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20. 방해꾼은 죽인다
파멸의 책은 정신없이 페이지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 속에 적힌 문자는 태석으로서는 읽기 힘들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기 때문이다. 외계 종족의 언어인가? 그건 아니었다. 외계 종족의 언어는 요즈음의 사회에서는 문과 쪽 수능에서는 종종 치르는 학생이 있을 정도로 대중화되어 있기에, 태석 또한 어느 정도 알아먹을 수는 있었다. 그러니 그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떤 언어일까? 태석은 그것의 존재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알 수 있는 것은 있다.
파멸의 책은 바로 위험하다는 것.
태석의 주먹이 더욱 세게 쥐어졌다. 지금은 변신을 풀고 로키의 힘을 거둔 상태였다. 혹시 몰라 토르의 힘을 받아들인 상태였다. 그렇기에 지금도 태석의 눈에는 푸른 천둥이 조금씩 파직파직 튀어나왔다. 힘의 고양감이 그를 만족스럽게 했다.
지금, 성천주 고란이 앞으로 나서서 파멸의 책을 마주 보고 있었다. 파멸의 책이 펼친 검은 장벽이 그녀와 파멸의 책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지만,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면, 성천주잖아? 성천주는 기본적으로 괴수의 저주가 전혀 통하질 않는다. 괴수의 모든 저주에 면역, 괴수의 모든 저주를 해주할 수 있었다. 약간의 경험과 노련함만 있다면.
다만 단점으로 괴수들을 처리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성천주 고란 홀은 특히나 그것이 강했다. 게다가 시연이라는 낮은 랭크 헌터를 두고 있는 터라 흑수정 정화에 있어서 그리 앞서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라도 파멸의 책을 해주할 수 있었다.
고란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작은 입으로 말했다.
“파멸의 책. 아주 위험한 책입니다. 리치 녀석이 어째서 이런 책을 내장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좋지 못한 방법으로 얻어낸 것이겠지요. 그렇기에 저주로 리치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고란의 손에서 밝은 빛이 모이기 시작했다. 아름답다. 태석은 그 어떤 때의 성천주의 기적보다 지금의 자그마한 빛이 훨씬 아름답다고 여겼다. 왜냐면, 구하고 있잖아? 모두를 저 빛으로.
자신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태석은 리치를 잡을 수 있었다. 로키의 힘을 얻어내어 지석으로 변신하면서까지 리치를 잡을 수 있었다. 비록 잠깐 동안 여자가 되는 수모를 겪었지만, 어쨌든 잡았으니 만족이다.
하지만 뒤이어 나타난 파멸의 책. 그것은 성천주가 없었다면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까지 죽었을지도 모른다. 파멸의 책의 위력은 지나칠 정도로 강했기 때문이다. 핵에 필적할지도 모른다.
뭐야, 그렇게 무서운 거, 그런 게 왜 D랭크 던전에서 튀어나온 건데.
S랭크인 자신의 물리 공격에 면역인 리치이니 제법 대단한 놈이었을지도 모른다.
태석이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동안 고란의 해주 작업은 계속된다. 정신을 집중하기 위함인지 태석에게 말을 건다.
“태석 씨.”
“왜 그러시죠?”
“어제인가 얘기한 적 있었죠. 굳이 헌터들과 성천주들이 싸울 필요가 있냐고. 모두가 싸우지 않고, 괴수와 헌터, 성천주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평화로운 세상이 되도록 하는 방법이 있으면 안 되는 거냐고.”
“그랬었죠.”
“제가 그걸 굳이 말한 이유는 태석 씨의 생각을 듣고 싶어서였습니다.”
성천주 고란의 손끝의 빛이 더욱 밝게 빛난다. 아름다움을 넘어서 존경심까지 들었다. 이거 반칙이잖아. 저렇게 멋져 보여도 되는 거야?
태석은 입을 다물고 생각을 정리했다.
그는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분명 그는 괴수를 모두 쳐죽이고 싶다고 항상 모두에게 말했었다. 괴수가 자신의 가족을 죽였었으니까. 그때의 기억은 분명하지 않았지만, 분명 떠오르는 것이 있다. 자신의 온몸은 피투성이였으며 몽둥이를 들고 있었고, 부모님의 대가리는 어째서인지 깨져 있고, 모스키토는 묵사발 나 있고, 여동생은 자신을 붙잡고 그만하라고 울고 있고.
끔찍한 기억이었고, 이 탓에 자신은 괴수를 쳐죽이기로 결심했다.
그런 것으로 결론 난 이야기였을 터였다. 그런 터인데…….
어째서일까. 가슴 한쪽이 조금 붉게 타들어 가는 기분이다. 추적추적 비가 내려 그 가슴을 하얗게 잿더미로 만들고 있다는 느낌이다.
