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9. 기적과 사랑
도대체 뭐였을까.
성천주 고란 홀은 긴급하게 지어진 텐트 안에서 몸을 치장하고 있었다.
텐트 밖에는 성시연은 없었지만, 근처에 있던 국가 기관 소속의 헌터들이 고란 홀을 보호하고 있었다. 시연은 내일 있을 언데드 사냥에 대비하여 태석과 함께 숙박집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을 것이다.
‘시연이 녀석은 뭐 잘할 거고. 태석 씨는…… 도대체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자신이 존칭을 취할 정도로, 태석의 속에는 엄청난 것이 잠재되어 있었다.
고란은 태석의 속에 있는 것이 신을 가두는 어떤 대단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외의 것은 잘 알기 힘들었다. 알아내기 위해 영혼 속에서 더욱 깊숙이 접근했을 때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더 이상 다가오면 잡아먹을 거라고, 영혼째로 씹어서 그것을 소화하여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라고.
그것은 기본적으로 S랭크의 헌터와 동급의 힘을 가진 성천주일지라도 다름이 없었다.
자신이 잡아먹힐 것이라는 두려움과 영혼째로 타락시키려는 그 존재에 의해 도망치듯이 태석의 혼에서 빠져나오는 게 고작이었다. 조금만 어설펐다가는 존재 그 자체가 소멸할 뻔했다.
‘위험한 분이다. 하지만 동시에…… 흥미가 돋아.’
아직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자신보다 높은 사람과 친해지는 법을 잘 모르는 그녀였지만, 태석과 친해지고 싶었다. 친해져서 그 속에 있는 것의 정체를 알아내고 싶었다.
“이제 곧 시작입니다.”
“그래, 준비는 끝났어.”
고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현재 치장을 한 상태였다. 치장이라고 해도 얼굴의 반을 가리는 가면을 썼을 뿐이다. 새하얀 가면에 붉은 장식이 새겨져 있었다.
고란이 현재 한 치장은 어느 의식을 위한 것이다. 성천주들이 흑수정을 정화하기 전에, 던전에 진입하기 전에 미리 하는 의식.
그 의식에 의해 당분간 언데드 던전, 한성 놀이공원에서 싸우는 헌터들은 축복을 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헌터들이 성천주가 축복을 내린 한성 놀이공원에서 싸우기를 원할 것이고, 언데드들의 씨가 마를 것이다.
여느 성천주들이 흑수정 정화를 위해 그런 축복을 내렸던 것이고, 그것은 고란 또한 다르지 않았다.
고란이 가면을 고쳐 쓰고 천천히 텐트 밖으로 나왔다.
수백 명의 헌터들과 일반인들이 이 의식을 구경하기 위해, 국가 기관 헌터들의 제지를 받으면서 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줄에 가로막혀 진로를 차단하지 않고 있었다.
고란이 씨익 웃었다.
그녀의 본래 성격을 아는 자들이라면 지나치게 사납게 느껴졌을 테지만, 그녀의 거친 성격을 모르는 자들이 대부분이었기에 그 미소가 고혹스럽고 신비스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녀의 모습은 신비로운 영국 소녀라는 이미지가 강했으니까. 실제로, 대외적으로 고란은 아름다운 미소녀 성천주라는 이미지로 많은 팬층을 보유하고 있기도 했다.
'시발. 존나 춥네.‘
하얀 드레스만 입은 것이 살짝 후회되었다. 자신의 저택이 산 위에 있기에 아래는 좀 더 따듯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후회가 되었기에 속으로 욕을 했지만, 수많은 사람들은 그녀의 찡그림이 귀엽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사랑스러운 외모, 허나 거친 성격.
그렇게 겉과 속이 다른 고란 홀이 의식의 진행을 위해 한 발 내딛었다.
S랭크 헌터이자 토르라는 신을 받아들인 헌터, 엄태석은 숙소 안에서 밖이 소란스러운 것을 느끼고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침대 옆에는 여자가 누워 있었다.
‘어째서 여자랑 같이 자야 하는 건데.’
물론 기분 나쁜 일은 아니었지만, 고란이 자신이 데리고 다니는 파티원이라면서 성시연이라는 여자와 함께 한 숙소에서 머무르라고 했다.
