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8. 성천주
“흐음, 흐음.”
여자아이였다.
대한민국의 높은 산 위에 지어진 저택. 그 저택에는 꽤나 귀한 인물이 살고 있었다.
성천주, 고란 홀이 바로 그 귀한 인물이었다.
세상이 괴수들이 넘쳐나고, 외계 종족 오크, 드워프, 엘프들이 지구로 찾아와 외교를 하는 이 날, 이 세상에는 헌터 말고도 또 다른 존재들이 탄생했다.
성천주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성천주는 지구에 대략 백여 명 정도가 탄생했고, 이들은 원래의 인물이 각성하는 형태의 헌터들과 달리 이세계의 포탈을 타고 탄생한 인물들이었다.
처음 탄생했을 때부터 노인일 수도, 고란 홀처럼 어린 여자아이일 수도 있었으며, 그렇게 탄생한 모습 그대로 평생을 살다 간다.
외계 종족들에게 얻은 정보에 의하면, 성천주들의 수명은 천 년 정도. 거의 열 세기 정도를 산다고 보면 된다.
그런 성천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주로 흑수정의 정화. 헌터들이 흑수정을 파괴하여 없앤다면, 성천주들은 자신들의 권능을 이용해 흑수정을 정화하여 인류나 외계 종족들에게 이로운 물질로 바꿀 수 있었다.
그렇게 변질된 정화된 흑수정은 헌터들의 힘을 증강시키기 위해 사용되며, 시중에 비싸게 팔린다.
그렇기에 이런 정화가 가능한 성천주들은 고귀한 혜택을 국가 차원으로 받으며, 고란 홀 또한 그런 고귀한 인물들 중 하나였기에 강원도의 산기슭에 저택이 지어져 그 저택에서 수십 명의 메이드와 집사들에게 보살핌 받고 있었다.
“흐음, 흐음.”
고란 홀은 자신의 몸을 정성스레 빗겨주고 있는 메이드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 기분 좋네.”
“기분이 좋으시다니 다행입니다.”
그녀의 몸의 머리카락이 정성스레 빗겨지고, 기나긴 백금발의 머릿결이 정성스럽게 다듬어졌다. 그녀에게 새하얀 드레스가 입혀졌다. 그리고 그 위에 검은 망토 같은 얇은 천을 둘렀다.
“오늘은 언데드들을 잡아야 하니까. 녀석들의 더러운 피가 묻으면 더럽혀질 테니…… 검은 천이라도 두르고 있어야겠지.”
새하얀 드레스를 좋아하는 그녀였기에 이를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더러워질 것을 염려하여 검은 천을 두르기로 했다. 검은 천을 고급스러운 핀셋으로 고정한 그녀가 몸을 빙 둘러 전신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새하얀 드레스에 속이 비치는 검은 천을 두르고, 백금발의 장발의 머리카락이 추욱 늘어져 허리 밑까지 왔다.
외모는 영락없이 열다섯 정도의 영국 소녀 같은 인상이고, 그 외모와 달리 표정은 거칠고 매서워 보였다.
“꽤 괜찮네. 그러면 슬슬 출발해볼까.”
“어디로 가실 예정입니까?”
“아까도 얘기했었지만, 한성 놀이공원에 가볼까 해. 그곳에 흑수정을 정화하려고.”
“하필이면 위험한 장소로 가실 생각이시군요.”
“뭐, 내가 죽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닙니다.”
고란 홀이 키득거리며 웃었고, 사죄를 하기 위해 고개를 숙인 그녀를 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굽신거린다니까, 이 녀석들.’
자신이 아무리 한국에 다섯 명뿐인 성천주 중 한 명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굽신거리는 것은 보기 좋지 않았다.
확실히 한국은 나이나 권력 등의 외부적으로 보이는, 높아 보이는 요소에 너무 굽신거리는 경향이 있었다. 처음 한국에 포탈에 의해 탄생했을 때 그렇게 느꼈고, 저택을 지어주고 그곳에서 편하게 살게 할 때는 도대체 뭔가 싶었다.
