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상 물어보기
페니가 세레누스 상공에 시두스 엑시티움을 띄우기 몇 시간 전, 루체스 백작저.
“차 향이 좋군요.”
따사로운 햇볕이 가득한 온실로 초대된 헤이든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는 한창 서류와 씨름하고 있을 시간에 집무실을 벗어난 것이 퍽 기꺼운 모양인지, 온실 곳곳에 맺힌 꽃망울들을 하나씩 톡톡 피워내기까지 했다.
“먀옹!”
그 갑작스러운 변화에, 온실 구석에 숨어서 뒹굴고 있던 쿠키가 깜짝 놀라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녀석은 원체 성격이 느긋한 고양이답게 금방 차분해지더니, 헤이든에게 살랑살랑 다가와 그의 다리에 얼굴을 비볐다.
“···동물들은 누가 힘을 썼는지 아는 걸까요?”
“그렇다기보단, 아마도 제가 예전에 캣닢을 준 적이 있어서 기억하는 걸 겁니다.”
헤이든이 손을 뻗어 쿠키의 귀 뒤를 긁어주자, 녀석은 가르릉 소리를 내며 좋아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빈센트의 무릎 위로 냉큼 뛰어올라 자리를 잡았다.
레이는 무엄하게도 이나투스 후작을 방석으로 삼아버린 자기 집 고양이를 황당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가끔 나이젤이 고양이들이 세계 최강의 존재라는 말을 하던데, 아무래도 맞는 것 같습니다.”
“하하, 그리 틀린 말은 아니군요.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주변에서 집사를 자처하며 뭐든지 해주려고 안달이니 말이죠. 그리고···.”
헤이든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레이를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그는 레이가 오늘 자신들을 무슨 이유로 초대했는지, 그리고 어째서 쉽사리 먼저 얘기를 꺼내지 못하고 있는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먼저 대화의 물꼬를 터주기로 했다. 물론, 레이를 놀릴 기회도 놓치지 않으면서.
“가끔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구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 말씀이십니까?”
“주군을 향한 충성심이 지나친 나머지, 광신도 집단처럼 변하는 이들이요. 마치 일렉티가 당신을 따르는 것처럼 말이죠.”
“······.”
레이는 마지막 말에 여러모로 동의할 수 없었으나, 구태여 반박해 봤자 자신의 정신 건강에 해로울 것임을 직감하고 그만두었다.
대신, 그는 무릎 위에 올라온 솜뭉치를 가만히 쓰다듬고 있는 빈센트에게 질문을 돌렸다.
“후작님에게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까?”
“흠. 마음 같아서는 헤이든이라 하고 싶지만, 우리 수석 보좌관께서는 늘 품에 사직서를 들고 다니셔서 말이지.”
“이런, 들켰나요?”
“상관없네, 어차피 영원히 처리해 주지 않을 거니까.”
“그것참, 끔찍하게 영광스러운 말씀이군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떨떠름하게 대답하는 헤이든을 보며, 레이는 역시 상사에겐 제아무리 헤이든이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종종 있기는 하지. 필요 이상으로 나를 위하려 드는 가신들 말이야.”
“뭐, 높은 위치에 있는 분들에게는 흔히 있는 일이라고 봐야겠지요.”
“음···.”
“무언가 커다란 은혜를 입은 사람일수록, 혹은 동경하는 마음이 클수록, 자신이 모시는 분을 위해 자꾸 무언가를 하려 들기 마련입니다. 다만 실제로 도움이 되기보다는 골칫거리를 선사할 가능성이 더 많겠지만요.”
헤이든의 다소 냉정한 평가를 들으며, 레이는 여황제가 해주었던 충고가 떠올랐다.
‘아랫사람 단속을 잘해야 한다고 했지. 과한 충성심에 헛짓을 저지르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고.’
특히 전도유망한 젊은 주인을 따르는 사람일수록 그렇게 되기 쉽다고 했었다.
