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24. 짜증 난다
어둡다. 철호는 눈앞이 컴컴했다. 보이는 것이 하나 없었다. 대체 이곳은 어디지? 분명 자신은 흑수정을 집어 먹고 악마화하여 악계자로서 모든 것을 파괴하려 했다. 근방 헌터를 없애고 힘을 더 섭취하여 세상을 멸하려 했다. 그것이 분노의 악마와의 계약 내용이었고, 자신이 원하는 바였다.
그런데 지금은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태석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신참 헌터 나부랭이에게 전격을 얻어맞아 죽은 것이 기억났다.
자신의 몸에 현재 입이 있는지 모르지만, 이를 악물고 싶었다. 그만큼 치욕스러웠다.
“젠장!”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목청을 울려 나온 목소리가 아니었다. 철호는 그때 눈앞이 보이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육체는 없었다. 그저 검은 연기 같은 것으로 자신의 몸이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 마법을 통해 시각을 구성하여 앞을 볼 수 있는 걸까. 하지만 대체 누가? 이미 죽어버린 자신을 누가 살렸단 말인가?
답은 간단했다.
“실망이야. 실망이라고!”
화난 목소리. 익숙한 목소리였다. 철호는 검은 연기 몸을 돌려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보았다.
그 앞에는 악마가 있었다. 검은 뿔이 달리고 붉은 오오라를 풍기며 젊은 청년의 모습을 한 망토를 두르고 갑주를 입은 화난 표정의 남자였다.
그 남자는 인간이 아니다. 척 보아도 알 수 있다. 뿔이 달렸기 때문이다. 뿔 달린 인간이 이 우주 어딘가에 존재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철호는 그가 악마라는 건 알 수 있다.
분노의 악마, 데리안 콜 스프란토. 간단히, 자신은 그를 데리안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데리안 님, 죄송합니다.”
“죄송하고 자시고, 개새끼야. 왜 뒤졌어? 그딴 신참 나부랭이에게.”
“그게…… 신참이었지만, 강했습니다.”
“강하다고? 지랄 마. 그 녀석은 헌터가 된 지 이제 며칠은 되어 보이는 녀석이었다고.”
철호는 살짝 화가 났다. 태석이라는 헌터는 강했다. 자신이 도저히 이길 수 없을 정도로. 그런데 그 헌터가 약했는데 왜 졌냐고 화낸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아무리 악계자라도, 악마의 노예라도, 화나는 것은 화나는 법이다.
“어쩌라……고오오오옥?!”
콰르르르륵!
분노의 악마가 손을 뻗어 안개를 잡았다.
격통이 몰아쳤다. 상처를 불로 지지고 칼로 째고 다시 삶으면 이런 느낌이 날 것이다. 혈류가 역류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금방이라도 없는 육신이 터질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젠장, 왜 이렇게 아픈 거야.
“너는 이미 죽었어. 내가 너의 몸을 붙잡아 두고 있는 거야. 뭐…… 그 이유는 너를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화를 터트리기 위해서지만.”
“화를 터트린다라…… 고문 할 생각인가?”
죽었다면 이제 그는 더 이상 악계자가 아니다. 악마의 노예가 아니라는 소리다. 계약은 만료되었으니 더 이상 존대할 이유도 없다. 죽는 건 마찬가지니까.
분노의 악마 데리안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고풍스러운 의자에 앉았다. 푹신해서 좋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분노가 가시는 것은 아니다.
그는 분노에 사로잡힌 악이다. 그렇기에 모든 일에 분노를 느낀다. 숨 쉬는 것에도, 부하의 실수에도, 일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는 것에도, 모든 것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렇기에 그 분노를 터트릴 시기가 종종 온다. 그리고 그 시기가 바로 지금이다.
데리안은 자신의 악계자였던 철호의 영혼을 붙들었고, 분노를 터트리고자 했다.
“나는 나를 찾아온 너에게 힘을 주었다. 악계자로 만들어주었다는 소리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딸을 살릴 방도를 찾기 위해 철호는 악마를 소환했다. 그의 딸을 잃은 분노가 컸던 것인지 분노의 악마인 자신을 소환했다. 그리고 철호는 자신에게 말했다.
힘을 달라고. 이 모든 썩어 빠진 세상을 파괴할 그 힘을 달라고.
분노의 악마 데리안은 아직 철호가 있는 차원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데리안은 난처했지만, 철호에게 조건을 걸었다. 그가 힘을 구할 방도를 찾도록 해준 것이다.
악계자로 만들어주었고, 흑수정을 먹는 방법을 가리켜주었다.
“흑수정을 먹어서, 먹고 먹어 치워서 세상을 부수면 되는 거였어. 그런 간단한 일을 너는 성공하지 못했지.”
그렇기에 화가 난다. 철호의 심장을 파괴하고, 머리를 부수고, 생식기관을 망가트리고, 소화기관을 망가트리고, 어쨌든 모든 걸 부수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다.
정말이지 제대로 된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분명 해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데리안의 착각이었던 걸까. 짜증 난다.
데리안은 한숨을 뱉었다.
철호의 검은 안개에 다가갔다. 그리고 가볍게 손을 뻗었다.
옆으로 길게 뻗은 손에서 검이 하나 나타났다. 데리안의 고유 무기였다. 이름은 없다. 무명의 검이라고 부른다. 화를 잘 내는 분노의 악마는 많은 무기를 쓸 수 있었고, 그것에 일일이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그저 화가 나서 급하게 때려 부술 도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다른 악마들은 일일이 이름을 붙여 소중히 다룬다지만, 분노의 악마인 데리안은 그런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저 무기는 무기. 쓸 용도는 부수는 것, 죽이는 것, 망가트리는 것.
그러니 철호 또한 망가진다.
휙.
