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모든 신을 받다-44화 (44/102)

# 44

44. 패배 선언

태석이 허리춤에 매단 속성 단검을 역수로 잡아 꺼냈다. 그리고 자리에서 뒤로 튕겨 나가듯이 일어나 어느 한 곳을 노려본다.

그곳이 어디인지 현지가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곳은 유난히 노란 안개가 짙은 곳이었다.

괴수인가? 아니다. 괴수라기엔 지나치게 인간과 비슷한 모습이다. 리치와는 달리 살집이 제법 있는, 헤비급 인간의 크기보다 두 배는 크다.

모습을 드러냈다. 현지가 입을 벌리며 놀랐다. 태석이 인상을 찌푸렸다.

“더 가까이 와봐라.”

녹색의 피부가 보인다. 긴 어금니가 아래턱에서 위로 솟아오른 것이 보인다. 옷은 의외로 얌전한 정장을 입고 있었으며, 머리에는 양복에 어울릴 법한, 아니 마술을 하는 마술사들이 쓸 법한 원기둥의 공간이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 손에는 지팡이는 아니었다. 지팡이처럼 굽어진 손잡이에 칼날이 붙어 있었다. 챙 하는 반사광이 현지의 눈을 더럽혔다.

녹색의 피부에 어금니가 길다면, 누구인지는 분명하다.

“외계의 이종족, 오크냐?”

오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유창한 한국말이다. 태석이 인상을 찌푸렸다. 외계 행성에서 온 오크 종족들중에서도 착한 녀석이 있고, 나쁜 녀석이 있다. 옷차림은 일단 얌전한데, 과연 착한 녀석일까? 아니, 나쁜 녀석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오크는 한 마리가 아니다. 두 마리? 그것도 아니다. 세 마리, 아니 열 마리 정도가 있다. 더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는 두 손으로 셀 수 없고, 발가락으로 겨우 셀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더 이상 세는 것을 포기하고, 태석과 현지가 자신들을 둘러싼 오크들을 노려보았다.

“뭘 하려는 거야. 이 노란색 장독은 너희들이 만든 거야?”

“그렇다.”

오크 하나가 마술사 모자를 벗고 젠틀한 인사를 하며 말했다.

“우리의 공간에 침입한 인간들은 우리들이 처리할 것이다.”

“너희들, 대체 왜 여기서 사는 건데?”

그때 오크가 취익 하며 웃었다.

“우리들은 외계의 고향에서 추방당한 범죄 조직. 악마 추종자였지만 지금은 그 신념을 버린 야만 오크들일 뿐이다.”

“야만 오크……?”

그보다 중요한 단어가 있다. 악마 추종자. 그리고 추방당했다. 설마하니 외계에도 악마 추종자가 있다는 사실이 정말이었던 건가?

그건 아무래도 됐다. 지금은 태석과 현지가 위험한 상황이다. 오크들이 얼마나 강한지는 알 수 없으나, 오크들은 헌터 정도로 강하다. 애당초 이종족 중 제일 무력이 강하다고 보면 된다. 엘프는 마법이 강하고, 드워프는 도구에 강하다. 오크는 무력. 그런 오크가 스무 마리 내외로 태석과 현지를 감싼 상황.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지.

“하하하.”

뭘 어떻게 하긴 어떻게 해. 싸워서 이겨야지. 그래서 생존해야지.

여동생, 태희에게 슬픔을 안기지 않도록 살아남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파티원들에게도.

그렇기에 태석이 말했다.

“덤벼라.”

두 종족이 장독이 가득한 낭떠러지 밑에서 충돌한다.

오크를 뉴스에서도 보고, 가끔 TV 방송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았으나, 오크들에게 있어서 대한민국은 힙스터 취향일 경우에만 방문하는 비인기 지역이다.

애당초 헌터 강국까지는 되지 않는, 평범하게 강한 헌터들이 여럿 거주한 대한민국은 북한의 초거대 흑수정 TOY를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흑수정이 없다. 그러니 더욱 오크들이 기피할 만하다.

그런데 북한의 낭떠러지 밑에 장독을 깔아두고 생활하는 오크들이 있다니. 무엇보다 복장이 독특하다. 신사처럼 양복을 입고 지팡이처럼 굽어진 얇은 칼 한 자루를 들고 있는 오크 이십에서 삼십 마리. 어느 뭐로 보나 정상은 아니다. 그야 오크들이 요즘 지구 복장을 갖춰 있는 경우도 많다지만, 대체로 단단하고 무거운 갑옷을 입고 다니는 녀석들이다. 신사와는 거리가 먼, 야만족이라고도 불릴 정도.

어찌 됐건, 싸움은 시작됐다.

