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26. 가벼운 질투
시연은 깁스를 한 채 햄버거의 봉투를 뜯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손이 불편한지라 쉽게 떼어내기가 어려웠다.
“음.”
불편하다. 시연은 스스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다친 자신의 푼수 같음을 저주했다. 물론 자신의 능력으로 최선을 다했으나 다치고 만 것이지만, 동시에 그건 자신이 약한 탓이기도 하다.
리치는 강했고, 시연은 속수무책으로 당했으며, 그런 강한 리치를 태석은 단숨에 처리했다.
놀라울 정도로 강한 남자다. 태석의 옆모습을 보며 나름대로 감탄을 하고 있을 때였다.
시연이 태석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기에, 태석은 시연이 자신에게 뭔가를 바라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렇기에 시연을 힐끔 보아 상태를 스캔했고, 고개를 마음속으로 끄덕였다.
햄버거 봉지 뜯기가 힘든 모양이야.
태석은 시연의 햄버거를 통째로 가져가 봉지를 먹기 좋게끔 풀어헤치고 시연에게 건네주었다.
“아…….”
딱히 그걸 원한 건 아니었는데. 시연은 뭔가 부끄러운 기분이 되어 입으로 햄버거를 먹기 시작했고, 대한은 살짝 언짢은 기색을 보였다.
“뭔가 내가 빠져줘야 할 것 같은데.”
“무슨 소리야?”
태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고, 대한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너처럼 눈치 없으면서도 여자 잘꼬시는 놈은 드무니까. 천연이라고 봐도 될 테지.”
대한은 태석이 부러우면서도 동시에 기괴한 남자라고 생각했다. 항상 보면 여자들에게 아무런 이유 없이 잘 대해줄 때가 있고, 여자는 태석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하지만 정작 태석은 그런 호감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그저 잘 모르고 지나간다. 그런 식으로 수년을 보아온 결과, 이 녀석은 태생적 카사노바이자, 태생적 부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카사노바와 부처. 어찌 보면 상극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대한은 몰랐지만, 신을 가두면서 동시에 신을 다루는 그의 능력은…… 태석의 본질적인 성질과 크게 다르지 않은 능력일지도 모른다.
대한과 태석, 시연이 햄버거를 대충 욱여넣고 봉지를 비웠다. 그 와중에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주로 리치를 잡을 때의 일과 태석이 은호를 잡을 때의 일이었다.
시연이 문득 태석에게 물었다.
“그런데 능력이 정확히 뭐예요? 이제 슬슬 알려줄 때도 되지 않았어요?”
“글쎄요……. 여러 사람들을 돕는 자의 능력?”
태석이 능력을 밝히고 싶지 않았기에 두루뭉술하게 표현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신은 인간을 도우기도 했으니까. 그 신의 능력을 쓰는 거니까 말이다.
하지만 전혀 의미를 알아채지 못한 대한과 시연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태석이 콜라를 비웠다.
쭈우욱-.
콜라 빨대에서 기포 빠는 소리가 났다. 시연이 대한에게 말했다.
“태석 씨는…… 항상 저렇게 말이 없으신가요?”
“말을 없는 편인데…… 한마디 하면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죠. 그래서 별명이 트러블 메이커였던가 해요. 저 녀석은 태풍의 눈이고, 그 주변이 폭풍처럼 난리가 나는 거죠.”
“아아…….”
시연은 왠지 알 것 같았다. 태석이 온 뒤로 많은 변화가 생겼으니까.
태석과 함께 간 D랭크 괴수들이 상주하는 사냥터의 보스가 A랭크였다.
기존에 같은 랭크의 괴수들은 한 사냥터에 모여있고, 다른 랭크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규칙이 깨진 것이다.
그 외에도 성천주 고란 홀이 태석이라는 인간을 인간 중 최초로 대접해준 거라던가. 변동이 많았다.
심지어 태석이 헌터로 각성할 때는 흑수정이 등장하자마자 괴수가 튀어나오기까지 했다.
‘왠지 태석 씨가 등장한 이후로 상황 면에서 많은 게 변화하는 걸지도 몰라.’
그 끝에 뭐가 있을지, 심히 걱정되면서도 기대가 되었다.
어쩌면, 이 괴수들이 튀어나오는 지긋지긋한 세상에 종말이 오는 것 아닐까 하는 기대. 이제 더 이상 괴수에게 소중한 것을 잃는 불행한 사회가 아니게 되지 않을까 하는.
시연이 그렇게 생각의 생각을 거듭하며 시간을 축낼 때였다.
“여기 쳐 모여 있었네. 그리고…… 계셨군요, 태석 씨.”
과격한 어휘 표현과 태석에게만 유독 상냥한 목소리와 말투.
“고란.”
성천주 고란 홀이 태석 일행에게 다가와 있었다.
태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보다, 대회 개최식 준비하신다면서요?”
태석은 알고 있었다. 성천주들 몇 명이 강철 길드에서 열리는 아이언 월드 대회에서 개최식에 참석한다고. 일부는 심사를 맡기도 한다고 말이다. 그렇기에 성천주 고란 또한 참석할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있었고, 적어도 대회 개최 때 볼 확률이 높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느긋하게 대회 열리기 몇 분 전에 칸타로스에 방문하다니? 태석으로서는 햄버거를 먹는 성천주란 상상하기 힘든 종류의 모습이었다.
고란이 시연이 먹던 콜라를 뺏어서 얼음까지 모두 씹어 먹었다.
“아, 아, 자, 잠…….”
콜라를 먹고 싶었던 것인지, 눈물이 글썽거리면서도 자신의 성천주이기에 쉬이 뭔가 불평을 할 수도 없었다. 시연은 별수 없이 시무룩하게 완전히 비어버린 콜라컵을 보고 있을 뿐이다.
