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오는 싸움은
뻑! 빡!
“큭!”
“커헉!”
경쾌한 소리와 함께, 두 괴한이 바이크에서 굴러떨어져 얼음 위를 나뒹굴었다.
인간의 범주를 아득히 벗어난 속도로 빙판을 내달린 바네사가, 괴한들을 그대로 들이받은 것이다.
왜애애앵!
카가가각!
운전자를 잃은 바이크들이 곧장 굉음을 토해내며 쓰러졌다.
바네사는 그것들을 잡아채더니, 마치 가벼운 장난감이라도 되는 것처럼 강기슭 쪽으로 휙 하니 던져 놓았다.
어이없을 정도로 빠르고 손쉬운 탈환. 그러나 바네사에게 이 정도는 몸풀기 축에도 끼지 못했다.
류양 쪽이 알아서 바이크를 챙겨가는 모습을 확인한 그녀는 곧바로 그쪽에 관심을 끊었다. 그리고 여전히 빙판 위에 쓰러져 있는 괴한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언제까지 널브러져 있을 거야? 내 구역에서 내 물건에 손을 댔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응?”
휘이이잉.
그녀의 푸른 드레스 자락과 백금의 머리카락이 매서운 겨울바람에 휘날렸다. 하지만 바네사는 추위 따위는 느끼지 못한다는 듯, 평온한 표정으로 괴한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순간.
퍼엉!
촤아악!
괴한들 뒤편에서 갑자기 한 남자가 강물과 함께 솟구쳐 올랐다. 그가 손짓하자, 두 개의 거대한 물기둥이 바네사를 향해 대포처럼 쏘아졌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대로 쓸려갈 정도로 위력적인 공격. 그러나 바네사는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물대포를 본 순간, 그대로 얼음에 하이힐을 찍어 넣었다.
솨아아···.
잠시 후, 마구 휘날리던 물보라가 걷히며 흔들림 없이 똑바로 서있는 인영이 드러났다.
“······!”
이건 공격을 당한 사람보다 공격을 퍼붓은 사람이 더욱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그 탓에 상대방이 멈칫하는 사이, 바네사는 얼음에 박아 넣었던 힐을 빼내더니, 다시 한 번 더 강하게 바닥을 찍어 내렸다.
쩍!
시원하게 금이 가는 소리와 함께, 괴한들이 올라가 있는 얼음판이 거센 풍랑을 만난 배처럼 크게 요동쳤다.
“엇···!”
바닥에 있던 두 명이 순식간에 굴러서 강에 빠졌고, 나중에 나타난 남자 역시 균형을 잃고 허우적거리다가 바네사가 있는 곳까지 굴러왔다.
“안녕?”
천사처럼 화사하게 웃은 바네사는 그대로 남자의 복부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커어억!”
내장이 뒤틀리다 못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에, 남자는 자신의 배를 움켜쥐며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러나 공중으로 치솟았던 얼음판이 철퍽 소리와 함께 다시 강 위로 떨어지는 순간, 강물이 작은 파도처럼 얼음 위를 덮치며 남자를 쓸어갔다.
“어라, 벌써 가는 거야? 재미없긴.”
바네사는 아쉬워하며 혀를 찼지만, 물속에서 빠르게 멀어지는 세 명의 모습을 보고 더 이상 뒤쫓지 않기로 했다.
* * *
잠시 후, 제이콥의 스튜디오 회의실 안.
방금 말리고 온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던 바네사가 느른하게 입을 열었다.
“요즘 여기저기서 자꾸 날파리들이 꼬인단 말이지? 꼭 그때처럼 말이야.”
여기서 바네사가 말하는 ‘그때’란, 제이콥을 필두로 한 일렉티 단원들이 정의 구현을 한답시고 플루투스를 이리저리 찌르고 다닐 때를 일컬었다.
“큼, 큼!”
졸지에 날파리들의 리더가 된 제이콥은 멋쩍은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그때 자신들이 무모했던 것도 사실인 데다, 바네사와 이렇게 협력관계가 될 것이라곤 꿈에도 몰랐었으니까.
“그, 큼! 그렇지 않아도 요즘 심상찮은 영상들이 다시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제이콥은 그렇게 말하며 스크린에 영상을 몇 개 띄웠다.
“저건···.”
“골치 아프군요.”
영상을 확인한 이들이 너도나도 탄식했다. 슈네스펠트에서 일렉티를 사칭하던 가짜들이 초능력자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퍼트렸던 미끼 영상과 매우 흡사했던 것.
“···아주 시원하게 날뛰어 대는군.”