그때는 그저 갓 백작이 된 젊은 청년에게 해주는 의례적인 충고 같았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닌 듯했다.
‘어찌 되었든, 이제 그만 본론으로 들어가야겠지.’
레이는 어느새 진지한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는 빈센트와 헤이든에게, 지금까지 세드릭 알무스와 그 일당에 대해 알아낸 것들을 전했다.
그리고 이야기하는 내내 차분한 표정으로 경청하는 두 사람을 향해 한마디 덧붙였다.
“왠지 그러실 것 같다고 생각은 했지만, 역시 별로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최근 들어 레이 씨가 무언가 하나씩 이뤄낼 때마다 반응하는 그를 보며, 저희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세드릭, 그자를 따르는 학생들과 그 일당들도 ‘그런’ 부류라고 보십니까?”
레이의 질문에, 빈센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드릭은 어린 시절부터 유독 그를 끔찍하게 위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넘쳐났으니까. 그 관심에 질식해버린 데도 이상할 것이 없을 만큼.”
제국에 둘 밖에 없는 공작가의 둘째 도련님. 그런데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고, 가문 내 세력 다툼은 치열한 상황.
그를 따르는 자들이 그를 과도하게 챙기려 드는 것도 충분히 이해 갔다.
레이는 길게 한숨을 내쉰 뒤, 자신이 알고 있는 추가적인 정보를 꺼내 놓았다.
“엘리엇 소르본이 그간 조부의 행적을 자체적으로 조사하다 발견한 것이 있다고 합니다.”
“뭐지?”
“데미안 소르본의 개인 자금 중 일부가, 국내 및 해외의 초능력자들을 암암리에 사들이는 데에 사용된 기록입니다.”
초능력자들과 관련해서는 필연적으로 함께하는 오스틴을 통해 알게 된 정보였다.
“장부에 기록된 것은 한 인력사무소였습니다. 저희 쪽에서 자체적으로 조사하며 관련된 이들을 하나씩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세드릭 알무스를 모시는 집사의 이름이 나오더군요.”
세드릭 알무스의 측근이 초능력자 인신매매했다는 증거를 포착한 것이다.
“···그렇군요.”
헤이든이 침중한 목소리로 중얼거렸고, 빈센트 역시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레이는 뜸 들이지 않고 말을 이었다.
“오늘, 세드릭 알무스와 그의 사람들에게 죄를 물을 겁니다.”
레이가 빈센트와 헤이든을 백작저로 초대한 이유는 바로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제국의 자존심이나 다름없는 대귀족을 직접 건드리겠다는 것.
당연하게도, 이번 일은 레이에게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일단, 대 알무스 공작가를 적으로 돌리게 되는 일이다. 부담스러운 것을 넘어, 수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게다가 작위를 받은 지 일 년도 되지 않은 신흥 귀족이, 유서 깊은 가문을 정면으로 들이박는 것이다.
전통 귀족들 입장에서는 레이가 고까운 정도가 아니라, 모욕적이라며 그에게 분노할 수도 있었다.
이번 일로 얼마나 많은 적들이 생길지, 앞으로 어떠한 파장을 불러올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
한 번도 이런 종류의 상황을 겪어보지 못했다 보니, 아무리 레이라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던 것.
레이는 이러한 고민들을 두 사람에게 있는 그대로 털어놓았다.
“솔직히 걱정됩니다. 저 혼자서 날뛰고 저 혼자만 책임지면 되는 것이 아니니까요.”
아무리 세드릭의 죄가 명명백백하다 한들, 알무스 공작가에서 루체스 백작가와 그에게 협력한 이들에게 어떻게 나올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하는 꼴만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 그리고 역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던 레이는 문득 빈센트의 눈치를 흘끔 보았다.
