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날의 풍경 (完)
수백 줄기의 번개가 세레누스 하늘을 뒤덮었던 일은 제국 안팎으로 두고두고 화제가 되었다.
그날의 목격자들은 자신들이 느낀 어마어마한 충격과 본능적인 두려움, 그리고 묘한 황홀감을 쉽게 잊지 못했던 것.
반면 인터넷에 올라온 영상으로만 그 광경을 접한 이들은 처음엔 진짜일 리가 없다며 CG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다 수많은 증거 영상과 후기에 이어 뉴스까지 나오면서 한 박자 늦게 경악하는 이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진위 논란이 사라지면서,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스레 다른 곳에 초점이 맞춰졌다.
과연 그것은 자연현상이었나, 아니면 초능력자의 소행이었나.
어느 쪽이라고 해도 비슷한 전례가 관찰된 적이 없었기에, 대중은 미궁에 빠졌다.
일반인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막연한 추측뿐이었기에, 여기저기 올라온 영상들의 댓글 창에는 항상 갑론을박이 펼쳐졌다.
그리고 레이는 이러한 혼란을 조금 더 가중시키기 위해, 페니와 협력하여 그날 이후로도 꾸준히 도시에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를 뿌려댔다.
그런데 대중매체를 통해 자극적인 것을 워낙 많이 접한 탓인지, 사람들은 안전불감증에 걸린 것처럼 크게 불안해하거나 두려움에 떨지는 않았다.
오히려 젊은 층에서는 히어로가 등장한 것이라며 한 번 직접 만나보고 싶다고 말하는 이들이 늘었다.
마침 그 현상이 일어난 날, 세드릭 알무스가 잡혀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처럼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는 격으로 진실에 근접한 이들이 있는가 하면, 보다 근거 있는 이유로 레이를 의심하는 이들도 있었다.
솨아아···.
발렌시아 공작저의 아기방.
로잘리테는 며칠째 간간이 내리고 있는 비를 바라보며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화제의 그날 이후 박물관으로 멀쩡히 돌아온 시두스 엑시티움, 그리고 로스토크 근방에서 레이가 보여주었던 초능력.
두 사실을 조합해 보면, 그날의 진실을 추론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품에 글로리아를 안은 채 어르고 있는 남편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면 루체스 백작이 세드릭을 감옥에 보낸 거야?”
자세한 설명이 생략된 질문이었지만, 니콜라이는 단번에 알아듣고 대답했다.
“뭐, 그런 것 같아.”
“···부끄러운 일이네. 그 애를 알아온 세월도 그렇고, 우리가 먼저 눈치채고 나섰어야 하는 일인데.”
“그건 그렇지. 그래도, 좋은 녀석이 나타나서 다행이라고 봐.”
“응. 앞으로는 좀 더 살뜰히 챙겨줘야겠어.”
두 사람은 자신들이 하지 못한 일을 귀족 사회에 발을 들인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레이가 대신 해낸 것에 대해 미안함과 대견함을 느꼈다.
원래부터 그를 좋게 보고 있긴 했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그에 대한 평가가 올라갔던 것.
이처럼 레이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차기 발렌시아 공작과 공작부인의 든든한 지지를 얻은 순간.
내내 멀리서 우르릉거리던 천둥이 돌연 번쩍이는 번개와 함께 지척에서 울렸다.
콰쾅!
“으아아앙!”
“아, 진짜.”
겨우겨우 재우는데 성공했던 글로리아가 놀라서 울음을 터트리자, 니콜라이는 아내에게 아기를 건넨 뒤 자신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 * *
띠링!
[야, 내 집 지붕 위로 천둥 치는 소리 좀 안 나게 해라.]
[우리 애가 자꾸 깨잖아.]
“······.”
문자를 확인한 레이는 떨떠름한 얼굴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잠시 후, 요란하게 울던 세레누스의 하늘이 잠잠해졌다.
“백작님, 무슨 안 좋은 소식이라도 받으셨습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괜히 신경 쓰이게 해드렸군요.”
자신을 걱정해 주는 오스틴에게, 레이는 별일 아니라며 웃어 보였다.
그는 현재 새롭게 단장한 초능력자인권부 사무실에 막 도착한 참이었다.
곧 슐러 백작에게서 인계받은 영지를 시찰하러 갈 예정인데, 그전에 잠깐 시간을 내어 오스틴을 만나러 온 것.
“그나저나 이번에 장기 출장을 가신다고요.”
“예. 거리도 거리이고, 꼼꼼하게 둘러보려면 시일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모쪼록 잘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무언가 제 의견이 필요하신 일이 생긴다면 주저 말고 연락 주십시오.”
