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모든 신을 받다-27화 (27/102)

# 27

27. 대단한 녀석

태석과 대한이 서로 간의 정정당당한 대결을 펼치자는 의사를 주고받을 때, 고란은 천천히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다.

‘귀찮아. 정말이지…….’

지석이 자신에게 대회의 개최식에 나와달라고 간절히 부탁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태석이 참가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참여하지 않을 대회였다.

아이언 월드 대회라니. 무슨 작명 센스가 이 모양이란 말인가.

물론 대회명의 유래는 강철 길드가 세상으로 뻗어 나가겠다는 의미였다. 어감만 살려 대회명으로 정한 것이라지만…… 솔직히 이상한 느낌의 대회명이긴 했다.

특히 불만이 있으면 가감 없이 표현하는 고란은 더욱 그렇게 느꼈다. 오죽하면 지석에게 대회명 좀 똑바로 지으라고 한소리를 했겠는가.

‘일단 참여하기로 했으니 감독이라도 좀 봐야겠군.’

잘생긴 남자는 만점. 못생긴 남자는 빵점. 그리고 시연을 제외한 모든 여자는 빵점이다. 그렇게 미리 결과를 정해놓기로 마음먹은 지 오래였다.

그녀의 성격은 원래 제멋대로에 괴팍했으니까. 애당초 그런 성격인 걸 알면서도 초대해버린 지석이 나쁘다.

그래, 그런 거야. 성천주 고란 홀, 그녀는 문제가 전혀 없다.

‘어쩐지 대회 참여자들이 불쌍하긴 하지만…… 애당초 나 때문에 좌절될 녀석 같았으면 진작 좌절됐겠지.’

시연이 그렇게 생각하며 복도 모퉁이를 돌아가려 했다. 이 모퉁이를 돌면 성천주를 비롯한 감독관들의 종합 대기실이 나오고, 그 대기실을 지나면 곧바로 대회 경기장의 1등 관람석으로 연결된다. 그 관람석에서 성천주들은 자유롭게 관람하고 평가를 내리고, 괜찮다 싶은 신참 헌터들은 스카웃하여 자신의 헌터로서 활약하게 한다.

성천주는 흑수정을 정화할 수 있는 유일한 자들이고, 헌터들은 괴수를 무찌르는 데에 아주 효율적인 전투 병기다.

병기와 정화자. 그 둘은 이 흑수정과 괴수가 난립하는 세상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다.

그렇기에 많은 성천주들은 이 대회나 다른 대회에서 헌터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곤 한다. 헌터에 관심이 없는 고란이 특이한 것이다.

어쨌건, 길모퉁이를 돌려 했고, 순간 소음이 들려 멈추었다.

“그래, 정말로 아름답다고. 너 말야. 특히, 그 코가 너무 귀여워.”

능글능글하고 부드러운 말투. 고란은 지금 길모퉁이를 지나면 서 있을 남자를 잘 안다.

같은 성천주이며, 가장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란은 모든 성천주와 사이가 그닥이지만, 특히 지금 능글거리는 말투의 성천주와는 앙숙 관계였다.

‘지금은 무시하자.’

갈 길이 바쁘니까. 무시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고란은 이런 대회 감독이 처음이다. 성천주로서 해야 할 일을 아직 숙지하지 못했다. 대기실에서의 연습은 필수였다.

그런 이유로 무시하기로 했지만…….

지나가면서 보이는 잘생긴 남자 성천주와 평범하게 예쁘장한 여자 둘이 보였고, 여자가 말했다.

“성천주 오빠, 그러면 오늘 대회 끝나고 같이 밥이나 먹을래?”

“…….”

고란은 머리에 핏줄이 돋는다는 착각이 들었다. 도대체 저런 놈이 뭐가 마음에 든다고 온갖 여자들이 현혹되어 그에게 치근덕거리는 것일까.

게다가 성천주 남자 또한 웃겼다.

“그래? 그러면 오늘 저녁에 같이 술이나 마시자고.”

“…….”

뭔가 화가 난다. 알 수 없지만 남자의 그 능글맞은 말에 화가 치솟았다.

고란이 고개를 돌려 여자와 남자 쪽을 바로 근거리에서 노려보았다. 남자 성천주가 부드러운 말투로 여자 하나의 턱을 손으로 지긋이 잡은 채 능글맞게 말했다.

“밤새도록 말이야.”

“……겐세 노르도!”

쾅!