“으으…….”
안쓰러울 정도였다. 태석은 다음에 시연에게 콜라를 선물로 줄까 생각했고, 고란이 그때 말했다.
“뭐, 성천주가 하는 일은 대본 읽고 대회 구경하고 평가하는 일뿐이니까요. 그전까지는 자유행동. 간만에 놀고 있는 중이죠.”
“보통 성천주님은…… 뭘 하고 놉니까?”
태석이 문득 궁금해서 물었다. 성천주들은 대체로 고상한 취미를 가지고 있다는 이미지였다. 영국의 공주나 왕자 같은 이미지였기 때문이다. 아마 십자수나 체스 등의 귀족 문화를 즐기지 않을까 생각했던 터였지만…….
“축구.”
“……?”
“아니면 농구. 공 다루는 운동을 좋아합니다.”
태석이 문득 위아래로 훑어보고 말았다. 150은 될까 말까 한 작은 키, 15살은 되어 보이는 어리숙한 외모, 게다가 영국 소녀 같은 유약한 이미지.
그런 성천주 고란이…… 농구나 축구라…….
“그렇군요…….”
대한이 그렇게 말하는 태석을 향해 말했다.
“지금 나랑 똑같은 생각하고 있지.”
“응. 그런 모양이야.”
말도 안 된다. 무슨 취미가 외양과 이렇게 다르단 말인가. 물론 외양으로 모든 걸 평가해서는 안 되지만, 이미지라는 것이 있다. 태석과 대한은 서로 마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한번 구기 종목으로 싸워보자.’
태석과 대한은 약간의 자존심을 걸고, 15세 영국 소녀의 인상인 성천주 고란과의 승부를 기약했다.
물론 본인에게는 허락받지 않았지만.
고란이 그 표정에서 뭔가를 눈치챈 것인지, 쓰게 웃으며 태석에게 말했다.
“뭐, 이상하게 여길 수도 있겠죠. 나중에 같이 스포츠 해봐요.”
그리고는 대한을 보면서 표정을 바꾸었다. 사납고 매서운 맹수 같았다. 물론 외양이 귀여워서 새끼 고양이를 보는 인상이다.
“그리고 헌터 나부랭이, 네 녀석을 농구공으로 터트려주마. 나를 무시하는 발언을 하다니.”
“아, 아니 아무 말도 하지 않…….”
“표정 보면 알아, 새꺄.”
“죄, 죄송합니다앗!”
대한이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 했다. 고란이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돌아 나갔다. 아마 대회 개최식 전에 미리 자리에 착석하려는 모양이다. 성천주는 이번 대회에서 꽤나 중요한 위치에 있으니까.
사실 이번 대회는 성천주들이 좋은 헌터를 선출하여 자신의 하위에 두기 위해 열리는 대회였다. 그렇기에 대체로 대회 방식은 헌터로서의 능력을 보여주기 알맞게 설계한 경향이 있다.
‘나는 상금 노리고 하는 거지만.’
우승 상금이 상당했다. 억 소리는 물론 조 소리도 어쩌면 날지도 모른다.
태석은 그렇기에 싱글벙글 웃으며 앞으로의 대회 작전을 속으로 구상했고, 대한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왜 나만…….”
자기만 어째서 욕먹고, 약하고, 여자한테 인기 없단 말인가. 태석의 아무것도 모르는 저 순수한 표정이 왠지 모르게 원망스러웠다. 몇 십년지기 친구지만…… 솔직히 배만 한 대 치고 싶다.
별수 없지. 대한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런데 태석 씨.”
시연이 어느새 대한에게 별말 없이 태석에게만 뭔가를 묻는 모습에서 다시 한 번 생각이 바뀌었다.
대회 때 전력을 다하자.
태석을 꺾고 싶은 생각이 물씬 드는 요즘이었다.
물론 절대 이기지 못하지만.
그때였다.
[대회 시작 15분 전. 관계자 여러분들은 모두 신속히 입장해주시기 바랍니다.]
대회 시작이 다가온 모양이다. 강철 길드 건물 내의 모든 스피커에서 음성이 퍼져 나왔다. 태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먹다 남은 콜라는 모두 쓰레기통에 쑤셔 박고 각자의 대기실로 향할 때였다.
“태석.”
대한이 태석을 불렀다. 무슨 이유로 불렀을지는 보나 마나 뻔하다. 그러나 태석은 모르는 척 몸을 돌려 대한을 쳐다보았다. 대한과 태석의 올곧은 눈이 서로 충돌했다. 대한이 한껏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청했다. 손을 뻗으며 말했다.
“정정당당히 승부하도록 하자. 이번에는 반드시 이길 테니까.”
태석이 그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미소 지었다. 대한의 마음만큼은 진심이다. 자신을 이기고자 많은 노력을 한 것이 분명하다. 대한은 헌터로서 재능은 없어도 노력만큼은 많이 해왔을 거라고, 태석은 어림짐작했다.
태석이 악수를 받아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그래, 정정당당히. 내가 이길 테니까.”
“내가 이길 거야.”
“뭐, 그렇게 착각하던가.”
태석이 능글맞게 대꾸하자 대한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래, 좋아. 누가 이기나 보자.”
E랭크와 S랭크의 대화라기에는 지나치게 수평적인 구조였다. 그만큼 그들의 우정은 수평 중의 수평이란 소리일지도 모른다.
물론 결과는 나와봐야 안다. 태석은 방심하지 않기로 했다. 대회에서 대한을 만나더라도 전력을 다하도록 하자.
태석이 대기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