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17. 로키
순간 눈이 감기는 감각이 있었다. 실제로 눈이 감겼는지는 모른다. 지금 태석이 보고 있는 광경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하늘이 정신없이 낮과 밤을 뒤바꾸고, 별들이 정신없이 휘몰아쳐서 돌아가며 원형의 선을 만든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새하얀 벽과 천장과 책상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여기는 대체 어디지?’
마치 이세계에 있는 느낌이다. 현실 세계가 아닌, 다른 차원의 세계.
분명 도박을 했던 기억이 있었다. 태석은 정신없이 시간을 빨리 감기 하는 것 같은 풍경 속에서 걷지조차 않고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무엇을 기다리는 것인지는 모른다. 그저 기다려야 한다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기다리는 것이다.
순간 무엇인가 기억이 플래시백되어 그의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태석은 순간순간 보이는 풍경에서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여동생이 울고 있다. 모기와도 같은 형태의 거대 괴수가 부모님의 피를 정신없이 빨고 있다. 태석의 손에 어느새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 그것을 들고 휘둘렀다.
콰직!
“이번에는 놓치지 않아.”
태석은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며 모스키토를 묵사발 냈다. 어느새 그의 얼굴에 검은 모스키토의 피와 붉은 인간의 피가 섞여서 튀었다.
주저앉은 채 눈물이 새어나왔다.
고통스러웠다.
어딘가 마음이 아팠다.
심장이 깨질 것 같았다.
이것이 자신의 마음의 상처일까.
“때때로 생각했어.”
몸의 상처는 힐링팩으로 치료할 수 있다.
잘려나간 상처도, 거의 죽어가던 사람도, 힐링과 힐링팩을 부착하는 것으로 생존이 가능했다. 멀쩡히 나을 수 있었다.
“……마음의 상처는 몸의 상처처럼 회복시킬 수는 없는 걸까 하고 고통스러워했어.”
마음의 상처는 계속해서 통증과 피를 내뿜는다는 기분이었다.
여동생의 마음의 상처를 자신이 치료해줄 수는 없는 걸까.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느꼈다. 왜냐면, 자신의 마음의 상처도 회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상처도 치료 못 하는 사람이 남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니다. 그런 게 아니야, 이 녀석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걸걸한 청년의 목소리였다. 술을 자주 마셔 목이 나가 있는 것 같았다. 태석이 고개를 돌려 정신없이 공전하는 별을 보았다. 원형의 빛의 선을 지켜보다가 남자를 보았다.
노란 금발의 사납게 생긴 청년. 꽤나 사냥을 잘하게 생긴, 험악한 인상이다. 잘생겼다는 느낌은 없다. 다만 멋있다는 느낌은 있었다.
태석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그가 누군지 바로 알 것 같았다.
그렇기에 소리 내어 말해본다.
“토르……?”
“그래, 네 녀석이 멋대로 불러들인 토르가 나다.”
태석이 피식 웃었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자신이 불러들인 신이 토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실제로 인격을 가진 존재였을 줄이야.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태석 자신이 토르라고 확신을 품고 있었으므로 그는 토르의 말을 분명하다고 믿을 수 있었다.
“그래, 토르.”
태석이 주변 공터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기 때문이다. 리치를 잡기 위해 뛰어다녔기에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간의 피로가 누적되어 폭발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주저앉았고, 토르 또한 옆에 앉았다. 태석이 말했다.
“뭐가 아니라는 거였어?”
“마음의 상처. 그런 것쯤은 혼자만이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당신에게 그런 신화가 있던 건가?”
태석은 토르에 대한 신화 정보를 머릿속에서 끄집어내는 감각으로 회상했다.
그런 일이 있었던 걸까? 토르가 자신의 가족을 잃거나 했던 사건이.
그때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라그나로크.
토르가 모든 것을 잃고, 자신 또한 잃은 그 일이었다.
태석이 토르를 보았다. 토르가 피식 웃었다.
“나는 라그나로크 때, 모든 것을 잃었다. 가족도 친구도, 애인도, 나도.”
“마음의 상처가 제법 있었겠군. 고생 많았겠어.”
고작 가족을 잃은 것에도 끔찍한 상처를 느낀 그였다. 토르가 느꼈던 감정이 어땠을지 알 수 없었다.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
토르가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그 상실감 탓에 너는 나를 제일 먼저 부를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지. 동질감 탓에.”