고란이 주먹을 휘둘렀고, 겐세 노르도는 옆구리를 맞아 벽에 틀어박혔다. 벽에 틀어박히자 벽에 커다란 웅덩이 같은 구멍이 생겼고, 거기에 사람 모양의 구멍을 뚫은 채 퍼즐 조각 마냥 붙어 있는 겐세가 겨우겨우 몸을 가누며 벽에서 빠져나왔다.

콰득 콰득 소리를 내며 벽면이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여자들이 그 장면을 보고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고, 도망쳤다.

겐세가 여자들을 힐끔 보다가 한숨을 뱉으며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왜 그러는 거야? 내가 다른 여자랑 노는 것에 질투라도 느끼는 건가?”

“이 발정난 돼지야. 매번 여자를 돈과 권력으로 현혹시키며 계집질하는 것도 정도껏이지.”

“내가 하는 행동을 이해 못 하나 보네. 그러면 너도 이렇게 놀아보면 이해할 수 있을 거야. 꽤나 재밌거든.”

겐세가 금발 머리를 뒤로 넘겼다. 곱슬거리는 금발이 뒤로 넘어가자 부드럽고 유순한 이미지는 온데간데없고 날카롭고 사나운 미청년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런 그는 미소를 거두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물론 그런 여자들이 굉장히 우습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지만, 비어 있는 마음을 채우려면 그런 여자들로도 충분하지.”

“……그러냐.”

그런 것일까. 고란은 겐세의 진지한 고뇌 섞인 발언에 할 말이 딱히 없었다.

겐세는 언제나 여자들을 돈과 권력을 이용해 꼬드겨 계집질을 하는 방탕한 생활을 하기로 유명했으며, 한국의 플레이보이 성천주라는 오명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나름의 고민이 있었던 걸까.

‘그러고 보니 겐세를 진짜로 좋아하는 것 같던 여자는 없었지.’

뭔가 안쓰러웠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것은 방탕한 생활을 하는 플레이보이 성천주, 겐세 노르도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겐세 노르도가 히죽 웃으며 천천히 고란 홀에게 접근했다. 고란은 겐세의 앞선 발언에서 은근히 마음이 열린 상태였기에 얼결에 그 접근을 허가했다.

‘히끄으윽.’

속으로 딸꾹질을 수없이 하며, 겐세가 벽으로 고란을 밀어붙이며, 이내 잘생긴 얼굴을 들이밀며, 고란의 옆에 손 하나를 척 하고 들이밀어 벽에 손을 가져다 대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뭐, 뭘 하려는 거야…… 설마……?”

“이런 나를 가까이서 지켜봐 오고, 많은 참견을 해왔던 너라면 이해해주지 않을까 싶어. 안 그래, 고란?”

“……으, 아, 어…….”

겐세가 상냥하게 웃으며 그 잘생긴 얼굴을 천천히 가까이 가져다 대기 시작했다.

고란은 온갖 생각을 했다.

이걸 어떻게 하지? 막아야 한다. 하지만 선뜻 손이 밀쳐지지 않는다. 마법이나 기적으로 막힌 것이 아니다. 그보다 근본적인, 어떤 마음에 의해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겐세의 접근을 허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지만 이러면 안 되는데. 하지만 왜 안 된다는 거지? 고란은 딱히 남자친구도 없고, 애인도 없으며, 나름대로 애인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텐데. 잠깐, 애인이 없다는 생각이 어째서 지금 드는 거야······? 그러니까 저 녀석 말고 다른 남자라면, 하지만 대체 누가? 설마.

아아.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왠지 모르게 신이 연상되는 그 얼굴.

됐다.

드디어 움직일 수 있다.

정확히는 움직일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고란의 표정이 굳고, 분노한 표정으로 주먹을 들이밀었다.

“이 개자식이 어디서 수작이냐……!”

쾅!

겐세 노르도가 다시 벽으로 날아가 박혔다. 아까와는 다른 모양으로 벽에 구멍을 새겼다. 마치 부처의 불상처럼 두 동작으로 구멍이 중첩되어 파져 있는 것을 보니 만화 속 한 장면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겐세가 한숨을 뱉으며 벽에서 빠져나왔다.

고란은 역시 힘이 강하다. 겐세는 자신보다 강한 고란의 신체 능력이 나름 부러웠다. 하지만 동시에 아까웠다. 저렇게 아름다운데, 힘으로 제압하는 멋진 일을 할 수 없다니? 겐세는 고란이 조금만 더 밀어붙였으면, 그리고 자신이 힘이 더 셌으면 넘어왔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더욱 아깝다.

“조금만 더 했으면 네가 넘어왔을까?”

고란이 고개를 저었다.

“전혀 아니거든.”