무언가 찢겨져 나가는 기분이다.
그러고 보니 그때의 일 이후로 여동생은 한동안 자신을 겁에 질린 표정으로 보고 도망 다녔다. 한참을 쫓아가서 위로해준 뒤에야 여동생은 마음을 열었지. 요컨대 거짓 웃음 정도는 낼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의 상처를 회복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그가 지금 질문을 받았다.
싸움이 중요하냐고.
태석은 더 이상 고민 않았다. 왜냐면, 결론은 이미 나 있고, 약간 흔들렸지만 그 결심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침이 바짝바짝 말라 목소리를 내기 힘들었지만, 겨우 말했다.
“변함없습니다. 괴수는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썩 겁나게 만족스러운 대답이군요.”
묘하게 과격한 그녀의 말투. 이제는 익숙해져서 귀엽기까지 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겨우 말한 사이 성천주 고란의 기적이 모두 준비된 모양이다. 이제 새하얀 빛은 눈 부실 정도로 거대해졌고, 일직선으로 빠르게 쏘아져 파멸의 책에 부딪혔다.
쿵!
막대한 에너지의 기류가 파멸의 책을 끔찍할 정도로 잔혹하게 가루로 만든다. 닿은 부분이 서서히 녹아들어 가 찢기고, 가루가 되고, 녹아서 액체가 되고, 그 액체조차 기화하고, 기화된 것이 모조리 소멸한다.
그야말로 사라진 것이다. 태석은 그것을 보며 속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기분.
그야 괴수가 죽고 그 괴수가 남긴 위협 또한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모습을 드러내게 하는 데에 성공하여 드러난 흑수정을 정화하는 것.
이 또한 성천주인 고란이 하면 끝인 작업이다.
태석은 살짝 긴장이 풀렸다. 이제 끝이다. 편하게 집에 돌아가 쉬고, 자신의 통장에 들어올 돈을 보며 만족스럽게 여동생과 함께 스테이크를 썰면 되는 일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탓!
무언가가 빠르게 돌진했다. 태석을 스치고 지나갔다. 태석이 그것을 토르의 신체 능력으로 빠르게 붙잡으려고 했지만, 녀석이 더 빨랐다.
순간 흐릿한 형체 속에서 익숙한 것을 보았다.
강철 머리띠.
회색의 번쩍이는, 연마된 강철 특유의 반짝반짝한 느낌의 빛이 태석의 동공을 찔러 망막에 상을 맺게 했다.
뭘 하려는 거지?
위험하다. 뭔가 일이 잘못될 듯하다. 솔직히 태석의 입장에서는 해결할 수 있는 범주의 일이라고 약간 자만심이 있는 듯하지만 그렇게 생각되었기에 위기감은 없었지만, 어쨌든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태석이 서둘러 돌진했다. 회색의 번쩍이는 머리띠를 쫓아 남자의 몸에 천둥을 박았다.
콰르르륵!
천둥이 하늘에서 내리꽂혀 강철 머리띠의 사내를 직격했다. 남자가 부들부들 떠는 기색이 느껴졌고, 움직임이 느려졌다. 이걸로 남자에게 몇 대 맞히면 금방 쓰러질 것이고, 뭔지 모를 반항은 끝날 터였다.
그럴 터였는데, 조금 방심한 탓일까. 아니, 방심하지 않았더라도 피할 수 없는 일이었을까.
남자가 히죽 웃으며 소리쳤다.
“나는 분노의 악마의 악계자, 강철호다!”
남자가 천둥에 맞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는 표정으로, 허나 있는 힘껏 흑수정을 칼로 쳐서 조금 떼어내더니 그것을 입에 넣고 씹었다.
와그작.
그 순간이었다.
강철호의 몸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미친 새끼!”
옳지. 고란이 말했다. 태석이 하고 싶던 말이었다. 태석은 분노한 표정으로 강철호를 노려보았다.
‘상황을 보고 죽인다.’
태석의 표정이 냉정하게 변했다. 헌터답게 변했다는 표현이 옳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태석은 자신의 전우이자 헌터가 죽는 꼴을 보았고, 다른 지석 같은 베테랑보다는 적지만 많은 괴수들을 죽여 보았다.
자신에게 필요 없으면서도 남들을 위협하는 존재는 죽여야 한다는 것이 머릿속 깊숙이 사상으로 박힌 것이다.
설령 강철호라는 인간이 벌인 쓸데없는 위협적인 짓일지라도 죽여야 할 때는 죽여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무언가 변질되고 있는 강철호를 죽이기 위해 토르의 힘을 더욱 강하게 받아들였다.
강신의 지수가 더욱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