성천주 고란 홀은 이제 스무 살이 되었고, 외양상으로는 열다섯으로 보이는 꼬맹이 중의 상꼬맹이였다. 그런데도 자신에게 이렇게 귀하게 대접하다니…… 솔직히 고맙긴 하지만…….
‘기분 나쁘지.’
고란 홀이 말했다.
“그러면 슬슬 출발해볼까. 대충 제일 싸구려 차를 타고 가도록 하자.”
“운전은 누가…….”
“글쎄, 나랑 같이 싸워 줄 헌터가 직접 운전하는 게 좋지 않을까?”
“성시연 씨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래, 성시연. 걔랑 같이 가자.”
성시연은 이제 스물다섯 정도 되는 새내기 헌터였다. 그녀는 주로 빛 계열의 마법을 주로 쓰는 헌터였고, 언데드들에게는 쥐약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라면 이번 한성 놀이공원의 흑수정 정화에 꽤나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 녀석으로 하자.”
고란 홀이 서둘러 차를 타고 출발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한성 놀이공원으로.
푸른 새벽의 공기가 매섭도록 시렸다.
‘산 위에 지어서 그런가 춥네.’
엣취!
재채기를 크게 하며 성천주 고란 홀은 코를 훑었다.
한성 놀이공원에 도착한 태석은 주변의 풍경을 보고 살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파티원 구합니다! 빛 계열 마법 구사자 대환영이에요!”
“포션 팝니다! 저주 치료에 특효약!”
파티원을 구한다는 사람들과 포션이나 기타 잡다한 도구를 파는 사람들, 그리고 숙박집에서 헌터들에게 호객행위를 하고 있고, 식당에 들어가 술잔을 기울이는 헌터들이 있었다.
저 구석에는 은은한 붉은빛이 새어나오는 환락가가 대낮부터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환락가나 술집이 헌터들이 모여 있는 한성 놀이공원에서 기승을 부리는 이유는 간단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금방이라도 죽을지 모르는 헌터라는 직업 특성상 쾌락을 중시하는 풍조가 강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이런 것에 익숙지 않은 태석은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일단 휴식을 취할 숙박집을 찾을 뿐이었다.
그를 붙잡으려는 사람이 있어 그가 고개를 들어 올려 그 붙잡는 쪽을 보았다.
할머니였고, 도구 하나를 들이밀고 있었다. 포션 같은 것이었는데, 할머니가 그 포션의 마개를 따면서 말했다.
“정말 좋은 포션이라네. 이걸 마시면 기분이 제법 좋을 거야.”
“무슨 포션인데 그렇습니까?”
태석은 의구심이 먼저 들었기에 거절할 궁리를 찾고자 했고, 그때 할머니의 포션이 무언가에 의해 탁 하고 쳐져 날아가 땅을 나뒹굴었다. 땅에 떨어진 포션이 그대로 모든 내용물을 뱉었고, 할머니가 눈을 크게 뜨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포션을 땅에 떨군 마법을 날린 쪽을 보자 백금발의 여자아이 하나가 인상을 찌푸린 채 할머니를 노려보고 있었다.
“흑수정 근처 지역이 헌터들과 각종 쓰레기 같은 업소들로 더럽기로 유명하다지만 이렇게 더러울 줄은 몰랐어.”
태석은 여자아이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며 그 여아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백금발의 머리카락이 허리 밑까지 내려와 있고, 표정은 거칠고 매서웠으며, 하얀 드레스 위로 검은 반투명한 천을 둘렀다. 키는 15살 아이 정도로 작았으며, 외모 또한 그러했다.
하지만 묘하게 거친 인상 탓에 나약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태석이 말했다.
“도대체 저 할머니가 나한테 뭘 주려던 건데?”
“쉽게 말하자면, 마약. 좋지 않은 약. 마시는 것만으로도 일반 마약의 수백 배가량의 쾌락과 수천 배가량의 중독성을 유발시키지. 외계 종족들과 무역을 하면서 불법적인 경로로 들어온 건데……. 한국에서도 있을 줄은 몰랐군.”
