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43. 목표
현지와 태석이 걷고 있었다. 노란 안개가 가득한 ‘독기’라는 것이 흘러넘치는 묘한 공간. 땅이 갈라져서 생겨난 낭떠러지의 밑이라는데, 정말이지 지독할 정도로 괴수의 향취가 흘러나오는 것이 등에 땀이 흥건하게 흐르는 느낌이다. 어쩌면 땀이 아니라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때 받은 상처일 지도 모른다.
헌터들은 몸이 단단하기에 웬만한 상처로는 죽지 않는다. 인간 병기 수준인 것이다.
태석이 계속 걷기도 뭐했기에, 대화라도 하고자 했다.
“현지 씨.”
“왜요?”
“현지 씨는 어쩌다 헌터가 된 거예요?”
“저야…… 평범하게 헌터로 각성하고, 평범하게 겐세 님 눈에 띄어서 활동하고 있었는데요?”
“평범하군요.”
평범…… 한 건가? 확신은 들지 않는다. 태석은 그녀가 어떻게 살아온 것인지 잘 모르니까. 어떤 불행을 겪은지 모른다. 어떤 행복을 겪은 건지 모른다. 다만 알겠는 것은, 현지는 괴수에 대한 증오가 적다는 것. 그러니까 F랭크의 헌터로만 각성한 것이겠지.
태석이 말했다.
“평범한 거 좋죠.”
“아뇨, 그 말은 틀렸어요!”
현지가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묘하게 멍청해 보이는 것이 제법 귀엽다. 태석에게 현지가 말했다.
“저는 대단한 헌터니까요. 땅개라는 별명도 있거든요.”
“땅개. 그래, 땅개. 그때 기억나네요. 대회 때.”
“윽. 거기부터 공략하는 건가요?”
공략이라……. 공략? 글쎄, 태석은 현지를 딱히 공격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공략이 아니라 회상 정도가 되겠지. 현지가 뭐라 뭐라 중얼거렸다. ‘역시 하렘 마스터라는 소문이 무성한 남자다워……. 벌써부터 공략 대상이 되는 것인가…….’ 잘 듣지 못했다. 그래, 듣지 않은 것이다. 뭔가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지만, 태석은 하렘 마스터도 아니고, 딱히 여자를 꼬시는 재능은 없을 것이다. 암, 그렇고말고.
“땅개라는 별명 말인데, 그거 누가 어떤 연유로 지은 거예요?”
“음…… 글쎄요. 굳이 따지자면 제가 지었다고 보면 되겠네요.”
“잘 모르나요?”
“아뇨, 모르는 건 아니고. 언제부턴가 그렇게 불렸는데, 제가 땅개라고 별명을 지은 그런 느낌이에요.”
“……?”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뭐, 태석이 신경 쓸 일은 아니다. 현지에게 더 이상 실례되는 말을 하는 것은 안된다. 그러면 계속 걷는 데에 집중하도록 할까. 지금은 겐세 일행과 합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 딴마음은 품지 않는 거다. 딴 마음? 어떤 마음을 뜻하는 걸까……? 뭐지, 뭔가 아쉬운 감각이 드는데? 아닐 거다. 자신은 현지를 딱히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싫지도 않다.
아무튼, 지금은 행군이다. 살아남기 위한 행군.
현지가 그때 말했다.
“태석 씨는 역시 굉장한 것 같아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죠?”
“그게…….”
“그게?”
“음…… 그러니까 뭐라 해야 할까. 반짝거린다고 해야 하나. 저 같은 평범한 사람과는 다른 특별함이 있어요. 그게 동경스러워서 그래서 겐세 님에게 태석 씨와 함께 가고 싶다고 한 거예요. 왠지, 배울 점이 많아 보이거든요.”
“저는 그리 특별하지 않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특별한 게 아니라 지독한 것이다. 그 점은 분명히 해두도록 할까. 현지가 큰 오해라도 하면 큰일이니 기대하기 전에 잘라내는 것이 좋겠다.
“저는 굳이 따지자면, 지독한 편이죠.”
“지독하다?”