“제가 후작님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래도 제 뒤에 후작님이 계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말로 세드릭 알무스를 들이박아도 괜찮겠느냐고 마지막으로 빈센트의 의사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에 빈센트는 잠시 레이를 빤히 바라보다가, 슬쩍 올라간 입꼬리를 숨기지 않은 채 물었다.
“오늘 당장 계획을 실행할 거라고 하지 않았나?”
“예, 그렇게 됐습니다.”
“그러면 이미 다 준비가 끝났다는 뜻인데··· 그 정도면 내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라, 그저 통보하려고 부른 것 아닌가?”
어차피 마음을 정했으면서 왜 물어보는 척하냐는 질문. 이에 레이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하.”
“그리고 혹시나 정말로 안 되는 이유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되는 것이니까요.”
그러니 마음 편하게 말해 달라는 레이의 부탁에, 빈센트는 간단명료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언제는 안 그랬나?”
“큼. 그래도 이번 일은···.”
“알아서 해. 내가 무슨 권리로 널 막겠어.”
빈센트는 천천히 쿠키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네가 나타나 여러 일들을 해내면서야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더군. 그건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지.”
“···대귀족들은 가문 대대로 가깝게 지낸 탓에, 친척과 다름없는 관계라고 들었습니다. 그런 이를 대뜸 의심하고 뒤를 캐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리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알무스 공작가는 제국에서 유일하게 이나투스 후작가가 내부 사정을 샅샅이 파악하기 어려운 가문이었을 터.
레이의 위로 아닌 위로를 들은 빈센트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의 눈빛에는 약간의 슬픔과 안타까움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와 담담하게 말했다.
“결국 사사로운 감정에 눈이 가려졌다는 건데, 그건 그것대로 자존심이 상하는군. 아무튼, 이 기회에 고마움을 표하지. 네가 내 능력 밖의 일을 해주었어.”
“정말 고마우시면, 이번에는 정말 제 뒤를 봐주시면 됩니다.”
“물론이다. 별문제 없을 테니 그런 걱정은 넣어 둬.”
“···너무 쉽게 말씀하시는 거 아닙니까? 어쨌든 공작가와 그 세력들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이봐, 레이.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뭐 하지만···.”
갑자기 진지하게 목소리를 까는 빈센트 때문에, 레이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는 정말로, 정말로 돈이 많아.”
“······.”
예상치 못한 발언에, 레이는 저도 모르게 살짝 입을 벌렸다. 그러다 곧 정신을 차리고 어이없다는 듯이 반문했다.
“아니, 돈이면 다 되는 줄 아십니까?”
이에 빈센트는 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어린 동생을 타이르듯 말했다.
“아직 이런 쪽으로는 갈 길이 멀군.”
“아니···.”
“여기는 자본주의 사회다.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면, 그건 충분한 돈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지.”
“······.”
* * *
“오랜만입니다 루체스 백작님.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세레누스 다운타운에 자리한 한 초고층 빌딩. 그곳에서도 360도의 스카이 뷰를 자랑하는 한 고급 레스토랑 안.
저녁 타임 손님들로 가득 찼어야 할 이곳은, 현재 오직 레이와 세드릭을 위해서 비워져 있었다.
“저야말로 급히 잡은 약속인데도 이렇게 나와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하, 저는 늘 한가해서 괜찮습니다.”
최고의 셰프가 솜씨를 발휘한 애피타이저가 나오고, 다시 메인 요리가 나올 때까지, 두 사람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잡담을 이어갔다.
“그나저나 이 레스토랑은 저녁식사를 하면서 보는 노을이 참으로 장관인데, 오늘은 안타깝게도 날이 흐리군요.”
스테이크를 썰던 세드릭이 문득 도시의 하늘을 온통 뒤덮고 있는 회색 구름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레이는 지금 저 아래 도시공원 어딘가에서 이 하늘을 만들어냈을 이를 생각하며 여상스레 대답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모처럼 큰일을 준비하신 날인데, 이렇게 날씨가 흐려서 괜찮을까 모르겠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