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36. 세상을 구하는 춤
고란은 대회를 감독석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역시 태석이다. 진심을 다하니 격의 차이를 보일 정도로 적을 묵사발 냈다. 지금도 경기장의 견현지라는 여자는 쓰러진 채 부들거리고 있었다. 안쓰러울 정도로 참혹한 패배였다. 자칫하면 죽을 뻔했다.
‘그보다…… 이 녀석은, 역시 내 예상대로였어.’
고란은 눈만을 돌려 한스 셸을 본다. 아니, 한스의 분신을 본다. 한스의 분신은 행동 패턴이 아카식 레코드에 입력된 AI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카식 레코드는 인류를 비롯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의 지식과 생각 등의 사념이 모두 총집합하여 소용돌이치는 장소. 누가 관리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고란을 비롯한 성천주들은 일단 접근이 가능하다. 그곳에는 성천주들의 기본 행동 패턴에 대한 정보도 있고, 본신과의 연결이 끊기자 한스의 분신이 AI에 걸맞는 행동 패턴을 보이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 해도 지나치게 자연스럽기에 그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 아니면 이변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성천주인 고란조차 긴가민가했었으니.
고란이 한스의 분신을 보며 말했다.
“한스, 아니 한스의 분신.”
“그래, 나 분신이다.”
“AI다운 선택이군. 분신인 걸 손쉽게 인정하다니.”
“본신이 적어둔 지식이다. 나와의 연결이 끊긴 것이 분신 살해 이외일 경우, 자신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나를 죽이지 못할 정도로 몰린 상태라고. 그러니까 마음대로 행동하라고 말이지. 어차피 그 정도로 몰리면 사는 건 불가능하니까.”
“역시 한스의 인성은 구리군.”
“가끔 나를 여장시키기도 하니까.”
“…….”
불쌍하다. 한스의 분신, 그동안 당했을 수모를 생각하니……. 그보다 나르시스트인가? 자기 자신을 사랑했기에 여장시켜서 그렇고 그런…… 토가 쏠릴 지경이다.
“힘들었겠구나.”
“……? 묘하게 상냥해졌는데. 너희 성천주를 비롯한 생명체들은 생명체와 비슷한 것을 보면 불쾌한 골짜기로 괴로워한다고 들었다.”
“아니, 그거와는 별개로 네가 한스에게 당했을 성적인 수치심을 생각하니 눈물이 나서 말이야. 나는 쉽게 남에게 공감하거나 슬퍼하는 성격이 아닌데, 너를 보니 유독 그 생각이 드는군.”
“항문은 내주지 않았어.”
“그걸 생각하는 시점에서 아웃일 텐데.”
“그런가?”
“……아무튼.”
고란이 그때 대회 설비자, 지석이 전해준 이어폰에서 들리는 음성을 듣고 귀에 신경을 집중했다.
그녀의 귀에서 지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관계자 전원에게 발표합니다. 한스는 현재 분신으로 감독석에 가짜를 남겨두고 폭탄 테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현재 지하실에 감금시켜놓은 상태. 분신은 모두 살해하고, 본신인 지하실의 존재는 임의의 헌터가 즉시 살해하는 것으로 결과가 났습니다. 혼란 방지를 위해서 대회가 끝나기 전까지 이 사실은 비밀로 하도록 합니다. 대회가 모두 끝나 시상식까지 이루어진 후, 정부 측에 직접 보고를 할 예정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한스는 현재 분신으로…….]
“그렇다는군.”
고란이 한스의 분신을 보면서 말했다. 한스의 분신은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가짜로서 살다가 가짜로서 죽는 기분은 어떤 기분일까.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닐 것이다. 고란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다른 생각도 든다.
만약 자신이 가짜라면?
이 세상이 거짓된 세상이라면?
뭐 그런 일이 있을 리는 없겠지만, 묘하게 기분 나쁜 것은 사실이다.
설령 이 세상이 거짓이라도 고란은 확신한다.