“말씀만으로 든든하군요. 그래도 되도록이면 방해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걸은 두 사람은 곧 오스틴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레이는 전과 달라진 사무실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다가, 한쪽 벽면을 차지한 무언가를 보고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대체···.”
그가 멍하니 중얼거리고 있자, 오스틴이 다가와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이건 저희가 TFT 시절부터 지금까지 수집한 자료 중에 가장 인상적인 사건들을 정리해 둔 것입니다.”
“아···.”
“초능력자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일만큼이나, 그들이 사회에 어떤 위협을 끼칠 수 있는지 파악하고 경계하는 것도 저희 부서의 할 일이니까요.”
“음···.”
“하하, 백작님께서도 이 광경들을 보시고 말문이 막히시나 보군요. 저도 처음 한데 모아서 보았을 때 마찬가지 심정이었습니다.”
레이는 오스틴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사진들은, 공교롭게도 레이와 그의 일행이 지금껏 남긴 행적을 전시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촛불 심지처럼 상층부가 활활 타오르고 있는 초고층 빌딩, 반절이 무너져 내린 오페라 하우스, 중간이 뚝 끊어진 대교.
지붕이 통째로 날아간 천문대와 폭격을 맞은 듯 초토화된 공장지대, 수많은 가로등이 모조리 터져나간 대로 등등.
인공위성으로 촬영한 듯한 사진들도 여럿 있었다.
전투용 드론들을 터트려 버리는 전기로 된 인공 태양, 땅속에서부터 무너져 내리는 산, 그리고 무장한 선박들 사이로 떨어지는 번개 줄기들까지.
몇몇 사진 밑에는 ‘초능력에 의한 현상으로 추정됨’이라는 문구가 조그맣게 적혀 있었다. 물증은 없어도 심증은 있다는 뜻.
화룡점정은 정중앙에 있는 디지털 액자였다.
수백 개의 마천루 위로 내리치는 번개의 영상이 반복 재생되고 있었던 것.
오스틴은 아직도 생생한 그날의 일을 떠올리며 레이에게 말했다.
“이제 와서 하는 얘기입니다만, 역시 이만한 위력을 낼 수 있는 것은 백작님의 조력자라는 그 초능력자이겠죠?”
“······.”
비록 레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오스틴은 그가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엄청난 초능력자가 저희 편이라 정말로 다행입니다. 염치없는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백작님께서 앞으로도 그분과 정부 사이를 잘 조율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스틴은 깊은 신뢰가 담긴 태도로 레이에게 부탁했다. 그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엄청난 초능력자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 * *
사각사각.
레이가 외출해 있는 동안, 애런은 장기간 백작저를 비울 것을 대비해 미리미리 업무를 해치우고 있었다.
팔랑.
그의 손이 리암의 고용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이나투스 후작가와의 계약기간이 끝나고, 리암은 고지식하게도 레이에게 자신의 이력서를 들고 왔다.
물론, 레이는 그것을 받자마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를 고용한 상태.
애런은 리암의 소속이 정식으로 옮겨짐에 따라 필요한 절차들을 빠르게 결재해나갔다.
그 이후로도 그는 나이젤이 신청한 유기 동물 구조용 드론 열 대를 위한 추가 예산안, 초능력자 아카데미의 신학기 예산안 등을 살피며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렸다.
한껏 집중력을 발휘하며 신속하게 업무를 처리해가던 애런은, 문득 하던 일을 멈추고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스텔라 신전의 시빌이 운세 앱을 통해 번 돈으로 새로 장만한 이동식 신당. 그 앞에서 해맑게 포즈를 취하고 있는 서혜리와 루크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었다.
“······.”
애런은 괜히 주변을 한 번 둘러본 다음, 자신의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벌써 몇 개월째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반지 상자를 바라보았다.
달칵.
“다녀왔···.”
“······!”
레이가 서재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 애런은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서랍을 닫았다.
일반인보다 월등한 동체시력을 가진 레이는 애런이 급하게 감춘 것이 반지 상자라는 것을 알아보았으나, 굳이 별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한심해하는 표정을 딱히 숨기지도 않았지만.
이제는 서로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두 사람이었으나, 애런은 뻔뻔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레이를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막 이번 출장에 관한 서류를 보던 중이었습니다.”
“그래, 믿어 줄게.”
“···그냥 좀 넘어가 주십시오.”
애런은 그렇게 말하며 신속히 백작령 시찰 일정에 관한 자료를 줄줄이 늘어놓았다.
레이 역시 일 얘기가 나오자 금세 진지한 태도로 경청했다.