“끄으으윽?!”
철호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소멸했다. 안개가 퍼지고, 영혼의 조각이 허공으로 날아가 가루가 되고 안개가 되어 사라졌다. 철호의 영혼이 사후세계로 무사히 돌아가는 감각을 느끼고, 데리안은 허무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았다.
분노가 잠시 가시었다. 마치 배변 활동을 마친 인간처럼, 나름대로 편안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그였지만, 곧이어 다시 폭풍처럼 분노가 몰아친다.
인상이 험악해졌다.
의자의 손잡이를 잡은 손이 뿌득뿌득 소리를 내며 비명을 질렀다.
짜증 난다. 어서 새로운 악계자를 구해야 하는데.
데리안이 허공에 중얼거렸다.
“악계자를 구해야겠군.”
다른 악마에게 도움을 요청할까. 어쩌면 그녀라면, 그 악마라면 금방 구할지도 모른다. 데리안의 악계자 후보로 적합한 자를 찾아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 여자 악마는 제법 대인관계가 좋았으니까. 나쁜 의미로 너무 좋았던 것이다.
색욕의 악마니까.
이성과의 대인관계 하나만큼은 문란할 정도로 끝내줄지도.
“아마 떡 치는 놈들 중에 하나둘쯤은 분노에 사로잡힌 인간이 있겠지.”
지금 이 순간에도, 녀석은 그렇고 그런 짓을 할 테지.
역시 짜증 나는 여자다. 분노에 사로잡힌 탓에 더욱 그리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4일이 지났다. 제법 오랜 기간이라면 오랜 기간이지만, 휴식을 취하면서 지내서 그런지 순식간에 지나간 느낌이 들었다.
태석도 그동안 계속 쉬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 공간에 접근하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네.’
며칠 동안 그는 휴식을 취하면서 접근하려 했다. 하얀 벽과 천장, 책상이 있고 카드와 책이 놓여 있는 그 공간 말이다.
그곳에, 태석은 살면서 두 번 접근했다. 한 번은 은호를 잡을 때, 다른 한 번은 리치를 잡을 때.
그때마다 그곳은 자신에게 카드를 주었다. 카드는 자신이 신을 강신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토르와 로키. 그곳에서 얻은 힘으로 토르의 천둥을 쓸 수 있고, 로키의 변신을 쓸 수 있었다. 그리고 강신하는 신이 늘어날수록 힘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A랭크 리치를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나졌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번에는 마음대로 접근할 수 없었다. 아무리 상상하고 상상해도 리치를 잡을 때처럼 의도적으로 접근할 수가 없었다.
막혀 있다는 느낌이다.
무협지에서 벽에 가로막힌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솔직히 욕심 탓일지 모르지만, 더 강해지고 싶었다. 아예 예수 정도의 유일신을 강신하여 무적의 헌터가 되고 싶다는 느낌이다.
S랭크 괴수 정도를 잡기 위해서는 지금으로는 부족했다. 더욱더, 그리고 더욱더 강해야 한다.
‘뭔가 답답하긴 한데. 일단은 대회에 집중하자.’
태석은 현재 강철 길드 건물 앞에 있었다.
그가 건물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 이유는, 마음의 정리를 위해서였다. 앞으로 벌어질 대회의 일정을 요약한 내용을 스마트폰으로 지속적으로 훑어보았다.
‘첫 번은…… 예선전. 다른 헌터와 대련을 해서 승리하는 건가.’
상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대련 시작 5분 전에 알 수 있는 모양이다. 하긴, 알고 있다면 유명한 헌터일수록 공략이 쉬워지기에 밸런스를 맞추려고 그런 것일 터. 불만은 없다.
‘불안하긴 하네.’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것은 결코 좋은 감정을 주지 않는다. 불안감이 앞서는 것이다. 그간의 태석의 인생에서 결과를 알 수 없는 미래는 늘 불안을 주었다.
은호라던가, 모스키토라던가.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은 지긋지긋하다.
태석이 그렇게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면서 있을 때였다. 강철 길드 건물 밖이 소란스러웠다. 많은 사람들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거나, 사인 요청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일까. 고개를 돌려 그쪽을 보니 눈에 익은 인물이 있었다.
도복을 입고 있다. 머리는 검게 산발 되어 있고, 검은 띠를 허리에 두르고 있다. 손에는 아홉 개의 반지가 화려하게 끼워져 있다. 태석이 잘 아는 인물이다.
알다마다 너무 잘 알아서 오히려 정이 갈 정도.
“지석이 형.”
“아, 대회 참여한다는 거 들었다.”
지석이 손을 뻗으며 태석에게 악수를 청했다. 태석이 악수를 받았다.
찰칵, 찰칵.
소란스러운 웅성거림이 들렸다.
“리치를 잡았다지? A랭크 괴수를.”
“어쩌다 보니 잡았네요.”
“대단하군. 걱정은 기우였던 모양이야. 대회 우승은 문제없겠어.”
“그래도…… 방심하면 S랭크여도 털리는 게 대회니까요. 긴장해야죠.”
지석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좋은 자세다.”
지석은 그리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면 안으로 들어가도록 할까. 마침 네가 아는 친구도 와 있어.”
“누구요?”
“우리 길드원, 대한.”
“아…….”
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 친구였지.
태석이 어색하게 웃으며 지석과 함께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대한과 오랜만에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동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녀석은 뭐 하고 지냈으려나. 돌연 궁금함이 스물스물 기어 나왔다. 빨리 만나서 회포를 풀고 싶지만, 대회가 앞에 있으니 간단히 안부만 물어야겠다.
그렇게 태석과 지석은 건물 내부로 진입했다. 대회 준비를 위해 강철 길드 건물 내부로.
아이언 월드 대회 예선전이 곧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