“그래요, 지독. 저는 그리 행복한 과거를 가지고 있지 않고, 그리 좋은 형편도 아니니까요. 돈은 이제 제법 있지만, 계속해서 안 좋은 일이 빵빵 터지고 그걸 수습하느라 고생 중이니까.”
“그런…… 가요?”
현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반응이지. 현지의 반응이 신경 쓰인다. 뭔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뇌 속을 열어서 한번 관찰하고 싶지만, 그 이상의 참견은 집착이다. 신경 쓰지 말도록 하자.
그때 현지가 살짝 비틀거리며 걷는 것이 눈에 띄었다. 지친 것인가? 하긴,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고 지치지 않은 게 이상하다. 게다가 겐세의 말에 따르면 현지는 잠을 설쳤다고 들었다. 태석과 만나는 것이 기대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겐세가 그리 말했으니까. 왠지 느낌이지만, 이 사실을 물으면 현지가 툴툴대면서 기대는 안 했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본심을 털어놓을지도.
……그저 상상이다. 태석에게 호감을 품거나 그런 게 아니라, 그저 약간 동경하는 느낌이니까.
그보다 현지가 아까부터 더욱 비틀거리는데 뭔가 이상하다. 잠깐…….
“현지 씨.”
태석이 현지를 붙잡아 멈춰 세웠다.
잊고 있었다.
현지는 F랭크이다. S랭크인 자신만큼 튼튼하지 않았다. 비록 태석이 자신을 아래로 하여 현지를 보호하는 자세로 추락했지만, 그 충격의 여파가 있다. 낭떠러지는 제법 깊었다. 아마 밝은 날이어도 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다. 그런 깊은 곳에 떨어진 S도 살짝 지쳤는데, F라면? 얼마나 아플지, 아니 얼마나 다쳤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태석이 그렇기에 현지를 붙잡고 바지를 위로 밀어 올렸다. 그리고 발목을 본다.
이런, 끔찍하다. 태석은 눈을 감고 싶을 지경이다.
발에 뼈가 보일 정도로 짓이겨져 있다. 이 정도라면, 힐링팩을 부착해 낫게 할 수 있다. 현지에게 힐링팩이 없었던 걸까? 아니, 가지고 있다. 주머니에 넣는 것을 오늘 아침에 보았다. 그러면 왜 안 붙인 걸까? 설마…… 아끼려고? 현지는 자신보다 태석이 다쳤을 때 쓰려고 힐링팩을 아끼고, 뼈가 다 드러나는 데도 버티고 있던 건가?
뭐야, 그거. 자신을 마치 소모품이나 쓸모없는 물건처럼 대하는 거, 질색이다. 그런 존재는 태석 하나로 충분하다.
태석이 소리쳤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아니, 그게…….“
“시끄럽고, 앉아서 잠깐 쉬죠. 거기다 힐링팩 좀 붙이고.”
“하지만 저는 전력이…….”
“전력이고 자시고…….”
태석이 살짝 화난 표정을 눈을 감고 입술을 혀로 핥았다. 화가 나서 참기 위해 하는 행동, 현지가 살짝 긴장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 어요.”
태석은 서둘러 토르를 강신하고 나뭇더미를 대충 끌어모았다. 낭떠러지에도 나무 몇 그루가 자라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나뭇더미를 끌어모아 토르의 강신으로 천둥을 일으켜 불을 냈다. 거대한 캠프파이어 같은 것이 생겨났다.
현지의 발목에 힐링팩을 붙이고 앉았다.
“일단 여기서 시간 좀 축입시다.”
일단 휴식이다.
한편, 지상.
대한은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었다. 표정이 어둡다. 나라라도 잃은 표정이다. 실제로 북한이 나라를 잃었을 때, 북한 주민 혹은 높은 층들의 표정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심지어 멸망한 국가의 땅 위에 서 있으니 뭔가 이상한 기분까지 든다.
젠장, 대한은 화가 났다. 자신은 이번에도 나서지 못했다. 짜증 난다. 어째서 구하려고 덤벼들지 못했을까. 자신이 뛰어들었어야 했는데, 태석은 큰 전력이 되니까. D인 자신이 나서야 했다. 자신이 없어도 흑수정 정도는 태석이 알아서 할 수 있을 텐데.
