 뻗고, 손톱에서 거대한 배가 소환되었다. 그리고 사람 하나의 크기의 배 수십 척이 스카이를 노리고 돌진할 기세로 있었다.
태석이 겁에 질린 스카이를 보며 말했다.
“스카이, 이제 죽음의 시간이야.”
스카이는 그 말에 더욱 겁에 질렸고, 뒤에 서 있던 현지가 어색하게 웃었다.
‘중2병.’
하지만 그런 중2병이, 지금은 너무나도 도움이 된다.
태석이 죽음의 신 헬라(Hella)를 받아들이고 스카이와의 싸움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