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모든 신을 받다-35화 (35/102)

# 35

35. 땅개? 땅거미?

대회 경기장.

코 부분까지 덮는 상의로부터 이어지는 검은 마스크를 쓴 여자였다. 다리와 팔 부분은 새하얀 용과도 같은 문신이 새겨진 바탕이 검고 붉은 옷이었다. 옷은 제법 타이트하게 조이고 있었고, 그에 따라 잘 다져지면서도 곡선이 매끄러운 몸매가 여실히 드러난다.

겐세 노르도 성천주의 부하 헌터, 견현지. 검은 땅개라는 그녀의 별명에 걸맞는 이름이었다. 비록 한자는 조금 달랐지만. 현지는 자신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보다 그녀가 있는 대회 경기장에서 사람들이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기다리고 있는 대상이 나타나질 않는다.

뭘 하고 있길래 오지 않는 거지? 태석이라는 자신의 상대는 약속 시간을 잘 지키는 성실한 청년이라고 들었다. 적어도 그의 학창 시절 친구라면서 인터넷에 나온 인터뷰 기사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설마하니 유명해지면서 빠르게 변절한 것인가?

그런 사람은 언제나 있다. 유명해지면 본색을 드러내는 사람. 보통 정치인들이 그렇다고 하지만 사실은 환경이 인간을 만드는 것이다. 환경이 변하면 사람은 변한다. 그러니 태석 또한 변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멋대로 생각하던 현지는 자신의 눈앞에, 건너편 대기실을 통해 들어오는 남자를 보았다.

태석.

태석이 페트병으로 병나발 불 듯 이온 음료를 전부 비웠다. 방금 전 대회 때 페트병이 바닥나 다시 배치해둔 것인데 그것조차 새것을 뜯어 다 마신 것이다.

태석이 페트병을 건너편에 집어 던지고, 비바람을 몰아붙이며 하늘을 날아 단숨에 땅으로 포물선으로 낙하하듯 떨어져 현지의 앞에 섰다.

“5분.”

태석이 말했다.

무슨 소리지? 5분이라니? 갑자기 시간을 말하다니, 재수 없다. 현지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무슨 소리죠? 설마하니 5분 안에 저를 무찌르겠다는 건가요?”

“5분이면 돼. 빨리 쓰러져.”

“······.”

현지는 긴장했다.

지금 태석의 눈빛. 보통이 아니다. 마치 살인귀를 마주해서 살아남기 위해 난동을 부리는 피해자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실제로 강하고 단련되어 있기에 살인귀를 단숨에 무찌를 수 있는 격투기 선수를 보는 느낌. 어디로 생각하나 정상이 아니다. 아니, 비정상 정상을 논할 때의 정상이 아닌, 하늘 꼭대기에 서 있는 정상을 마주한 것 같았다.

현지가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시작해볼까요.”

그때였다.

반짝!

현지의 주변, 아니 필드 전체에서 새하얀 빛의 선들이 모여 있었다. 태석이 눈을 돌리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이건······.”

“그렇습니다. 제 이름은 현지. 저는 땅개라는 별명이 있어요. 그 이유는 간단해요.”

현지가 입꼬리를 올렸다.

“사실 저는 땅거미처럼 마력의 실을 거미줄처럼 쓰고 있거든요.”

“그래서 별명이 왜 땅개지?”

“······?”

현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태석이 한숨을 뱉으며 말했다. 시간이 없는데 이 녀석은 굳이 대화를 늘어트리는 것인가. 마음이 급했기에 짜증이 난다.

“땅거미와 땅개는 다르잖아. 어째서 땅개지? 설마하니 숨겨둔 능력이 있는 건가?”

“그렇······ 네요.”

현지가 그제야 충격받은 표정으로 눈을 꿈벅이다가 말했다.

“분명 땅거미여야 할 텐데, 왜 땅개지······?”

어째서 땅개인 거냐. 자신은 거미처럼 멋지게 마력의 실이라는 것을 이용해 무궁무진하게 싸울 수 있는데. 왜 멋없게 별명이 땅개인 거냐? 자신의 동료들이 땅개라고 부르는 이유가 뭐였을까. 충격이다. 눈동자가 떨리고, 초점이 잘 안 맞는다. 그 정도로 충격이다.

태석이 한숨을 뱉었다.

“아무튼 됐고.”

“잠깐만요. 제가 왜 땅개죠? 그 이유가 분명 있을······.”