“그런 건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마음의 상처는 홀로 회복하려 하면 안 돼.”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태석이 쏘아붙이듯이 물었다. 태석은 큰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많은 일을 했다. 먹고 살기 위해 공부에 몰두하고, 일에 몰두했다. 지석 같은 귀인에게 도움을 받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음의 상처는 어쩔 수 없었다.
무언가를 하지 않을 때면 잃었을 때의 상처가 자신의 몸속을 개미 새끼 마냥 후벼 팠다.
그것을 어찌하란 말인가.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어찌 홀로 이겨낼 수 있단 말인가.
“혼자 이겨 내려 하는 게 문제다. 같이 이겨내야지.”
“……그것도 맞는 소리 같아.”
홀로 이겨낼 수 없다면, 같이 이겨내면 된다. 정론이다.
태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현실에서는 어떻게 흘러가지? 이제 슬슬 리치를 잡아야 하는데.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게 없나 하고 접근한 거라.”
자신이 토르를 강신할 때 도달했던 장소에 다시 한 번 들어가기 위해, 그러니까 리치를 이기려고 들어온 곳이다.
새하얀 벽과 천장과 책상이 있는 장소에 들어가 보았으나 어째서인지 지금처럼 별과 하늘이 정신없이 돌아가는, 시간을 태엽처럼 빨리 감기 한 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건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현실로 돌아가 리치를 잡아야 한다. 스스로의 힘으로.
토르가 주먹을 들이밀었다.
“얻을 수 있는 것이라……. 그게 좋겠군.”
“뭔가 줄 수 있는 게 있다면 다 퍼줘.”
“최대한 퍼주도록 하지. 너는 나처럼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으면 하니까.”
“너처럼 재앙이 들이닥칠 일은 없어.”
“혹시 모르지. 세상일은 모르는 거니까.”
“그런 끔찍한 소리 하지 마.”
태석이 피식 웃으며 그리 대꾸했고, 토르가 손에 들려 있는 카드를 들이밀었다.
“이건……?”
“나의 동생, 로키의 강신권이다.”
“강신권…….”
강신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말하는 것일까. 태석은 그 카드를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받아 들었고, 곧이어 미소를 지었다.
카드를 들자 새하얀 빛이 일었고, 자신의 몸속에 깊숙이 박혔다. 이번에는 통증이 없었다. 제법 강신에 익숙해진 탓일지도 모른다.
태석은 눈을 감고 로키의 기억을 훑어 보았다.
순간 끔찍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후벼 팠다.
‘말이랑…… 뭔 짓을 하는 거야.’
변태 야동도 이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수컷 말과 성교를 해서 말을 낳다니…… 신이라고 해도 정도가 있지.
끔찍한 것은 그 기억이 마치 실제 있었던 것마냥 느껴진다는 것이다. 태석이 헛구역질을 하며 고통을 게워내는데 토르가 장난스럽게 껄껄 웃으며 말했다.
“리치라는 녀석은 어떤 녀석이지? 내가 본 적 없는 녀석인데.”
“그 녀석은 언데드에 속하는 괴수야. 다시 말하자면…… 죽은 녀석인데 살아 움직이는 거지.”
“죽었는데 살아 움직인다라……. 딱 로키에게 적합한 상대군.”
“왜?”
“그놈…… 약간 또라이거든. 언데드라는 것을 확실히 좋아할 거야.”
“말이랑 그런 짓을 하는 것을 봐도 그건 알 수 있어.”
“그러면…… 이제 받을 건 받았으니 이제부터 남은 건 너의 몫이다, 태석.”
“그래.”
태석이 눈을 감았다. 현실로 돌아가는 상상을 했다.
새하얀 벽에서 멀어지고, 새하얀 천장을 멀리하고, 새하얀 책상을 밀어 넘긴다.
그리고 원래의 현실을 가까이했다.
시연이 왼팔을 다쳐 울먹이는 곳으로, 고란이 사나운 표정으로 리치를 이길 방법을 찾는 곳으로, 헌터들이 죽어서 울먹이고 고함치며 덤비는 곳으로, 그리고…… 자신이 모든 헌터들의 앞에 나서서 리치에게 달려가는 그곳으로.
‘상상만 해도 돌아가기 싫은 곳이야.’
행복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곳이었다. 분노와 절망과 불행만이 가득한 곳이었다.
하지만 돌아가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불행한 곳이었기에 자신이 나서서 행복을 쟁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돌아간다.
그리고 리치를 죽인다.
그 순간이었다.
현실 세계의 몸이 눈을 뜨고, 리치에게 달려가는 그때의 시점이었다.
태석이 괴성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리고 생각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전투에 들어간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