“그보다 너는 누구야?”
한국말을 워낙 유창하게 하는 외국 여아 같았다. 마치 한국에서 나고 자란 여자아이 같았다. 게다가 자신을 도와준 것은 고맙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눈앞의 백금발의 귀한 여자아이를 신뢰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누구냐고 물은 것이었고.
“나?”
여자아이는 히죽 웃으며 거칠게 말했다.
“고란 홀.”
귀하게 자란 모양이지만, 품행은 거칠기 그지없다.
“이곳의 흑수정을 정화하기 위해 온 성천주야.”
성천주라는 말에 주변을 지나다니던 헌터들과 일반인들이 화들짝 놀라며 그녀를 보았다. 고란 홀이 주변을 째려보면서 소리쳤다.
“뭐야? 성천주 처음 봐? 이 새끼들이. 무시하냐?”
“아니, 무시하는 건 아니겠죠.”
태석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성천주는 꽤나 높은 사람대접을 받는 헌터들보다도 한 차원 더한 대접을 받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평생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해도 국가 단위로 대접하기 때문이다.
‘한국에도 성천주가 다섯 명뿐이었지.’
흑수정을 정화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성천주이기 때문이다.
태석이 말했다.
“그러면 한성 놀이공원의 흑수정을 정화하실 생각입니까?”
태석의 물음에 고란 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다. 그래서 뭐? 너도 같이하게?”
“아니, 성천주와 같이 한다면 좋을 것 같기는 한데…….”
“그러면 간단한 테스트를 해보도록 할까. 성천주와 같이 활동하는 건 헌터 입장에서도 아주 좋을 테지만, 나 또한 아무 헌터나 막 동료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리고는 성천주 고란 홀이 태석의 손을 확 낚아채어 잡았다.
성천주는 상대의 능력을 한순간에 알아낼 수 있었다. 그렇기에 태석의 능력을 알아내기 위해 손을 잡은 것이었고, 순식간에 태석의 영혼의 내부로 진입했다.
그리고 고란 홀은 보았다.
태석의 속에 있는 무언가를.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고란 홀이 비명을 지르며 손을 뗐다.
태석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무심한 눈으로 고란 홀을 보았고, 고란 홀이 겁에 질린 채 몸을 뒤로 슬슬 빼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도대체 뭘 기르고 있는 거야. 대체…….”
“뭐가요?”
태석은 알 수 없었다.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지만, 고란 홀이 대체 뭐에 놀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고란 홀의 표정은 그가 보기에 겁에 질린 아이를 보는 것 같았다. 마치 침대 아래의 괴물을 두 눈으로 보고 겁에 질려 울먹이면서 목에 졸린 상태의 아이를 본다면, 그가 보고 있는 고란 홀의 표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뭐에 놀란 거지.’
고란 홀이 떨리는 눈으로 태석을 보았다.
‘신? 아니야. 신이라고 하기에도 감히 그 존재를 신 따위에게 비교할 수 없을 정도야. 그렇다면 도대체 그 존재를 뭐에 비유해야 하지? 너의 속에 있는 존재를.’
그래, 마치 신을 가두는 신 이상의 존재.
고란 홀의 생각이 그에 미치자 고란 홀이 고개를 숙였다.
“감히 무례하게 대해서 죄송합니다.”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
“당신의 속에 있는 것의 정체. 도저히 알 수 없지만,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군요.”
“뭐에 그렇게 놀란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테스트는 통과예요?”
태석이 물었고, 고란 홀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쳤다.
“부디 저와 함께 행동해주세요.”
고란 홀이 그렇게 저자세로 나오자 태석으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좋은 일이겠지.’
자신의 능력을 확인해보고 고란 홀이 놀랐고, 그의 속에 대단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며 저자세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할 일은 간단했다.
“그러면 한성 놀이공원의 언데드를 잡으러 가는 건 언제입니까?”
“편하실 대로.”
자신이 유리한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는 것.
태석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면 내일 바로 가는 거로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