자신이 여태껏 행동한 모든 것은 글자의 형태로라도 남아 있을 거라고. 자신의 존재 자체가 지워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한스의 분신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목을 잘랐다. 목이 댕그러니 날아가 굴러가다가 스르륵 연기로 흩어져 사라졌다. 곧이어 목과 몸체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깔끔한 최후다.
고란은 거짓된 존재였다 해도 그 죽음에 명복을 빌어주기로 했다.
‘자, 임의의 헌터, 아니 태석. 이제 네가 일을 잘 해결해주기를 빌겠어.’
고란은 안다. 임의의 헌터라고 칭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태석이라고. 태석이라면 분명 이번 사태의 최심부에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고 있을 거라고.
자신이 믿는 태석은 그러니까.
순간 웃음이 났다.
믿는다니? 자신이? 자신 같은 공감 능력이 부족한 막되어 먹은 아가씨가? 태석을?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고란은 자신의 변화에 썩 불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다.
한스는 손이 잘린 상태였다. 중력자로 인한 구속이 약간 느슨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겐세에게 속박당한 상태였다. 손 하나 까닥일 수 없었다. 그리고 대한이라는 미지의 헌터와 시연이라는 변변찮아 보이는 헌터가 자신을 고문 비슷한 것을 하고 있었다.
한스는 두려웠다. 특히 대한이라는 헌터가 뭔가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면서 주문을 외워 공격하겠다고 하는데, 묘하게 말이 되는 소리여서 더 두렵다.
“나랏말씀이 중? 중궈? 음…….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
도대체 뭐하는 녀석이지. 도대체 어떤 주문이지.
“갸냐댜랴먀뱌샤야쟈챠캬…….”
끝날 생각을 않는다. 어마어마한 주문이 틀림없었다. 마법의 주문은 본래 길수록 위력이 뛰어난 법. 그만큼 섬세한 마법의 사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살생을 위한 마법이 섬세해지면, 그만큼 살생에 최적화된 위력이 나오기 마련이니까.
안 그래도 흑염룡을 부린다고 하는 녀석이 긴 주문을 외우다니…… 뭔가 속이 메스껍고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이 대단한 마법에 당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플라시보 효과였지만, 한스는 그런 사소한 사실을 깨달을 만큼 제정신이 아니었다. 실제로 잘린 손에서 나오는 피로 의식이 흐려지고 있기에 더 믿을 수밖에 없었다.
묘하게 시연이라는 헌터가 대한을 보는 표정이 매섭다. 설마하니 마력을 전달해주는 걸까? 세상에는 표정으로 마력을 전달하는 기술이 있다. 대단한 마법의 사용을 위해 시연이 돕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시연을 무시했지만, 시연은 사실 대단한 존재였던 걸까?
도대체 자신은 이런 인물들이 등장하는 대회에서 무슨 짓을 한 거지? 우습다. 악마가 꼬드기지만 않았다면…… 분노의 악마가 신살(神殺)의 방법을 알려준다고 하지만 않았다면…….
애당초 악마들의 목적은 신살이었다. 신을 살해하면 자신을 속박하던 것이 사라져 진정한 권능을 얻게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살의 경우 성천주들도 그 권능의 혜택을 누린다고 한다.
그렇지만 성천주들은 대의적인 목적을 위해 신과 함께 세상의 질서를 회복하자는 축이었고, 그렇기에 한스와는 달리 세상을 구하기 위해 흑수정 정화에 나섰던 것이다.
제기랄, 제기랄! 한스는 자신의 처지가 얄궂었다. 저 대단한 대한과 시연이라는 헌터만 아니었다면…….
“대,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
계속해서 주문을 외우고 있는데, 의식이 흐려 알 수 없지만 뭔가 익숙한 말인 것 같은데……. 어딘가 마법 관련 서적에서 읽은 건가? 뭔지 모르지만 큰일 났다.
한스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대한은 심장이 쿵쿵거릴 정도로 떨렸다.
‘어떡하냐, 태석아. 이제 아이디어 다 떨어져 간다. 아무리 개소리 대마왕이라 해도 5분 내내 개소리는 힘들다고.’
‘굳이 개소리할 필요 없는데.’
