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45. 조우
오크 리더가 뒷걸음질치다가 넘어지고는 다시 일어나 뒤로 돌아 도망가려 했다. 뭐야, 별거 아니었잖아? 뭐 이리 약해? 태석이 서둘러 쫓아가려 했다. 하지만 오크 리더의 진로를 방해한 것은 태석도 현지도 아닌, 어떤 여자였다.
새하얀 머릿결이다. 예전에 보았던 머릿결과는 조금 다른 색상이다. 그리고 옷차림은 가벼운 나시티에 짧은 바지. 보통의 남자가 길거리에서 보았을 때 눈이 돌아갈 만한 복장에 몸매였다.
눈가를 굉장히 날카로워, 고양이라고 쳐도 날카로운 수준이었고, 입가는 두껍고 예쁘장하게 오돌토돌하다. 태석이 소리쳤다.
“색욕의 악마?”
“스카이 할 블랜드야. 그보다…….”
오크 리더는 그 여자를 보자마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수그렸다.
“죄, 죄송합니다!”
“뭘 잘못했다는 거야?”
“색욕의 악마님……. 이런 약한 인간들에게 패배한 것이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그래? 아닌데.”
“네?”
용서해주려는 건가? 오크 리더가 눈가를 똘망똘망하게 하여 쳐다본다.
스카이가 피식 웃었다.
“첫 번째. 나는 네가 진 것에는 화가 나지 않아.”
그리고 손가락을 오크 리더의 턱을 붙잡고 위로 들쳐 올려 자신을 올려다보도록 했다.
“두 번째, 저 분은 결코 약한 자가 아니다. 특히 남자, 태석 님은 말이야.”
태석 님이라고……? 오크 리더는 두 귀를 의심했다. 왜냐면, 자신이 아는 색욕의 악마는 결코 누구에게도 님 자를 붙이지 않는다. 사디스틱 플레이를 할 때 외에는. 그 정도로 강한 여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태석 님? 저 인간 놈은 대체 얼마나 강한 거지? 오크 리더가 당황할 때, 스카이가 히죽 웃으며 손을 가볍게 돌렸다.
콰지지지지직!
오크 리더의 목이 비틀려 똑 하고 떨어졌다. 척수가 뽑혀 나와 징그러운 녹색 피를 흩날린다. 녹색 피가 장독에 녹아 사라졌다.
오크 부하들은 서둘러 달려갔다. 도망친 것이다. 재미없어. 스카이는 고개를 저으며 오크 부하 쪽을 흘낏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뭐, 별수 없지. 나중에 천천히 벌주도록 할까.”
“색욕의 악마, 스카이 할 블랜드.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지?”
“네가 북한에서 뭔가 활약을 펼칠 거란 건 알고 있었어. 태석 님.”
“어떻게?”
“그야 아카식 레코드를 이용 가능한 건 성천주뿐만이 아니거든.”
“그렇다 해도…….”
“물론 성천주와 서버가 다르지만, 태석, 너는 악마들 사이에서도 꽤 유명한 녀석이야. 굉장하다고.”
“…….”
태석은 말없이 노려보았다.
“후, 할 수 없군.”
스카이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결론부터 말할게. 나는 네 적이 되고 싶지 않아. 너의 동료가 되고 싶어.”
“뭐?”
태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료가 되겠다고? 도대체 어째서? 악마가 어째서 착한 일을 하는 거지?
“생각하고 있겠지. 왜 착한 편에 붙냐고. 근데 나는 착한 편 나쁜 편을 가르지 않아.”
색욕의 악마가 히죽 웃었다.
“이기는 편에 붙을 뿐.”
“이기는 편에 붙는다고?”
태석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색욕의 악마가 등장한 날, 아이언 월드 대회장에서 폭탄을 설치하던 성천주의 일을 떠올렸다. 그 성천주는 자신의 손으로 죽였고, 색욕의 악마는 죽였지만 아바타였다. 죽이지 못했던 것이다. 그 뒤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나선 하는 말이, 이기는 편에 붙는다며 자신에게 붙겠다고 한다. 태석이 말했다.
“나에게 붙겠다는 소리인가?”