한동안 브리핑을 이어가던 애런은, 백작령의 잠재 가치에 대한 부분에 이르러서는 조금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아무래도 비옥하고 풍요로운 땅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으니.
그러나 레이는 이 부분에 대해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원체부터 영지에서 큰 이익을 기대하지는 않았기 때문.
대신, 무언가 알 수 없는 종류의 설렘이 가슴에 차오르고 있었다.
‘여행을 가는 느낌이어서 그런가?’
그때, 애런이 마치 그의 마음을 읽은 듯 시기적절한 말을 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휴양지와는 거리가 멀다고 해도, 얼음의 땅은 그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나 봅니다. 비록 그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겨울 기차 여행을 위해 영지를 찾는 여행객들이 꾸준히 있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이번에 열차를 타고 가볼까? 비행기 대신에.”
“흠, 관광산업을 지금보다 발전시킬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직접 체험해 보는 것도 좋은 생각일 것 같군요.”
애런이 빠르게 새로운 돈 벌 궁리에 빠져든 사이, 레이는 의자를 돌려 어느덧 새순이 돋기 시작한 창밖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간이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열차를 타고 처음 제국으로 들어온 것은 작년 봄. 그런데 벌써 계절이 돌고 돌아, 또다시 봄이 된 것이다.
그리고 참 공교롭게도, 같은 계절에 열차에 오를 일이 생겼다. 그렇게 생각하니, 무언가 가슴을 간질이는 기분이었다.
레이는 열차의 요란한 기적소리와 승강장 특유의 분위기, 검은 열차의 거대한 몸체와, 그 중간중간에 박혀 있는 오묘한 빛의 광석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출장이라고는 해도, 어쨌든 새로운 땅을 밟아보러 간다니까 조금 설레네.”
“예. 비록 넉넉히 시간을 잡고 다녀오실 수는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여행이라 생각하시는 것도 좋겠죠.”
“그래? 거리가 있으니 적어도 보름 정도는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그거보다 촉박하게 돌아와야 해?”
“보름은 어림도 없으십니다.”
애런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태블릿을 레이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빼곡히 나열된 일정의 가장 윗부분에 적힌 것은 황실 봄맞이 축제의 참석이었다.
“아니, 이 황실은 무슨 연례행사가 이리 많아?”
“그게 그들의 일이니까요. 그리고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참석하고 싶어도 못하는 귀족들이 수두룩합니다.”
그 이후로는 아카데미 신학기 관련 일정들이 잡혀 있었고, 세이비어 재단 역시 봄을 맞이한 여러 기획들을 앞두고 있었다.
이제는 일일이 지시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굴러가는 곳들이었지만, 그래도 레이가 직접 얼굴을 비추고 실정을 파악하는 것은 중요했다.
“뭐, 어쩔 수 없네. 조금 빡빡하더라도 열흘 안에 다녀오는 걸로···.”
그러나 레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화면을 넘긴 애런은 조금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그 화면에 표기된 건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일정입니다.”
다음 페이지에 있는 일정표는 조금 더 자유분방하게 작성되어 있었는데, 여기저기서 들어온 문자들을 시간순으로 나열한 것처럼 보였다.
애런은 그중에서 별표 처리가 된 몇 가지를 짚어주며 설명을 덧붙였다.
“우선, 류양이 택배 사업의 슈네스펠트 진출 여부와 관련하여 백작님과 의논하고 싶다고 요청했습니다.”
“라이트 택배가 제국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하긴 했지.”
“그리고 바네사 쪽에서도 연락이 왔습니다. 갑자기 플루투스의 마스터가 제국을 방문할 예정인 것 같다고 하는데···.”
“뭐?”
“아무래도 이쪽은 당분간 꽤나 시끄러울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한동안 들여다보지 못했던 블루벨 상회와의 협력, 2호점 개관을 앞두고 있는 루체스 갤러리에 관한 건, 루체스 주얼리의 봄 시즌 컬렉션 계획, 그리고 스페스 공화국에 루체스 에너지 지사 설립 계획 등등, 애런의 보고는 줄줄이 이어졌다.
잠시 후, 레이는 어느새 다소 혼미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출장은 일주일로 줄이고··· 이동하는 중에도 원격으로 처리할 수 있는 것들은 바로바로 처리하면···.”
맑게갠 어느 봄날,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루체스 백작저의 풍경이었다.
* * *
안녕하세요, 퍼플픽션입니다.
여러분의 따듯한 응원 덕분에 완결까지 무사히 집필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환생자들의 세계>를 함께해 주신 모든 독자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퍼플픽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