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25. 햄버거
대한민국 서울의 어느 모텔 방 안.
색욕의 악마, 스카이 할 블랜드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한바탕 난리를 부린 것인지 콘돔이니 베개니 하는 것들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엎드려 누워서 잠에 든 남자의 등에는 손톱에 할퀸 흉터가 짙게 남아 있었다.
스카이는 한숨을 뱉었다.
세 번 정도인가.
어차피 인간이다. 그렇게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형편없는 실력과 체력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색욕의 악마를 만족시키기에는 부족했다. 결국, 스카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떠날 준비를 했고 적당히 흡수해둔 남자의 정기를 몸속에 저장했다.
이걸로 오늘의 쾌락은 일단락. 이제부터 뭘 해야 할지는 스스로 정해야 한다.
‘또 다른 남자를 물색해볼까. 아니면…….’
혀로 입술을 핥으며 생각을 정리한다. 그리고 그때 스카이가 허공을 향해 단검을 날렸다. 권능을 통해 단검을 소환해 허공에 던진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허공이 아니다.
“눈치챘군.”
남자의 목소리가 허공으로 보이는 곳에서 들렸다. 곧이어 검붉은 안개가 흩어지듯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그곳에 분노의 악마, 데리안 콜 스프란토의 모습이 드러났다.
스카이가 씨익 웃었다.
지켜보고 있었던 건가. 기분 나쁜 남자였다. 분노에 사로잡힌 것들은 하나같이 앞뒤 물불 가리지 않는다.
언젠가 저자를 죽이고 싶었다. 스카이는 겉으로는 그 감정을 내색하지 않고, 담배를 비벼 끄면서 말했다.
“무슨 이유로 나타난 거야. 데리안 오빠~.”
데리안은 인상을 찌푸렸다.
기분 나쁜 여자였다. 속으로는 자신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하면서 겉으로는 그저 친밀하게 군다. 자신은 스카이와 친해질 생각이 전무했다. 친해지기보다는 지금 당장에라도 목을 졸라 죽이고 싶은 심정이다.
분노와 색욕은 서로 비슷한 감정과도 같았고, 결국 그 비슷하다는 것이 오히려 서로에 대한 혐오를 남겼다.
다른 악마들도 마찬가지였다. 7대 죄악은 서로가 서로를 너무나도 닮았고, 결국 동족을 혐오하기 마련이다.
데리안은 단검을 잡은 손으로 단검을 으스러트렸다. 그리고 무명의 검을 꺼내 들었다. 언제라도 기습에 대항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에이, 우리 사이에 무기가 필요한가?”
“무기는 네가 먼저 사용했을 텐데, 스카이 할 블랜드.”
“어쩌라고, 데리안 콜 스프란토. 네 녀석의 다리를 잘라줄 수가 있어.”
스카이가 다리를 베베 꼬며 유혹하듯 묘하게 정욕적인 자세를 취했다. 색욕의 악마답다면 답다고 할까. 하지만 분노의 악마는 그런 것 따위는 눈여겨 두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오빠~의 악계자가 죽었다지?”
“…….”
사실이었다. 사실 추하게라도 살게 할 수 있었지만, 분노에 사로잡혔던 데리안은 자신의 악계자 강철호를 죽였다. 지금도 무한한 고통을 받으며 영혼이 조금씩 뭉개지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죽도록 조치를 취했으니까.
그러니 스카이가 그 점을 가지고 놀리더라도 사실이니 별로 할 말은 없다. 짜증은 났지만, 죽이고 싶었지만.
데리안이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굳이 너를 찾아온 이유는, 알겠지?”
“응. 알지, 오빠~.”
스카이가 입가를 가리며 키득키득 웃었다.
“분노 탓에 대인관계가 원활하지 않은 왕따가 최고의 인기녀한테 쓸 만한 악계자를 찾아달라는 거잖아?”
“최고의 인기녀가 아니라, 변태겠지.”
“뭐 어때. 교미는 인류에게 있어서 크나큰 축복이잖아? 그런 걸 즐기지 않는 너는 정말이지 끔찍한 괴물이야.”
너도 악마잖아. 목 끝까지 나오려고 하는 말을 겨우 참아냈다. 분노의 악마가 참을 정도로, 악계자를 구할 마음으로 가득했다. 조금 참으면 이 멍청한 년이 자신에게 악계자 후보 리스트를 줄 것이다. 그것만 받고 다시 무시하면 된다. 조금만, 조금만 참는다면…….
“뭐, 급한 모양이니까. 찾아주도록 할게.”
“그래, 어서 찾아라.”
“그러니까 조건.”
스카이가 히죽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옷 하나 걸치지 않은 스카이는 인간 남자가 본다면 매력을 한가득 느낄 정도로 고혹적이었다. 하지만 분노의 악마 데리안에게 있어서 그런 유혹 따위는 자신의 감정에 그 어떤 고동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런 목석 같은 데리안의 볼을 손으로 훑으며 스카이가 고개를 그의 얼굴로 들이밀었다. 혀로 귓불을 핥고 입으로 살짝 깨물며 말했다. 속삭였다.
“한 번 대준다면, 악계자 후보 리스트를 주겠어.”
“…….”
참아야 한다. 여기서 참는다는 것은, 분노를 참는다는 소리였다.
데리안이 별수 없이 몸을 맡겼다.
악계자 후보 리스트를 얻어내기 위해서. 치욕스럽지만.