“그래, 맞아. 나는 너의 편에 붙어 악마들을 완살하는 데에 도움을 줄 거야.”
“완살이라…….”
“그래, 완살.”
색욕의 악마, 스카이 할 블랜드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 시스템 창을 열 때의 동작을 취한다. 아카식 레코드, 그것도 악마들의 서버에 접속하는 모양이다.
“아직 악마들은 내가 너를 돕겠다고 한 것을 몰라. 왜냐면, 그것이 아카식 레코드에 저장되지 않도록 내가 최대한 막고 있기 때문이지. 그런 상황에서도 악마들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그런 정보들은 모조리 아카식 레코드에 속속들이 저장되어 내 눈으로 볼 수 있어. 그리고 각 악마들의 완살 방법은, 내가 알고 있다. 그러니 너를 도울 수 있는 거야. 악마 살해를 도울 수가 있단 거지.”
“제법 구미가 당기는군. 하지만 그래서야 너에게 좋은 점이 뭐가 있지?”
“최악의 악마, 마왕이 될 수 있어. 그게 내 목표이자 먼 꿈과 바람. 하지만 네가 도와준다면, 나는 그 꿈을 이룰 수 있지. 커리어 우먼이라고 하던가, 한국에서는?”
“그걸 속칭으로 미친년이라고도 부르지.”
“꺄하하하!”
스카이가 배를 부여잡고 웃었다. 태석이 미친년 보는 눈으로 보았다. 왜냐면, 스카이는 제정신이 아니니까. 아무리 악마라 해도 악마들끼리 서로 알고 지내고, 때로는 서로를 돕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게 배신을 결심하고, 저렇게 해맑게 웃다니. 아무 근심 걱정, 악의가 느껴지지 않는 웃음에 태석이 기가 질렸다.
“그래서 어쩔 거야? 태석 님?”
“님 자 좀 그만 붙이고, 내 결정은 단순해.”
태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그 계약은 체결될 수 없어.”
“뭐?”
“왜인지 알려줄까?”
태석이 입꼬리를 비틀며 말을 이었다.
“악마들 중에서 가장 강한 게 너일 거야. 혹은 상위권에 드는 강함이겠지. 감히 인간이 너의 완살 방법을 모른다면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너는 분명 다른 악마들을 전부 살해할 자신이 없을 거야. 그 정도로 강하지는 않아서.”
“…….”
스카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기분 나쁘다는 신호인가. 뭐, 좋다. 태석에게 아쉬울 것은 없으니까.
“그러니까 모든 악마를 같이 죽여서 너만 남으면 곤란하다는 거야. 마왕이 되면 반드시 더 강해질 테니까.”
“잘 아네. 내 수를 어느 정도는 읽었어. 하지만…….”
털썩.
그때였다. 태석이 고개를 돌려 여자 쪽을 본다. 현지가 쓰러졌다. 현지가 기운을 잃고 헐떡이고 있다. 얼굴에 혈관이 자글자글하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았다. 위험하다. 죽다니, 말도 안 된다. 절대 죽어서는 안 된다. 현지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 정도였는데 이제 와서 허망하게 죽는다니. 아니다. 아직 숨은 붙어 있다. 포기하기에는 이르다.
태석이 서둘러 현지를 안고 스카이를 노려보았다.
스카이가 한숨을 뱉으며 말했다.
“장독에 침식됐군.”
스카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현지를 보았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순간 검은 기적이 뻗어 나가 노란 기적으로 변질되어 스카이의 육신에 파고들었다. 스카이의 몸에서 혈관이 꿈틀거리다가 모두 안 보이게 피부 속으로 들어가 사라진다.
“뭘 한 거지?”
의심된다. 스카이가 미처 신경 쓰지 못한 사이에 나쁜 짓을 했을까 봐. 그러니 물은 것이었고, 스카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개를 저었다.
“나는 몸에 안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몸에 잘 맞는 악마거든. 그러니 이 여자의 장독을 모두 흡수해 먹어치운 거야. 제법 맛이 좋은걸?”
“…….”
어째서 도운 거지? 스카이는 정말로 태석의 편이 되고자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일시적 동맹이다.”