태석은 속성 단검에 토르의 힘을 강신시켰다.

찌릿.

뭔가 아프다. 토르 대신 무언가가 튀어나오려는 감각.

[헬라가 괴성을 지릅니다.]

뭐야, 뭐야? 헬라? 어째서 그 신이 멋대로 튀어나오려는 건데. 하지만 본인이 튀어나오려 할 뿐, 태석은 멀쩡히 토르를 강신했다. 푸른 천둥이 태석의 눈가를 스쳤다. 그리고 푸른 안광이 빛났다. 그러고 보니 태석은 자신의 눈가를 만졌다. 안광이라, 일부러 내는 것은 아니지만 멋지다. 태석이 사납게 웃으며 단검을 휘두른다.

파직.

순간적으로 속성 단검에 흐르던 천둥이 검은 잿빛을 내었다가 푸른빛을 내었다. 무슨 일이지? 설마하니 헬라의 힘이 약간이나 마 영향을 주는 건가? 이래서야 마치…… 헬라가 난동을 부리고 싶어서 태석의 내부에서 난동을 부리는 것 같잖아.

태석이 속성 단검으로 오크 한 마리의 등에 속성 단검을 꽂았다. 그리고 천둥을 흘려보냈다.

파지지지지지직-!

“끄어어어어어어어억!”

오크 한 마리가 경직, 태석이 현지에게 소리쳤다.

“현지 씨!”

“네!”

현지가 서둘러 마력의 실을 흩날렸다. 좋아! 잘됐다. 태석이 천둥을 일으켜 마비시킨 오크 A에게 마력의 실이 날아들었다. 날카롭게 속성을 변질시킨 듯, 마력의 실에 닿은 오크의 사지와 머리가 잘려나갔다. 아무리 생명력이 끈질긴 녀석들이라도 이 정도라면 문제없이 사망이겠지? 그런 거겠지?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그것은 기우였는 듯, 오크 A가 미동도 없다. 즉사한 모양이다. 여기서 멈출 수 없다. 오크 스무 마리가량이 태석과 현지를 노리고 있고, 자칫하면 오크들에게 그대로 꼬치구이가 된다. 저 얇고 긴 검에. 그보다 체급에 비해 너무 가벼운 무기를 들고 있는 것 아니야? 저래서야 싸울 수 있겠어? 뭐, 상관없다. 저 녀석이 뭘 들고 있건, 약한 걸 들고 있으면 그걸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거니까. 좋은 일이다.

“음. 시작해라, 동지들.”

신사답게 마술사 모자를 쓴 것을 집어 던지고, 오크들의 리더로 보이는 오크 리더가 마술사 모자를 하늘 높이 던졌다. 바닥에 구른 마술사 모자를 오크 리더가 발로 짓밟았다.

펑!

그때였다. 노란 안개가 더욱더 짙어졌다. 어째서지? 어째서긴 뭘 어째서야. 태석은 확신했다. 저 모자, 평범한 모자가 아니다. 장독을 퍼트리는 형태의 헌터 도구일지도 모른다. 그 결과, 숨을 쉬기 곤란해졌다. 그때였다.

[헬라가 난동을 부립니다.]

[야 이 새끼야! 빨리 죽지 못해? 죽으라고! 난 나가고 싶단 말이야!]

[……라고 하고 있습니다.]

머리가 어질거린다. 뭐하는 놈이야, 헬라? 태석은 자신을 죽길 바라면서 나가고 싶다고 하는 버르장머리 없는 신의 행태를 보면서 분노했다.

“죽지 않아, 새끼야.”

태석이 그렇게 말하고, 오크 리더는 자신에게 한 말인 줄 알고 대답했다.

“당신들은, 여기서 죽습니다.”

히죽 웃으며 지팡이 같은 검을 하늘 높이 들었다.

“이 검은 휴대하기 편리하도록 고안된 검. 평상시에는 이렇게 얇고 보잘것없는 얇은 검이지만.”

오크 리더가 사납게 웃었다. 눈에서 붉은 안광이 흘러나왔다. 광기다. 광기라고, 태석은 그렇게 느꼈다.

오크 리더가 들고 있는 지팡이가 순식간에 대검의 형태로 변했다. 오크 한 마리 정도 크기의 대검은 일반인은 들고 운반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묵직했다. 그리고 신사복을 입은 녀석들의 다른 지팡이 검 또한 대검으로 변했다.

설마하니…… 악마 추종자들은 저런 식으로 무기를 감추는 것인가?

“너희들은 모두 그렇게 무기를 감추고 다니는 건가?”