‘되게 어색하네.’
시연은 단발에 복슬복슬하게 웨이브를 준 머릿결이었다. 누워서 한참을 있었는데도 그 머릿결은 좀처럼 헝클어질 생각을 않았다. 시연은 다크서클이 짙고 반쯤 감긴 눈으로 눈을 뜬 채 천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안잡니까?”
“자면, 덮치게요?”
“제가 그런 사람으로 보입니까.”
“기분 나쁜 사람인 것 같기는 해요.”
“……그거 되게 실례되는 말인 거 알고 있어요?”
“아, 기분 나쁜 사람이라는 의미는 조금 좋은 의미인 것 같아요. 제가 표현하는 방식이 거칠어서.”
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옆을 보았다. 태석이 순간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고란 홀 성천주님께서 존댓말을 하는 사람은 생전 처음 보거든요. 물론 다른 성천주 중 하나에게 존댓말을 한다고는 하지만…… 초짜 헌터에게 존댓말을 하면서 굽신거리는 경우는 처음 봐요. 그래서 기분 나쁜 거예요. 저는 몇 년이고 고란 홀 님 밑에서 일했는데도 존중받거나 인정받은 적이 없거든요.”
“그렇군요. 하긴…….”
고란 홀은 20년이 된 성천주이다. 그런 그녀의 밑에서 일해오던 시연이 인정을 한 번도 못 받았는데, 웬 처음 보는, 사냥 경험이라고는 은호 단 한 번뿐인 헌터에게 굽신거리면서 인정하다니, 심지어 존경한다니 화딱지가 날 것은 뻔했다.
“그렇다고 해도 일단 같이 사냥하기로 했으니까 친하게 지내보도록 하죠.”
태석이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다. 시연이 그 손을 보다가 살짝 땀을 흘렸다.
“왜 그러시죠?”
“음.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시연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악수를 했고, 잡고 흔들었다.
“……?”
시연의 알 수 없는 긴장된 행동에 태석이 고개를 갸웃거렸고, 시연은 놀란 고양이 같이 눈을 크게 뜬 채 태석을 째려보았다.
‘남자 손잡는 건 또 처음이네.’
긴장했지만 생각보다 별거 아니었다.
성천주 고란 홀과 평생을 함께하면서 헌터로서 자라온 그녀가 살아온 저택은 남자라고는 발도 못 붙이는 금남의 구역이나 다름없었다. 고란 홀이 남자가 저택에 들어오는 꼴을 보기는 싫어했기에 집사도, 메이드도 모두 여자였다.
그렇기에 자연스레 그 저택에서 헌터로서 길러진 성시연은…… 이성에 대한 경험이 전무했다.
그렇기에 태석이 손을 내밀었을 때 오만가지 상상을 다 했고…… 뭔가 야리꾸리한 상상 또한 하고 말았다.
‘변태도 아니고, 이게 뭐야.’
그리고는 서둘러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나 베란다 쪽으로 나갔다.
얼굴이 붉어진 것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애당초 고란 홀 님께서 무슨 생각으로 나와 이 사내를 같은 방에 묵게 한 건지 모르겠네!’
숨이 거칠어진 것을 참고 베란다에서 몸을 식히고 있었다. 땀이 삐질삐질 흘러나와 거친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이제 조금 나았다.
그때, 눈치 없는 태석 또한 따라 나왔다. 베란다 쪽에서 무언가를 주시하고 있는 시연을 보면서 말했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요?”
“히끅.”
순간 놀라서 딸꾹질을 하고 말았고, 태석이 문득 시연의 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열이 조금 있는 것 같은데. 얼굴이 너무 붉어요.”
“이건…….”
태석은 아 하면서 무언가 떠오른 듯 자신의 배낭이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가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여기, 해열제.”
태석이 조심히 손이 닿지 않도록 내밀었고, 시연 또한 겁에 질린 모습으로 손가락 끝으로 약을 잡아 입에 쑤셔 넣었다.
약을 입에 넣는 건지 코로 넣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겁에 질린 고양이 같은 시연을 보면서 태석이 생각했다.