“그래, 좋아.”
스카이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석이 말했다.
“대신 이곳에서 빠져나올 때까지로. 그 뒤에는 네가 하는 꼴을 보고 결정하겠어.”
“그래, 좋아.”
스카이가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너와 나는 친한 친구가 되는 거지?”
“아니.”
태석이 고개를 저었다.
“비즈니스 관계다.”
선을 그었다.
견현지는 헐떡이고 있었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장독이 모두 빠져나가 스카이의 몸속에 흡수되었다고 해도 이미 장독에 침식당해 몸 상태가 극도로 나빠진 상태이기 때문일 것이다. 태석은 입을 다물었다. 분하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짜증난다. 순간 태석의 눈에 붉은 안광이 휘감겼다.
[화나지 않냐?]
[헬라가 묻습니다. 화나지 않냐고.]
[어서 폭발해. 어서. 어서 저 녀석을 죽여.]
“후우.”
태석은 고개를 돌려 스카이 쪽을 보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허나 입술을 혀로 살짝 핥고는 물었다.
“이봐, 스카이.”
“왜 그러지?”
“현지의 상태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의학 분야는 전혀 몰라서.”
“글쎄.”
스카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간이라면, 그것도 F 정도라면, 앞으로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지도?”
“그러면 됐어.”
괜찮다. 태석은 자신을 재차 안심시켰다. 현지는 무사하다. 하지만 일단 눈앞의 색욕의 악마, 스카이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지금 당장 싸울까? 안 된다. 이쪽은 지금 현지를 인질이나 다름없이 잡힌 상태. 섣불리 공격해서는 안 된다. 물론 스카이는 현재 태석에게 호의를 보이고 있다. 그 호의를 이용해야 한다. 호의가 둘리가 될 지경이 올지라도 이용해 먹어야 한다.
지금 어째서인지 스카이는 태석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 증거로 현지를 살렸으니까. 현지가 죽으면 스카이에게 손해라는 소리. 그리고 그 이유는, 태석과 같은 편이 되기 위해서이고.
태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러면 일단 무언가를 묻자. 이쪽은 정보가 부족하다.
어떤 정보를 얻는 것이 좋을까? 많이는 물을 수 없을 것 같으니까 핵심을 물어볼까? 그렇게 뭘 물어볼지 고민할 때, 스카이가 한숨을 푹 내뱉으며 말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무언가 정보를 캐낼 작정인 모양이야. 그러면…… 몇 가지 알려줄게. 필요한 정보로 생각되는 것들을.”
스카이가 히죽 웃었다.
태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입꼬리를 비틀었다.
“다 내놔, 정보.”
“알았어.”
“어서.”
“흐음, 뭐가 좋을까.”
스카이는 활짝 웃어 보였다.
“분노의 악마를 내가 가두었어.”
“어디에?”
“어디냐고? 물론 이곳 어딘가이지. 나도 기억이 안 나.”
“거짓말 마라. 어디서 기억이 안 난다고 하는 거지? 가둘 정도의 일이라면 뇌리에 강하게 심어졌을 텐데?”
“악마와 인간을 같다고 생각하지 마. 나도 나름대로 수천 년간 살았어.”
“수천 년? 그런데 여태껏 왜 모습을 보이지 않은 거지?”
“그거 알아?”
“뭐를?”
“천사들이 어째서 악마처럼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지. 그리고 강신자인 너에게만 신이 모습을 드러내는지. 왜 직접 강림하시지 않는 건지? 알아?”
“왜 그런 거지?”
“나도 잘은 모르지만…….”
스카이가 히죽 웃었다. 색기 넘치는 미소였다. 태석은 인상을 찌푸렸다. 기분 나빠.
“아무래도 어떠한 존재 때문에 신과 천사들이 이 세계에 추방당했어. 그것도 아주 먼 옛날에.”
“그래? 그런데 그걸 어떻게 믿지?”
“악마들은 최근에 들어서야 이 세상에 강림할 수 있게 되었거든. 신은 너를 통해 다시 이 세상에 발을 붙일 수 있게 하고자 하고 있고.”
“있고……?”