겐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긴 하지.”

고란은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 겐세 또한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벌써 몇 번이고 구애했지만, 매번 거절했던 그녀였으니까. 그래도 이번에는 제법 많이 밀어붙였는데…….

‘아직 멀었나.’

그 생각을 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대기실 문 쪽을 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고란.”

“왜 그러지?”

문득 생각났다. 고란이 최근 한성 놀이공원에서 A랭크 괴수 리치와 싸우고, 흑수정을 정화했다고. 게다가 그 중추에는 신입 헌터 태석이라는 자가 있었다고. 태석은 고란의 헌터인 것일까? 수년간 시연을 제외한 그 어떤 헌터도 부하로 받아들이지 않은 그녀가? 그렇기에 물었다.

“너는, 성천주로서 부하 헌터를 받아들이지 않을 생각인 거야?”

“그걸 갑자기 왜 묻지?”

“아니…… 보통 성천주들은 자신의 부하 헌터들을 갖잖아? 그런데 너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어 보였거든. 그런데…….”

“태석 씨 일 말인가.”

“그래, 엄태석. 아니, 잠깐…… 태석 ‘씨’라고?”

겐세가 살짝 놀란 눈을 했다.

고란은 여태껏 누구를 존칭한 적이 거의 없었다. 성천주치고도 심하게 안하무인적인 태도를 일관했기에, 그런 그녀가 누군가를 존경하는 일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태석에게 존칭을 붙였다. 그것도 신입 헌터에게.

고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태석 씨. 그분이 리치를 잡았을 때 같이 있었으니까 부하 헌터로 할 생각이 있는 것 아닐까, 생각이 든 거지?”

“그…… 렇긴 한데.”

겐세는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아 말을 얼버무리듯이 했다.

고란이 싱긋 웃었다.

“태석 씨는 그 누군가의 소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성천주의 도구로써 쓰이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유용한 일, 그런 일에 쓰여야 하는 헌터라고 생각하거든.”

“유용한 일?”

“예를 들어 세상을 구한다거나, 세상에 큰 획을 긋는다거나.”

“아무튼, 영웅적인 뭔가를 해야 한다는 거구나.”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러면 다시 본론으로 넘어가서, 너는 부하는 안 받아들일 거야?”

“응.”

고란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나는 부하는 안 받아들여. 시연으로 충분해.”

“그렇다면 이유를 물어도 될까?”

“내 부주의로 누군가를 잃는 건 두려우니까. 그래서 아예 책임질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헌터는 필수적으로 두어야 할 한 명만 두고 있는 셈이지.”

“……이제야 이유를 말해주네. 뭔가 좋은 일이라도 있나 봐?”

고란이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생길 예정이거든.”

과연 이번 대회에서 태석이 어떤 대단한 성과를 낼 것인가, 그것이 무엇일지 상상만 하는 것으로도 고란은 미소가 빙긋빙긋 새어나왔다.

“그래? 뭔 일일지 궁금한데.”

“앞으로 알게 될 거야. 그러면 나는 먼저 가도록 하지.”

대기실로 고란이 들어갔다. 겐세는 좀 더 복도에서 시간을 죽이다 들어갈 예정이었다.

그리고 겐세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복도 끝쪽에서 어떤 여자가 혀로 입술을 핥으며 겐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의 의미는 분노도, 증오도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긍정적인 의미의 시선은 아니었다. 뭔가…… 욕망을 품은 시선이었다.

그런 그녀가 혀로 입술을 핥으며 악마의 표식인 날개를 감추고 엉덩이를 살랑거리며, 몸매를 자랑하듯이 천천히 겐세 쪽으로 걸어왔다.

그녀의 이름은 스카이 할 블랜드. 색욕의 악마였다.

‘태석이라는 녀석은 정말로 대단한가 보네.’

스카이는 겐세와 고란의 대화에서 들은 태석이라는 인물에 대해 더욱 고평가하기로 했다. 성천주 녀석들이 고평가할 정도면, 대단한 헌터라는 뜻이니까.

‘그러면 성천주의 정기는 어떤 맛일지 알아보도록 할까.’

그녀가 움직인 이유는 별거 없었다. 헌터들과 성천주들의 정기는 맛이 좋았고, 헌터들과 성천주들이 잔뜩 모이는 아이언 월드 대회에서 몇 명의 정기를 흡수할 생각이 들은 것이다. 즉흥적인 욕망에 의한, 짐승 같은 행보였다.

‘하아, 하아.’

벌써부터 흥분된다. 스카이의 볼이 붉게 상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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