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모든 신을 받다-13화 (13/102)

# 13

13. 축복받은 헌터

태석은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고 있었다. 티비에서는 여느 때처럼 예능 프로 몇 개가 방영되고 있었다. 최근 유명한 연예인 여럿이 모여서 서로 장난질을 하느라 바빴다. 이런 일상적인 방송을 볼 때면 최근의 비현실적인 사건들의 연속이 마치 없던 일 같았다.

“후우.”

티비도 재미가 없군. 태석은 소파에서 일어나 무언가 할 일이 없나 찾아보았다. 자신의 몸 상태는 점검했고, 성천주 고란 홀의 권능으로 자신의 몸에 저주라도 걸렸는지의 확인 작업도 모두 끝났다.

저주 하나 없이 깔끔하다고 했다. 심지어 인간으로서 누구나 걸려 있는 기본적인 디버프도 없었기에 말 그대로 태생부터 축복받은 존재 같다고 했다.

‘축복받은 존재는 개뿔.’

태석은 순간 플래시백을 느꼈다. 자신의 가족이 모스키토에게 미친 듯이 피가 빨리고, 모스키토의 날개가 미친 듯이 회전하고, 피가 이리저리 튀고, 여동생이 울고 자신 또한 울고, 주변에 있던 무언가를 들고 사정없이 모스키토의 대가리에 내리꽂고…….

생각하지 말자.

그는 고개를 휘휘 내저어 생각을 내쫓았다. 그리고 기지개를 켰다. 뒤를 돌아보았다.

새근새근…….

가냘픈 숨소리와 함께 시연이 자는 모습이 보였다. 시연은 배를 드러낸 채 대 자로 뻗어 자고 있었다. 솔직히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렇게 조신조신한 여자가 아닌, 어린 사내아이를 보는 기분이다.

“감기 걸리겠네.”

태석은 조심히 이불을 더 올려서 덮어 주었다. 그리고 베란다 쪽으로 나가 바깥의 풍경을 구경했다.

불빛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리고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슬슬 전투 준비를 하려는 것인지 술집에는 사람이 어제보다 적었다.

‘이제 내일쯤부터 헌터들이 전투에 나서겠지.’

한성 놀이공원은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고, 그 영향으로 보스 괴수가 스폰 될 것이다.

그 녀석을 놓치지 않고 잡고, 그리고 성천주 고란 홀이 흑수정을 정화시키면 그걸로 끝.

정화된 흑수정은 헌터들의 능력을 상승시키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여기서 태석은 정화된 흑수정 전체의 10분의 4를 챙긴다. 고란의 말에 의하면 태석이 이 멤버들 중 가장 강하니 1만큼을 더 챙겨도 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시연 씨는 불만이 많아 보였지만…… 나에게 이득이니 입 다물고 받아야지.’

태석은 시연을 힐끔 보고는 피식 웃었다. 자신의 이기심이 지나칠 정도로 기분 나빴지만, 별수 없는 일이었다. 챙길 수 있을 때 챙겨야지.

그가 그렇게 상념에 빠졌을 때였다.

“뭘 그렇게 생각하나요?”

고란이 싱글싱글 웃는 꼴로 베란다 바깥쪽에서 날아와 태석이 있는 베란다에 발을 딛고 섰다.

“참 거창하게도 오시는군요.”

날아오다니. 아무리 성천주가 별의별 기적을 다 사용한다지만 하늘을 나는 것은 조금 신기했다. 물론 자신 또한 하늘을 날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토르의 힘이었다. 비바람으로 억지로 몸을 공중에 띄운 것에 불과하다. 오래 유지하는 것은 체력적으로 무리인 것이다.

고란이 말했다.

“거창하기는 하죠. 하지만…… 나름대로 편리하답니다.”

“편리……. 저도 하늘에 몸을 띄울 수 있지만, 불편하던데요.”

“어떤 점이요? 하늘을 나는 것은 본디 인간의 필연적인 욕망 아닌가요? 그게 가능한데 불편을 느낄 리가…….”

“체력적으로 힘들거든요. 뛰는 거에 세 배는 더 힘들어요.”

“하긴, 육체를 공중에 띄우는 건 어떤 방법이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니까.”

고란은 길게 호흡하고 베란다 외벽에 몸을 기댔다. 바깥의 풍경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태석은 그녀가 밖이 아닌 무언가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태석이 문득 물었다.

“시연 씨에게 왜 그렇게 차갑게 구는 겁니까?”

“차갑게 군다라…… 어떤 점에서요?”

“저랑은 대하는 온도 차가…… 조금 큰 것 같아서요.”

“그렇게 보였나 보군요. 하긴, 당연하죠. 그렇게 행동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어째서죠? 시연 씨는 성천주님에게 그럭저럭 충성을 바치고 있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데 그렇게 차갑게 대하는 건…….”

“그야.”

고란이 미소를 지었다.

“저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차갑게 구는 별난 성격이라서 그럴지도요.”

“흠…….”

그러면 자신은 싫어한다는 의미일까. 뭐, 어찌 됐건 상관없다. 고란이 시연을 싫어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걸로 된 거다.