“천사들은 성천주라는 사도들을 만들어 세상에 나타나는 흑수정 정화를 시키고 있는 거지. 최근 들어서 지구 쪽에도 성천주가 등장했고, 헌터라는 존재들이 나타나도록 한 거야.”
신과 성천주는 세상에서 추방당한 상태. 악마는 간신히 이곳에 강림한 상태. 헌터와 성천주는 천사가 만든 존재. 그 이유는 흑수정 정화를 위해서.
“그러면 흑수정은 어째서 생기는 거지?”
“나도 몰라. 그래서 마왕이 돼서 한번 알아보려고.”
“……아카식 레코드를 말하는 건가?”
“그래, 아카식 레코드. 그 권한이 마왕이 되면 더 확장될 거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크게.”
“흑수정의 생성 방식을 알게 되면 어떻게 할 거지?”
“낸들 아나. 그냥 알아보고 적당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 거지.”
“인간들에게 좋게 행동할 확률은?”
“반반.”
“그래, 알았어.”
“이제 내가 너의 완전한 친구가 되어도 좋을까? 나에 대해서 많이 알았잖아?”
“아니, 그건 아니야. 어디까지나 비즈니스 관계다.”
태석이 고개를 저으며 확언했다. 스카이가 히죽 웃었다.
“그래, 하긴 내가 싫겠네.”
그리고는 놀라운 발언을 했다.
“너희들이 이곳에 조난당한 이유는 모두 내가 벌인 짓 때문이니까.”
“…….”
태석이 인상을 찌푸렸다.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눈빛이 흡사 사냥감을 먹어치우고자 하는 날짐승을 보는 것 같았다. 차갑고 예리하다. 스카이는 몸이 부르르 떨렸다. 어쩌지. 태석에게 색욕을 느끼고 있다. 먹고 싶다. 갈기갈기 찢어서.
태석이 말했다.
“똑바로 말해. 뭔 짓을 저질렀다고?”
“흑수정을 이용했어. 흑수정의 에너지를 일부 끄집어내서 기차에 포트리스 하듯이 퐁 하고 맞추었지. 태석, 네가 타고 있는 걸 알았거든.”
“……용서 못 해.”
“그리고 이곳에 추락하도록 유도했지. 왜냐면, 내가 여기에 분노의 악마를 가두었거든.”
“그 악마를 죽이도록 돕게 하여 동료가 된다. 그것이 네 목표였나?”
“그래, 악마의 완살 또한 가르쳐주려 했거든. 참고로 지금 말할게.”
스카이가 교묘한 미소를 지었다. 눈웃음이 능글맞다. 태석은 그 볼을 주먹으로 후려치고 싶었다. 전력을 다해.
“악마의 완살법은 너에게 있어. 해결해보도록 해.”
“닥쳐.”
태석이 분노했다.
스카이는 기차를 일부러 부수었다. 인명 피해는 상관 않고, 단지 자신의 뜻대로 태석의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
그것은 용서할 수 없다. 그 교활한 계획 때문에 많은 이들이 위험에 처했다. 이미 죽은 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고작 계획대로 하기 위해 수많은 학살을 무시하고, 태석에게 동료가 되자고 꼬드긴다.
용서 못 한다. 갈기갈기 찢어발겨 주마.
태석이 푸른 안광을 빛냈다. 속성 단검이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파지지지직!
전격이 가볍게 날아가 스카이의 몸에 부딪힌다. 쾅! 웅장한 괴음이 들렸고, 스카이의 몸이 뒤로 살짝 밀렸다. 기적으로 방어막을 만들어 간신히 견딘 것이다. 하지만 방어막이 난데없는 전격 공격을 다시 맞아 엉망진창 망가진다. 태석이 사납게 웃었다.
“너는 많은 이들의 목숨을 자신의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어.”
“뭐, TOY(장난감)를 이용한 거니까 괜찮지 않을까?”
“전혀.”
태석이 분노했다. 눈앞에 뵈는 것이 없을 정도로. 그러니 전력을 다해 싸울 것이다.
“너를 죽일 거야. 반드시.”
분노를 폭발할 대상이 눈앞에 있다. 스카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