“원래 세상에 저항하는 자들은 교묘하게 무기를 감추지요. 그런 것조차 몰랐다는 말입니까? 역시 야만한 녀석들답군요.”

“시끄러.”

태석이 사나운 표정을 지었고, 그리고 표정이 굳은 채 현지를 향해 말했다.

“현지 씨.”

“왜요? 무엇이든 말씀하세요.”

자신감이 넘치는 상태인 건가. 현지의 목소리가 묘하게 들떴다. 그도 그럴 것이 현지는 태석이라는 유명한 사람과 함께 모험을 한다는 기분이 좋았다. 이제 생명의 위협 따위는 아무려면 어떠냐 싶다.

태석이 그런 생각을 읽은 것인지 쓰게 웃었다.

“이제부터 진심으로 갑시다. 살아남자고요.”

현지가 그 말을 신호로…….

“알겠습니다!”

팡! 순식간에 마력의 실을 터트려 허공에 휘날리고 있었다.

온몸의 전신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마력의 실은 본디 현지가 착용한 마력의 실을 잘 쓸 수 있게 하는 도구 덕분에 더 잘 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현지의 재능이 있는 탓이기도 했다. 헌터들 중에 극소수만 사용 가능한 마력의 실,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닌 도구를 F랭크의 헌터, 현지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뭐가 평범하다는 거야. 태석은 입꼬리를 올렸다. 이렇게 비범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데 F면 어때.

이미 현지는 평범하지 않다. 특별하다.

태석이 소리쳤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천둥과 비바람을 둘러싼 채 공격을 시작한다.

오크 B가 공격한다. 태석이 이를 막는다. 아니, 막은 것이 아니다. 대검에 닿은 것이, 마치 단단한 견갑질을 가격한 마냥, 팅! 하고 튕겨 날아간다. 대검을 잡고 있던 오크 B는 대검이 하늘로 날아가 빙빙 돌아, 멀리 가지 못하고, 오크 C의 대가리에 직격했다. 오크 C의 대가리가 그대로 짓이겨진 채 피와 뇌수를 흩날렸다. 장독에 녹아 사라진다. 장독, 제법 위험한 기류로군. 태석은 당황한 오크 B에게 비바람의 폭풍을 사용하려 한다. 비바람을 뭉치고 흩날려 오크 B의 몸에 공기 덩어리를 쥐어박는다. 공기가 음속에 해당하는 속도로 휘날려 날아가 오크 B의 내장을 짓뭉갰다.

이어서 다시 태석은 대검을 튕겨낼 정도로 공기를 압축하여 비바람을 통해 자신의 몸을 보호한다. 마치 갑옷과도 같다. 토르를 강신하여 만든 비바람이다.

[헬라가 싱겁다는 투로 한숨을 푹 내뱉습니다.]

[토르가 호탕하게 웃으며 자신의 행동을 로키에게 자랑합니다.]

[로키가 코를 팝니다. 더럽네요.]

‘너희들은 내가 싸워대는데 뭘 그렇게 좋다고…….’

뭐라 하고 싶지만 자신의 내부에서만 들리는 시스템 알림이니 별수 없다.

태석은 고개를 돌려 현지 쪽을 본다. 현지 또한 잘 싸우고 있다. 벌써 세 마리의 오크를 처리하고, 연이어 달려오는 오크 D를 향해 마력의 실을 휘감아 고치처럼 칭칭 감는다. 오크 D를 질식시키려는 건가. 마력의 실을 마치 거미줄을 뭉친 것처럼 보이게 해 목까지 밀어 넣었다.

오크 D가 질식하려 하지만 너무 늦다. 하지만 마력의 실을 해제하기에는 모호하다. 금방이라도 다시 달려들 기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태석이 나섰다. 속성 단검에 천둥을 휘감아 오크 D의 목을 가볍게 잘라냈다. 그것도 모자라 등의 척추 부분을 찔렀다. 이걸로 신경이 잘렸으니 몸을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연이어 다가오는 오크 E는 현지가 처리했다. 마력의 실을 날카로운 형태로 바꾸어 오크 E의 사지와 목을 잘라냈다. S랭크 헌터에게는 안 통하는 공격이겠지만, 나름 괜찮은 공격이다. 이번 흑수정 정화 때, 강하지 않지만 다루기 힘든 괴수는 현지에게 맡기도록 하자. 태석은 사나운 미소를 짓고 다음 오크를 노린다. 오크 리더는 먼발치에 서서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카락스다. 카락스 같아. 이 괴물들은 대체 뭐지……?!”

“카락스?”

“…….”

카락스가 뭔데? 태석이 물어보려 했지만, 오크 리더는 서둘러 소리쳤다.

“모두 도망치자!”

오크가 패배 선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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