“아니,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태석이 천둥을 일으키기 위해 눈가에 푸른 전기가 샘솟고, 곧이어 온몸에 푸른 전기가 맴돌았다.

파직, 파직, 파지지지지지지직!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거미줄 같은 마력의 실들이 일제히 반응을 일으키며 미친 듯이 날아가 태석을 향해 돌진했다. 태석의 팔을 묶고, 다리를 묶었다.

뭐야? 설마하니 태석과의 싸움을 대비해 현지라는 녀석이 미리 준비해둔 것일까?

현지가 입꼬리를 올렸다.

자신의 뜻대로 되었다.

“천둥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전기를 다루는 힘. 마력의 실에는 다양한 성질의 마력을 이용할 수 있어요. 그 방법은 무궁무진하죠. 아직 잘 알지는 못하지만, 분명 이걸로 인간조차 조종할 수 있는 기술을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천둥에 닿으면 그 천둥을 일으킨 대상을 묶기 위해 돌진하는, 그런 능력으로 마력의 실을 퍼트릴 수 있는 거죠. 이걸 연구하기 위해 겐세 님에게 얼마나 아부했는지 몰라요.”

“아부?”

“스킨십해서 따낸 기술이죠. 이게 바로 미인계라는 겁니다! 전 너무 똑똑해서 미인계를 쓸 수 있거든요.”

“······.”

똑똑하다라. 몇 마디 대화도 나누지 않았는데 멍청한 것은 알겠는데.

그런 건가? 자신이 똑똑하다고 착각하는 자신감 넘치는 여자인 건가? 어쩌면 땅개라는 별명도 그걸 놀리기 위해 친한 동료들이 장난치듯 부르는 것이고, 현지는 멍청하게도 속아 넘어간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제 어쩐다.

태석은 현재 거미줄 같은 마력의 실에 묶인 상황이고, 팔다리가 전부 고치처럼 줄줄 묶여 있다. 마치 나비 같았다. 5분 안에 처리해야 하는데 시답잖은 대화와 싸움 탓에 1분을 소요한 상황이고······ 그래, 그거다.

자신에게는 지석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지석은 자신에게 많은 능력을 보여주었고, 그걸 자신은 그대로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소화 가능하다.

로키의 힘으로.

태석의 눈에서 푸른 전기가 거두어졌다. 녹색의 안개가 퍼져 나왔다.

현지가 긴장했다.

뭘 하려는 거지?

“자, 똑똑한 아가씨. 이제부터 시작될 지옥에 감탄하도록 해. 5분 안에 끝내야만 하니까.”

태석의 발언이 모든 이들의 귓속에 울려 퍼졌다. 어느새 대형 마이크 장치를 대회장에 달아놓아 태석의 목소리가 전국 방송에 송출되고, 대회장 전체에 들렸다. 모든 이들이 태석의 말에 감탄했지만, 대회장 어딘가의 여동생이 눈을 가리고 생각했다.

‘오빠······ 몰리면 몰릴수록 자기도 모르게 중2병 같은 말을 한다고는 하지만······ 세계가 멸망할 일이라도 있는 거야? 무슨 지옥이고 5분이야······.’

게다가 더 무서운 건 그것을 자신이 자각 못 한다는 것이다. 거의 평생 동안 자신이 그런다는 걸 모르고 살았고, 부끄러워한 적도 없다. 오히려 그 상황이 오면 다시 그렇게 말할 거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태석을 어찌해야 좋을지, 여동생은 솔직히 걱정이 앞섰다. 그보다 방송에 송출되기까지 했으니······.

뭐, 태석이 알아서 잘할 것이다.

여동생 태희는 엄태석을 믿는다.

태석은 히죽 웃었다.

[로키가 날렵하게 태석에게 강신합니다.]

파아아앙-!

녹색의 안개가 터져 나와 주변을 아득하게 메웠다. 견현지가 인상을 찌푸리며 녹색의 안개에서 퍼져나오는 독기에 마스크를 더욱 깊게 썼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지? 분명 녹색의 안개를 쓰며 변신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는 정보를 들었는데…… 뭔 일이 벌어지는 거야?’