가만히 입 다물고 지켜봐도 문제없는 상황이었지만, 시연은 이제 슬슬 대한의 뻘짓이 웃길 지경이라 가만히 있었다. 상상 이상의 헛소리들이 튀어나오는 것이 우스워서 중독될 것 같았다.
“신나게 훌라춤을 추자~.”
시연도 이제 웃긴 나머지 따라서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아예 몸동작도 특유의 웃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대한이 도움을 받자 더욱 신나게 같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좋아요, 시연 씨! 어서 춥시다!’
S랭크 헌터와 동급의 괴물이라 불리는 성천주 두 명이 한 명은 속박당하고, 속박하고 있다.
그 둘과 함께 있는 D랭크 헌터 두 명이 훌라춤을 추는 상황.
그리고 그걸 보며 진심으로 두려운 표정을 짓는 속박 당한 성천주.
대단하다는 눈으로 흐뭇하게 지켜보는 속박하는 성천주…….
뭐라고 해야 할까…….
태석은 어느새 도착해 있었고, 상황을 보면서 자신이 어딘가 지옥에 떨어진 건 아닐까 생각했다.
“뭐하는 거죠.”
어느새 겐세 노르도도 발박자를 맞추며 흥을 돋우고 있었기에 겐세 또한 흠칫 몸을 떨었다.
“도대체 뭔 상황이지…….”
“세상을 구하고 있었어.”
대한이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대한은 역시 헛소리 중이고, 태석은 시연을 쳐다보았고, 시연이 딴청을 피우며 말했다.
“세, 세상을 구하고 있었어요.”
“정말로?”
“진짜입니다.”
뭐, 그렇다고 믿자.
그러면 이제 정리의 시간이다.
태석은 한스 셸을 보고 있었다.
자신은 이 한스라는 인물에 대해 자세한 것은 모른다. 그저 나쁜 짓을 일삼던 녀석이며 세희를 괴롭혔고 폭탄을 설치하던 남자였다는 사실만 안다.
그것만 알아도 나쁜 놈인 건 누구한테 물어도 확답을 받을 수 있잖아. 안 그래?
태석은 그렇기에 한스에 대한 과거는 묻지 않았다. 예전에 악계자 역할을 자처하던 악인도 불행한 과거가 있었다. 그러니 한스라고 없을 리 없다. 그런데 묻지 않는 이유? 간단하다.
태석이 말했다.
“나는 너에게 어떤 불행한 과거가 있는지 몰라. 어쩌면 소중한 것을 잃고 망가진 것이 지금의 너일 지도 모르지.”
그렇기에 태석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너에 대한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쓴다면 너의 심정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을지도 몰라. 하지만 적어도 나는 나, 엄태석을 기점으로 1인칭의 이야기를 진행해왔고, 고로 너를 악인으로밖에 볼 수 없는 상황이야. 이해하고 있어?”
“그래, 이해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만을 알고 사니까. 알 수밖에 없고, 그러고자 하니까.”
그러니까 태석은 자신의 여동생을 살해하려던 한스의 손을 자른 것이다. 한스가 자신의 손을 보았다. 제기랄, 아파 죽겠군.
지하실의 폭탄 원격 조작이 가능하도록 설비해둔 방에 오히려 자신이 다친 채 있는 상황. 폭탄마로서 이름을 알리고 완전한 신살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거라 믿었는데…… 그것은 허상이 되고 말았다. 거짓이라는 소리다. 기분 나쁘다. 짜증 난다. 이 상황을 타개하고 싶다.
하지만 힘이 없다.
그리고 그때였다.
[…….]
한스는 목소리를 들었다.
아니, 목소리가 아니다. 소리긴 소리나 그것은 인간이 내는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올곧고 정확했다. 이런 형태의 목소리는, 한스는 우습게도 인간이 만든 컴퓨터의 인공 음성 장치, 보이스웨어 같은 것에 의해 들은 기억이 난다.
그 정도로 컴퓨터로 만들어진 목소리 같으면서도 그것과 전혀 달랐다. 기술력의 차이가 상상을 초월했다.
뭐지? 외계인이 만든 것인가?