‘남자를 싫어하는 건가, 아니면 나를 싫어하는 건가……. 부디 나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으면 하는데.’
태석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시연을 지그시 보았고, 시연은 그 시선을 간신히 견뎌내며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뭐, 뭘 그렇게 변태처럼 쳐다 봅니까.”
“아, 죄송.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문득 너무 뚫어져라 본 모양입니다.”
“으음…….”
시연이 어색하게 베란다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태석이 말했다.
“일단 저는 소파에서 잘게요.”
태석은 무리하게 침대에서 동침을 하는 것보다 훨씬 둘 다에게 이득이 될 거라 여겼다. 그렇기에 소파에서 자겠다고 한 것이었고.
“상관없어요. 마음대로 해요.”
시연은 침대에 동침하는 것을 피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동시에 뭔가 아쉽다는, 자신이 생각해도 기이한 변태 같은 생각이 드는 것에 자괴감이 들었다.
‘처음 보는 남자랑 동침이라……. 뭔가 타락하는 기분인데.’
차라리 자신이 소파에서 자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침대의 달콤한 푹신함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던 도중 베란다 밖에서 펼쳐진 성천주 의식을 보며 말했다.
“성천주 의식이 시작하네요.”
“성천주 의식?”
태석이 물었다.
“설마 모르는 겁니까?”
“아뇨,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라.”
태석은 성천주 의식을 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줄에 가로막혀 진로 차단을 방지하고 있고, 성천주 고란 홀이 기적이라고 불리는 마법과는 다른 무언가를 뿜어내고 있었다. 새하얀 빛들이 허공을 맴돌았고 그 빛들이 저 멀리에 있는 언데드들이 살고 있는 한성 놀이공원 쪽으로 빛이 향했다.
확실치는 않지만, 뭔가 한성 놀이공원의 어두침침한 모습이 밝아진 느낌이다.
“예쁘네요.”
태석이 솔직하게 답했다.
아름답다.
빛이 아름답고, 성천주 고란 홀의 외모 또한 아름다웠고, 그리고 은은히 퍼지는 기운들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시연이 미소를 지었다. 은은한 미소였다.
“저는 성천주님과 함께할 때 중 이 순간이 가장 좋아요.”
“의식의 순간 말입니까?”
“이 기운의 느낌은 뭔가 기분이 좋거든요. 하늘하늘한 게 꼭…… 사랑을 받는다는 기분이니까.”
“흐음.”
태석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기운을 탐닉했다.
서서히 의식이 흐려지고 기분 좋은, 어머니의 품속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태석은 어렸을 적에 어머니를 잃었지만, 그 전에 어머니에게 안겼을 때를 추억했다.
어머니에게 장난감을 사달라고 떼쓸 때, 넘어져서 울 때, 그리고 동생과 한바탕 싸우고 토라졌을 때.
어머니는 언제나 태석을 끌어안아 주고 위로해주거나 토닥이거나, 살짝 꾸지람을 했었다.
그때의 기분이 바로 이런 건가?
태석은 성천주의 축복, 기적의 기운을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사랑받는 기분이네요.”
그가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할 때였다.
펑! 퍼엉! 퍼어어엉!
“와.”
태석의 눈앞에 성천주 고란 홀이 환하게 터트리는 기적의 폭발을 보았다.
그리고 새하얀 무지개 같은 것을 보았다.
“저것이 바로 기적의 무지개. 기적이 일정 이상으로 터져서 퍼질 때 일어나는 현상이에요.”
시연이 설명했다.
태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멋지네요.”
그리고 의식이 끝이 나고, 언제 그랬냐는 듯 저 멀리 성천주 고란 홀이 다시 텐트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태석이 기지개를 켜며 소파에 누워 웃옷으로 이불을 만들어 누웠고, 말했다.
“그러면 잘 자요.”
태석이 침대에 누운 시연에게 말했고, 시연은 태석이라는 남자 때문에 긴장했던 탓인지 이미 잠들어서 숨을 새액새액 뱉고 있었다.
소파에 누워 그런 시연을 보다가 베란다 쪽의 남아 있는 기적의 기운을 느끼며 편하게 잠들었다.
꿈자리가 좋았다.
이제 내일, 언데드 사냥에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