대한의 생존 욕구가 이번에도 태석을 위험에 빠트렸다. 이래서야 20년 지기 친구라고 할 수는 없다. 친구가 아니라 짐 덩어리였다. 대한이 그렇게 자신을 자책할 때였다.
겐세가 고개를 저었다.
“세 시간이 지났다. 아직 태석에게는 연락조차 없어. 이건 죽었다고 보는 편이 낫겠군.”
대한이 고개를 저었다. 죽었다고? 절대 아니다. 태석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는다. 그러니 겐세에게 말했다.
“안 죽었습니다.”
“그러면 왜 연락이 없지……?”
시연이 이번에는 소리쳤다.
“그야 연락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제법 좋은 무전기까지 줬고, 마법으로 충분히 연락이 가능할 텐데 신호가 닿지 않고 신호도 오지 않아. 그런 걸 실종 상태라고 부르지. 실종이 오래되면 사망 상태라고 하고.”
“그건…….”
시연이 말문을 잃었다. 맞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고개를 저었다. 이런 거에 납득하다니, 말도 안 되지 않는가. 대한과 시연이 노한 표정으로 겐세를 노려보고, 딱히 할 수 있는 논리의 말이 없어 씩씩만 댈 때, 겐세가 피식 웃었다.
“됐다. 악역은 이쯤 하면 끝이겠지.”
겐세가 미소를 지었다. 무슨 소리지? 대한과 시연이 멀뚱멀뚱한 표정을 지을 때 말했다.
“시험…… 이라고 해야 하는가. 너희들이 태석과 현지의 처분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할 시간을 준 거다. 그리고 답은 나왔군. 너희들 모두 태석과 다시 합류하고 싶은 모양인데다가, 태석은 실제로 우리에게 중요한 전력이다. 그렇다면…….”
겐세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어떻게든 합류한다. 그 방법을 찾도록 하지. 우리 파티의 최우선 목표이다.”
최우선 목표. 그 말에 시연과 대한의 표정이 바뀌었다. 겐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표정이군. 역시 태석이 고른 인재답다. 꽤나 의지력이 돋보이는 남녀다.
겐세가 말했다. 최우선 목표를.
“태석과 합류한다.”
태석은 편안함을 느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다.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운 절벽 밑 공간의 공기, 그리고 노란색의 안개들이 끊임없이 따끔거리는 독기를 뿌려댄다. 허나 그 모든 것을 잊게 해주는 따스한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다.
태석은 거기에 겐세에게 받은 비상식량을 살짝 데쳐서 입에 넣었다.
와그작, 와그작.
기이한 프로틴의 맛이 느껴진다. 아니, 프로틴이라기 보다는 밀가루 덩어리 같은 느낌? 그래, 그런 느낌이다. 그리 좋은 느낌은 아니지만, 생존하기에는 더 없을 정도로 좋다. 새삼 겐세에게 받은 것이 다행이라 느꼈다. 설마하니 겐세도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겠지.
옆에는 어느 무릎에 누워서 잠에 든 현지가 있었다. 현지는 천사 같은 얼굴로 잠에 든 채 ‘으으으, 거기는, 거기는…….’ 이상한 잠꼬대를 하고 있다. 뭐야, 이 여자 무슨 잠꼬대를 해대는 거지? 뭔가 신경 쓰이지만, 본인이 자면서 저도 모르게 하는 것을 두고 물어볼 수도 없을 노릇이다. 태석은 쓴 얼굴을 보면서 현지의 얼굴을 보았다.
풀네임, 견현지. 별명은 땅개. 사용하는 능력은 마력의 실. 마력에 여러 속성을 담아 공격하는, 마법과는 조금 다른 영역의 능력을 쓰는 여자. 어쩌면 겐세는 현지의 그런 재능을 보고 뽑은 것일지도 모른다. F인데도 대견하다고 느껴진다.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한 결과겠지. 그리고 태석은 열심히 하는 자를 미워하지 않는다. 설령 적이라도 존중은 할 것이다. 물론 사상이 다르다면 싸울 테지만.