설마하니 또다시 변신을 하는 것일까? 그 변신에 대해서 여러 사람들이 아이템을 쓴 거다, 성천주의 기적에 의해 가능했던 거다, 라고 말이 많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성천주의 직접적인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지금, 게다가 고란이 대회 감독실에서 구경을 하고 있는 지금, 기적을 써서 도와줄 일은 없다. 사실 겐세와 태석은 이제 아는 사이였지만, 현지는 태석이 고란과만 안면이 트였다고 아는 상황이다. 그러니 더욱 성천주의 힘으로 변신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뭐지? 변신의 징조를 왜 보이는 건데.

아아, 블리프인가.

허세였던 것이다. 현지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역시, 허세를 많이 부리시는군요. S랭크 헌터니까 뭐든지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생각하면 오해하지 마세요. 아무리 S랭크여도 경험이 없으면 F보다 못하니까요.”

“너는 몇 랭크인데?”

“F!”

"……그래, 너 잘났다.“

묘하게 시크하다. 현지는 묘하게 급해서 대충대충 지껄이는 태석의 말투에 빠져드는 느낌이 들었다.

‘헙.’

정신 차리자. 나쁜 남자에게 반해서 고백했다가 차이고 모태 솔로로 산 지 25년. 더 이상 남자에게 반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 정신 차리고 눈앞의 적, 태석을 무찌르자.

태석이 허세를 부린다고 판단하고 현지는 서둘러 마력의 실을 생성할 준비를 했다.

아직 현지는 마력의 실을 연구 중이었고, 개발이 더딘 상황이다. 그 와중에 겐세가 직접 중력자를 다루는 기적을 이용해 도구를 하나 만들어줬고, 마력을 강제로 압축하여 마력의 실의 형태로 얇게 만드는 장갑을 만들어주었다.

물론 장갑이라기엔 기능적인 문제로 온몸에 덮어쓰듯이 입고 있는 검은 쫄쫄이였지만.

부끄러워서 나름대로 문신 같은 걸 잔뜩 새겼는데, 가끔 자신의 기사에 댓글로 사람들이 성추행에 버금가는 변태 같은 댓글을 달 때는 머리가 어질거릴 지경이다.

어쨌든, 검은 장갑에서 마력의 실이 뿜어 나왔다. 그리고 태석을 향해 돌진했다.

마력의 실의 성질은 간단히, 삼투압의 현상과 비슷하게 마력이 강한 쪽으로 쏠리는 현상을 이용해 다시 묶는 것이다. 태석이 S여서 F인 현지보다 더 마력의 농도가 짙다. 그러니 당연히 태석에게 마력의 실이 꽉꽉 묶일 것이다.

‘이것이 최약인 나에게 어울리는 마력.’

마력의 덩어리가 팡 하고 터지며 장갑으로 쏠려 마력의 실을 길게 늘어트렸고, 그 마력의 실을 조종하여 태석의 몸을 묶기 위해 돌진했다. 이미 묶인 상태이며, 녹색의 안개를 흩뿌리는 태석의 몸에 마력의 실이 다시 묶였다.

마력의 실이 두 종류가 묶인 상태이다. 이걸 풀려면 적어도 뛰어난 실력의 성천주가 기적을 행사해야 할 것이다. S랭크였기에 마력의 실의 강도가 더욱 강해진 것이다.

현지의 스타일은 이랬다. 강하면 강할수록 강해지고, 약하면 약할수록 약해진다. 그래서 F임에도 불구하고 기사가 뜰수록 유명해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태석이 더 대단하다.

콰직. 콰직.

태석의 머리카락이 마치 지석의 것처럼 길어졌다. 그리고 외모는 더욱 가냘프게 여리게 변했다. 가슴은…… 이런, 현지보다 더 크다. 현지는 왠지 모를 패배감을 느꼈다.

도복이 아닌 보이쉬한 면티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태석이 나름대로 커스터마이징하듯이 설정하여 변신한 것이다. 물론 남녀 변경이 불가능했고, 무조건 여자만 가능해서 여자로 변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관람석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태순이가 등장했다아아아!”

그 소리를 듣고 태석이 인상을 찌푸렸다.

태순이라고? 태석을 여자 이름처럼 바꾼 건가? 그보다 웃기지도 않는 농담이다. 그보다 현지의 표정이 묘하게 웃고 있는데, 뭔가 흐뭇해 보이는 표정이 기분 나쁘다.

곧이어 관람석에서 소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태순! 태순! 태순!”

“예쁘다!”

“사겨줘요!”

태석은 몰랐지만, 어느새 인터넷에는 태석이 지석의 여성체로 변신했을 때의 사진이 올라왔고 그때의 미모에 반한 사람들이 태순이라고 별명을 지어주었다.