“나, 많이 강해졌어!”
대한이 자신의 가슴을 퉁퉁 치면서 자신만만하게 발언했다. 태석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굉장하네.”
“얀마. 지금 S랭크 헌터라고 아랫것 보듯이 하는 거야?”
대한은 피식 웃으면서 태석의 가슴을 장난스레 툭툭 쳤다. 태석이 지나칠 정도로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은 대한도 알았다. A랭크 괴수 리치를 단신으로 잡은 자가 태석이라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물론 헌터들 사이에서는 떠오르는 유망주로 유명했다.
어쩌면 태석이 S랭크 괴수를 헌터가 된 지 두 달 이내로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게다가 태석의 능력에 대해 아는 자는 거의 없다. 도복을 입은 여자로 변신하는 능력에, 천둥과 비바람을 다루는 능력. 그 두 능력을 동시에 쓰는 태석의 실제 능력이 무엇인지 의견이 분분했다.
대한이 몇 번 문자로 물었지만, 대답은 시원찮았다. 태석의 능력은 여전히 아무도 자세히 몰랐다.
그런 태석에게 자극을 받은 대한은 열심히 훈련을 했다. 그동안의 노력의 배가 되는 노력을 쏟아 부은 것이다. 예전에 비해 수치로 비유하자면, 두 배가량 강해졌다. 사실 그동안 노력하지 않았기에 노력을 시작하는 순간 실력이 확 뜬 것이지만…… 어찌 됐건 강해진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태석은 자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했다.
솔직히, 자존심 상한다.
태석이 그때 말했다.
“뭐, 열심히 했겠지. 잘 알고 있어.”
태석은 잘 안다. 대한이 어떤 인물인지. 한다면 하는 녀석이라는 것은 안다. 어딘가가 어설퍼서 그렇지. 공부를 할 때 몇 페이지를 빼먹고 공부해서 두세 문제를 더 틀린다든가, OMR카드를 딱 한 개 잘못 써서 만점을 놓친다든가 그런 어찌 보면 약간 결정적인 실수를 하는 것이 문제였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자신보다 더 높은 점수였다. 태석은 대학교를 입학하기 전까지 성적으로 대한을 이긴 적이 없었다.
‘그렇게 보면 지금은 역전한 건가.’
S랭크 헌터 태석. E랭크 헌터 대한. 극단적으로 차이 나는 랭크는 솔직히…… 대한의 입장으로 보자면 분할 것 같았다.
하지만 대한은 별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면 대회 전에 밥이라도 먹어둘까? 내가 한턱 쏠게.”
“그러던가.”
솔직히 돈은 태석이 더 많지만…… 사준다는 것을 거절할 정도로 태석은 선한 인품의 소유자가 아니다. 대한이 강철 길드 내부의 적당한 패스트푸드점 내부로 들어갔다.
햄버거를 파는 곳이다.
이름은 칸타로스. 어째서인지 술집 같은 이름이지만, 이래 봬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햄버거 프랜차이즈였다. 칸타로스에서 판매하는 소고기 치즈 햄버거의 맛은…… 가히 일품이었다.
대한과 태석은 어린 시절 칸타로스에서 제법 많은 고기를 축냈다. 아마 평생 동안 먹은 햄버거로 지구를 한 바퀴 두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농담 삼아 둘이 얘기했던 적이 있을 정도로.
“어린 시절에는 돈이 없어서 먹었지만, 이제는 추억으로 먹네.”
태석과 대한은 칸타로스에서 가장 비싼 햄버거를 주문하고 나오는 것을 기다리며, 대한이 살짝 우수에 잠긴 눈으로 말했다.
“그러게.”
태석은 미리 받은 콜라의 빨대에 입을 대고 적당히 마시며 답했다.
그때였다.
태석은 칸타로스 밖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손을 흔드는 여자를 보았다. 여자가 칸타로스 안으로 들어왔다.
한 손은 한성 놀이공원에서의 사냥 때 다쳤기에 깁스를 하고 어깨와 고정한 상태였다. 멀쩡한 다른 손을 열심히 흔들며 다가온 그녀의 이름을 태석은 알고 있다.
“시연 씨.”
“뭐, 대회에서 마주칠 거라 생각했지만…… 역시 부지런하시네요. 이렇게 일찍 오실 줄은…….”
“그러고 보니 시연 씨도 대회 나온다면서요? 지석이 형한테 들었어요.”
“그래요. 팔 하나가 다치긴 했지만, 기브스 풀고 움직일 수는 있으니까요.”
시연은 하품을 크게 뱉으며 의자에 대충 앉았다. 털썩, 소리가 크게 울렸다.
“성천주님이 하도 보채셔서, 일찍 오고 말았네요. 졸려 죽겠는데…….”
“……누구냐?”
대한이 볼을 긁적이며 태석에게 물었다.
태석이 적당히 답했다.
“성시연 씨.”
그리고는 장난스레 말을 이었다.
“세계 최강의 메이드 헌터야.”
“…….”
시연이 눈을 꿈벅였다.
“정말이냐?”
“정말이겠어요?”
시연이 툭 쏘아붙였다. 물론 성천주 고란 홀의 저택에서 메이드 일을 도맡아 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남의 입으로 들으니 창피하다. 한국에서는 흔하지 않은 직책이니까. 게다가 태석의 입에서 들으니 더 부끄러웠다. ……왜 부끄러운 건지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