현지의 뺨에 손을 얹었다. 따스한 뺨의 온기가 손에 전달된다. 자신의 손이 이렇게 차가웠던 건가. 태석은 저도 모르게 살짝 기분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뺨, 정말로 부드럽군. 말랑말랑해서 찹쌀떡을 만지는 기분이다. 한 입 베어 물면 의외로 팥이 주르륵 흘러나오는 것 아닐까 싶다. 태석이 저도 모르게 볼을 꼬집었다.
“앗.”
현지가 잠에서 깨어 눈을 여러 번 꿈벅였다. 태석이 순간 굳어서 현지를 보았다. 뺨을 집은 채로. 어서 손을 놓아야 했는데 이제 와서 놓기에도 모호한 지경. 현지는 그런 손을 보다가 하품을 길게 하며 무릎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태석을 보면서 씨익 웃었다.
“저의 예쁜 얼굴에 감탄하신 거군요~?”
“음…….”
예쁜 얼굴? 예쁜 얼굴에 감탄한 것인가? 하지만 태석은 솔직히 말하자면 현지의 얼굴은 예쁘장하지만, 너무 어리숙하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태석은 그동안 예쁜 여자를 너무 많이 봤거든. 시연이 그러했고, 성천주 고란 또한 한국에서 으뜸가는 미인이다. 아니, 세계적으로 뻗어 나갈 미인상일지도 모른다. 고란의 성격이 심하게 괴랄하지만 않았다면, 고란에게 더욱 호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입을 벌린 채 별말을 하지 않자 현지가 무릎을 끌어모아 앉았다. 모닥불에 손을 간접적으로 대었다.
“뭐, 제 얼굴이 평범한 건 알지만요. 그렇게 말하기 곤란한 표정을 하셔도 기분 안 좋거든요. 쓸데없이 상냥해서는.”
많이 편해진 걸까. 현지가 겁에 질린 성격이 아닌, 다시 밝고 자신감 넘치는 표정이 된 것이 좋았다. 그래, 만족스럽다. 현지라면 본래 이래야지. 현지를 본 적은 태석은 그리 많지 않다. 대회 때, 그것도 급해서 아무것도 생각 안 날 때 본 이후로는 본 적 없다. 물론 현지는 태석에 대해 잘 안다.
아무튼, 태석이 말했다.
“평범한 건 좋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평범한 게 좋다라. 글쎄요, 제가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현지가 싱긋 웃으며 멋대로 말을 이었다.
“저는 아픈 과거도 딱히 없고, 아니 있다고 한다면 수능을 치르다가 늦잠 자서 못 가서 재수를 했던 거고, 뭐 재수를 하던 중에 뜬금없이 헌터 각성을 하고, 마력의 실이란 걸 쓸 수 있다고 해서 겐세님이 데려가고, 안전한 사냥터만 골라서 직장인 월급의 두 배 정도 챙기면서 나름대로 안전한 삶을 선택했었죠.”
“평범하네요.”
“평범…… 할지도요.”
현지가 쓰게 웃었다.
“그런데 태석 씨는 평범과는 거리가 멀다 해야 하나, 불행한 일을 많이 겪었다 해야 하나. 저와는 정반대의 선에 놓여 있는 사람이라는 기분이에요. 같은 한국 사람 맞나 싶을 정도로.”
“뭐, 그렇긴 하지만, 그런 아픔 정도는 이미…….”
“그걸 이겨냈다는 것도 대단한 거죠. 저라면,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현지가 그러면서 상냥하게 웃었다.
“그러니 저는 제 자신의 삶이 만족스럽지만 심심했고, 태석 씨를 동경하게 되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그렇군요…….”
꽤나 부끄러운 이야기이다. 남녀가 단둘이 있는 공간에서 현지가 태석을 동경한다고 했다. 그걸 태석은 어떻게 받아쳐야 할까? 고민이 된다. 태석이 잠시 입을 다물고 말을 정리하다 멈췄다.
“잠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