수많은 팬픽과 팬아트가 쏟아졌지만…… 태석은 인터넷을 잘하지 않았기에 모르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이제 알게 되었다.

태석은 인상을 찌푸렸다. 현지가 놀리듯 말했다.

“예쁜데요, 언니?”

“시끄러워요.”

목소리도 현지보다 더욱 예쁘장한 여자 목소리라 더 억울하다. 현지를 이기려면 로키의 힘을 쓸 수밖에 없는데, 현지가 놀리니까 기분이 더러웠다. 하지만 별수 없다.

‘어서 이기자. 관중들을 구해야지.’

“태순! 우윳 빛깔 태순 누나!”

“태순 씨 예뻐요!”

‘…….’

그냥 내버려 둘까. 솔직히 기분이 너무 나빴다. 하지만 인간의 목숨과 한순간의 부끄러움의 경중의 차이는 명백했다. 반드시 현지를 무찌른다. 그리고 다시 지하실로 돌아가 범죄가 증명된 한스 셸을 살해한다.

그러니 시작이다.

“현지 씨, 빨리 기권하는 게 좋을 겁니다.”

“태순 언니, 저는 기권하지 않아요. 이길 수 있거든요. 제가 다 예측해뒀어요. 노력도 많이 했고.”

“그러든가 말든가.”

팟!

태순, 아니 태석이 발을 내딛었다. 현지가 긴장했다.

어쩌지. 뭘 해야 할지 감이 안 오는데?

저런 모습으로 변했을 때의 싸움 영상을 방금 전에도 세 번 정도 돌려 보았는데, 나온 정답은 저렇게 변신하면 깔끔하게 포기하고 기권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동료들이 말했고, 겐세가 말했다. 하지만 현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었고, 지금도 그렇게 말할 것이다.

“포기하지 않아요!”

쾅!

그때 태석의 주먹이 현지에게 닿았다. 아니, 닿지 않았다.

중력자가 현지를 덮쳤다.

현지의 몸이 하늘로 치솟았다. 피가 토해져 나와 공중에 흩뿌려졌다. 태석이 현지의 몸을 위로 올려친 것이다. 직접 닿지 않고 중력자를 이용해서.

그 중력자에 의해 공중으로 치솟은 기분은 솔직히 말해 나쁘기 그지없었다. 나쁜 정도가 아니다. 무서워서 오줌을 지릴 정도였다. 다행히 지리지 않은 것이 현지의 인격체로서의 자부심이었다. 그 정도만이라도 자부심을 지킨 거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위력.

눈물이 핑 돌았다.

허리가 반으로 꺾이는 느낌에 타들어 가는 기분이다. 실제로 일반인이 맞은 거라면 기분이나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 벌어진 일일 것이다.

현지의 옷이 타들어 갔기 때문이다. 중력자의 막대한 에너지가 현지의 옷을 타게 만들었다. 쫄쫄이 검붉은 바탕에 용 모양의 하얀 문신이 새겨진 옷이 일부가 타들어 가고, 아슬아슬하게 성인 매체에서 나올 법한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현지의 몸을 내려찍으려 할 때, 태석의 귓가에 경고음이 들렸다. 방송을 통해 경기장 내부로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이다.

[이 이상의 전투는 금지합니다!]

[불필요한 살생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태석의 완승. 태석의 완승입니다!]

[태석, 4강 진출!]

“와아아아아아!”

함성이 들리는 직후.

태석은 서둘러 대기실로 도망치듯 달려갔다.

도망치는 게 아니다. 지하실로 향하는 것이다.

한스 셸 사건을 마무리 짓기 위해.

그것을 관람석에서 지켜보던 여자가 있었다.

바로 한스 셸의 부하 헌터이자 학대를 받는 불행한, 언데디에이션이라는 사실상 불치병의 소유자, 세희.

세희가 태석이 수상했고, 쫓아가기로 했다.

한스 셸이 태석이 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쯤 행동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분신이 본신의 제어를 잃고 AI식의 자아를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었기에 더 이상 세희를 괴롭히지 않던 것이다. 보통이라면 오늘 10번 정도는 괴롭혔을 텐데, 한 번으로 끝난 것이다.

명백히 이상한 일.

‘뭔가 있어.’

태석을 쫓아가야 한다. 세희가 서둘러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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