외계인이 만들었다는 말은 과거에는 뛰어난 기술력이라는 의미로 쓰인 것이지만, 현재에 외계인의 존재 유무가 밝혀진 지금, 외계인이 진짜로 만든 거냐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아무튼, 그 정도로 훌륭한 인간 같은 목소리가 한스에게 말했다.
[SYS 알림 - 한스에게 제안합니다.]
“제안……?”
“무슨 헛소리지?”
태석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기에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눈앞의 존재는 사악한 존재, 태석입니다. SYS, Supervisioning Your Society 측에서는 그대의 태석을 살해하고자 하는 욕구에 응답하여 힘을 주고자 합니다. 이 제안을 수락하십니까?]
한스가 히죽 웃었다.
Supervisionig Your Sociey라. 그것의 의미를 직역하자면 ‘너의 세상을 관리하라.’ 정도가 되는 것일까. 직역이 아니라 의역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스는 자신의 해석이 올바르다고 확신했다. 어째서 확신했는지 모른다. 한스는 자신이 확신한 이유가 세상의 규칙이 그러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한스가 손가락을 옮겼다. 눈앞의 Yes를 의미하는 Y 버튼을 누르기 위해, 아카식 레코드를 이용할 때처럼 시스템창에 손을 옮겼다.
그 손은 떨리지만, 조금씩 움직이려 한다. 시간이 멈춰 있었기에 방해하는 자는 없었다.
시간조차 멈추고 SYS라는 기괴한 조직명을 지니고 있으며 자신에게 불길한 제안을 하는 존재는, 대체 뭐지?
아아, 그런 것 따위는 이제 상관없다.
자신은 그저 눈앞의 태석을 죽일 수만 있다면, 수상한 것을 가지고 있는 녀석을 죽일 수만 있다면 만족이다.
그렇기에 버튼을 눌렀다.
손가락으로 꾸욱 하고.
팡.
가볍게 터지는 소리가 났다.
시간이 다시 제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한스의 몸을 가두고 있던 중력자가 일제히 흩어져 사라졌다.
한스의 잘려나간 한 손이 재생했다. 겐세가 소리쳤다.
“큰일 났다! 중력자에서 벗어났어!”
한스가 겐세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뻗었다.
쿵!
주먹이 겐세의 몸을 후려쳐 쓰러트렸다. 태석이 서둘러 천둥을 몸에 담고 전격을 내뿜었다. 한스의 몸에 닿았다.
제기랄, 이놈이나 저놈이나 자신을 방해하려 든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다.
언제나 뭘 하든 돕지는 못하고 방해만 하는 쓰레기들이 밉다.
그렇기에 한스는 숨을 길게 들이켰다. 전기에 몸이 감전되어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겐세가 자신의 입가에 묻은 피를 닦으며 한숨을 뱉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다시 중력을 조작하려 한다. 하지만 한스가 더 빨랐다.
콰가가가강-!
한스가 기적을 흩뿌렸다.
그 어떤 속성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담긴 것은 증오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뿐이었다. 그런 감정이 담긴 기적은 짙은 검은색의 기운을 흩뿌렸으며, 소름이 돋을 정도로 사악한 감정이 겉에서부터 느껴지는 기적이었다.
그것은 더 이상 성천주의 기적이 아니었다.
악마, 아니 악계자 그 자체였다.
태석은 악마처럼 변했던 인물을 안다. 리치와의 전투가 있은 후, 악계자가 등장하여 흑수정을 파먹고 그렇게 변했다.
이번엔 성천주가 변한다고? 설마하니 흔히 신화에서 나오는 타락 천사 같은 것인가?
태석이 사납게 웃었다.
“이제 죄책감은 없다.”
우습게도 한스가 완전히 악계자가 된 이후로 그를 죽인다는 죄책감은 물 씻은 듯이 사라졌다. 애당초 죽어 마땅한 자였다. 태석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에게 명백히 해가 되고 남들을 해치는 존재의 생명까지는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악계자는 지금 여기서 죽는다.”
한스에게 죽음을 선고했다.
파지지지직-!
전격이 태석의 주변에서 팟 하고 터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