태석은 턱을 괴어 밖의 풍경을 보았다. 누군가가 폭죽을 터트렸다. 펑 하고 터진 폭죽이 불꽃을 자아냈다. 곧이어 오토바이 한 대가 짜장면 배달 상자를 들고 정신없이 사람들 틈을 헤집고 질주했다. 사고가 안 나는 것이 용할 지경이다.

그때 고란이 말했다.

“흑수정이라는 것이 어디에서 생겨난 건지 알고 싶지는 않으신가요?”

갑작스러운 물음이었지만, 누구나 품고 있는 의문이었다.

흑수정. 그것은 본디 보석의 하나를 일컫는 말이었지만, 지금에 있어서는 괴수를 소환하는 끔찍한 저주스러운 흉물을 뜻하는 말이다.

크기나 반짝이는 정도는 전부 다르다. 크기가 클수록 많은 괴수가 튀어나오고, 반짝거릴수록 질적으로 강한 괴수가 튀어나온다.

그것을 헌터들은 파괴만 할 수 있고, 성천주들은 정화가 가능했다.

이를 위해 많은 헌터와 성천주들은 사냥과 성천주 의식으로 흑수정 제거에 나서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 과연 흑수정은 어디서 튀어나온 걸까? 그리고 타이밍 좋게도 어째서 흑수정과 함께 헌터, 성천주가 튀어나온 걸까? 또한, 외계 종족들은 갑자기 자신들 인류와 접촉을 시도하는 걸까?

여러 의문에 대한 해답을 많은 이들이 제시했지만, 모두 석연찮았다. 올바른 정답이 없다는 느낌이다.

“그것의 정답은 모릅니다.”

태석은 모른다. 어째서 생긴 건지, 왜 생기는 건지, 어디서 나타나는 건지, 그것이 무엇인지, 모두 모른다. 아는 게 없다 보아도 무방했다.

하지만…… 태석은 종종 생각한다.

“그것의 정답을 알기도 싫습니다. 그것의 이유도 알기 싫습니다. 그저…… 화가 날 뿐입니다.”

자신의 가족을 망가트린, 그리고 자신의 여동생을 어둡게 만든, 흑수정에 의해 탄생한 괴수가 밉다. 증오스럽다. 죽이고 싶다. 부수고 싶다. 그러니 괴수가 튀어나오는 흑수정을 모두 없애서 여동생을 어둡게 만든, 자신의 가족을 망가트린 괴수들이 튀어나오지 않게끔 하고 싶다.

그러니 여기서 고한다.

“화가 나니까 흑수정은 모두 부술 겁니다. 그 이유 따위 알기도 싫습니다.”

“그렇군요. 이제 알겠습니다.”

“무엇을요?”

“태석 씨의 분노가 태석 씨를 강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요.”

고란이 씨익 웃으며 태석을 보았다. 그리고 태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15살 영국 미소녀로만 보이는 고란이었기에 태석을 쓰다듬기 위해 까치발을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태석은 갑작스레 눈물이 튀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눈물이 흐르는 것이 화가 났다. 억지로 참아냈지만, 결국 눈가를 타고 볼을 타고 한 줄기의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성천주가 그의 소용돌이치는 분노의 감정을 누그러트리기 위해 기적을 사용하고 있었다. 다른 말로 그녀의 권능이었다.

“안쓰럽도다.”

성천주 고란 홀이 말했다. 마치 아랫것을 보는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싫지 않았다. 업신여겨지기보다는 보살펴진다는 느낌이 강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동시에 대견하도다. 어떤 시련이 닥쳐도 그대는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그대의 커다란 분노만이 있다면.”

태석은 순간 고란 홀의 모습에서 천사가 비쳐 보이는 것 같았다.

이것이 성천주의 권능인 걸까. 고란이 손을 뗐고 순간적으로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을 느꼈다.

베란다 밖에서 웅성이고 왁자지껄한 떠드는 풍경들이 모두 사라진 느낌이다. 이 공간, 이 세계에서 태석과 고란만이 존재한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 고요한 감정이 사라지고 다시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고란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원래 이런 축복은 잘 안 내리는 건데 워낙 대단하신 분이라 내려보았습니다.”

“무슨 축복인데요?”

“죽지 않는 축복.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장담 못 하지만, 적어도 사냥하다가 죽을 일은 없을 거예요. 제가 방금 내린 권능은 그런 거니까.”

성천주는 헌터들을 돕는다. 축복이나 권능, 혹은 기적이라고 불리는 힘으로.

그 힘을 정통으로 내리받은 태석은 그야말로 운이 좋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성천주의 편애를 받은 헌터는 태석이 거의 유일무이했다. 어딘가에는 존재할지도 모르지만…….

태석이 미소를 지었다.

왠지 모를 자신감이 샘솟았다. 근거가 없지는 않다.

성천주의 축복이 그의 자신감을 불러들였다.

“그러면 오늘은 쉬고, 내일부터 사냥이에요. 태석 씨, 잘해보자고요. 흑수정 정화 작업.”

“네.”

태석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오늘은 편안하게 잘 수 있을 기분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