마치 액션 영화처럼 도시 곳곳이 터져나가는 자극적인 장면들이 이어졌다. 문제는 이것이 픽션이 아니라 모두 실제 상황이란 것이었지만.
테러의 대상이 되는 곳들은 명품 매장이나 고급 레스토랑, 갤러리 등, 주로 부유층이 이용하는 장소들이었다.
“철없는 어린 세대, 혹은 극단주의 성향을 가진 인간들이 아주 좋아할 만한 영상이군요.”
“의적 행세는 시대를 막론하고 대중에게 잘 먹히는 컨셉 중에 하나이긴 하죠.”
“하지만 예전에 천문대를 날려버린 후에는 이런 영상도 완전히 자취를 감추지 않았었나? 제이콥 씨가 그들의 실체를 폭로하는 영상을 올리고 나서 말이야.”
레이 일행이 불법 실험이 자행되고 있던 천문대를 습격하고, 페니가 아예 건물 뚜껑을 통째로 날려버린 사건.
이후 제이콥은 납치와 인체실험 등, 가짜 일렉티가 저지른 만행을 고발하는 영상을 제작했다. 해당 영상은 순식간에 여기저기 퍼지며 화제가 되었다.
이 방법이 효과가 있었던 것인지, 그 이후 일렉티를 사칭하는 작자들이 영상을 올리는 일은 없어졌었다.
그런데 또 이런, 초능력자가 벌인 것으로 유추되는 테러 영상이 나돌기 시작한 것이다. 이번에는 슈네스펠트가 아닌 룩스 제국에서.
“그때 그놈들인 걸까요? 왕국에서 철수했다가, 이번엔 제국에서 날뛰는 거죠.”
“글쎄요. 그렇다기엔, 이번엔 저희를 사칭하고 나서지는 않아서···.”
“그럼 전혀 다른 집단일 수도 있다고 보시는 겁니까?”
“그럴지도 모르죠. 뭐가 됐든, 문제는 이런 영상이 빠르게 퍼지고 있다는 겁니다.”
“맞습니다. 이 정도 속도면 뉴스에서 일부 초능력자들의 불량한 행실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물론, 이 무명의 집단이 제국에 있는 초능력자 전체를 대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했을 때, 대부분의 대중은 그렇게 이성적으로 판단해 주지 않았다. 특히나 자신과 크게 상관이 없는 일이라면, 자세히 들여다볼 생각 자체를 안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답답한 상황에 다들 심각해져 있는데, 지금껏 조용히 듣고만 있던 레이가 불쑥 말했다.
“혹시 지능적 안티인지도 모르겠군.”
“지능적 안티요? 일렉티를 싫어하는 집단이라고 보시는 거예요?”
“일렉티뿐만이 아니라, 모든 초능력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 같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초능력자들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는 것을 반대하는 자들의 행동이 아닐까 싶습니다.”
최근 초능력자들과 관련하여 사회적으로 주목할 만한 변화라면 그것뿐이었다. 초능력자들의 인권 신장과 보호 확대, 그리고 대중들의 인식 개선을 위한 노력들. 모두 레이 일행이 벌여온 일들에서 기인한 결과였다.
“초능력자인권부까지 공식적으로 생긴 마당 아닙니까. 카엘레스티아 비밀 연구소 일도 있었고, 요즘만큼 대중들이 초능력자들의 인권에 대해 관심을 가진 적이 없지요.”
“그럼 그게 마음에 안 들어서 훼방을 놓는다는 건가요?”
“초능력자 행세를 하며 평판을 떨어뜨리고, 이를 위해 자극적인 콘텐츠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모은다라···.”
“음, 확실히··· 설사 진짜 초능력이 없어도, 그럴듯하게 영상을 만드는 것만으로도 효과는 있겠네요.”
서혜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가능성을 논하는데, 바네사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슈네스펠트에서는 어땠는지 몰라도, 오늘 내가 상대했던 놈은 진짜 초능력자였어. 셋 중에 하나뿐이었지만.”
“음, 그것도 그렇네요.”
“잠깐, 그러면 초능력자가 같은 초능력자들의 인식을 나쁘게 만들려고 한다는 말인가?”
“상식적으로 잘 이해가 안 가기는 하지만··· 초능력자들의 권리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무언가가 있다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게 뭘지 전혀 감이 안 잡히는데···.”
또다시 미궁으로 빠지는 대화에, 바네사는 뭐 이런 걸로 고민하냐는 듯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뭘 그리 복잡하게 생각해? 뭐가 되었든, 그때처럼 일단 보이는 대로 잡아 족치면 될 거 아니야. 안 그래?”
“그, 큼!”
“음···.”
그녀의 거침없는 발언에, 제이콥과 류양이 차례로 움찔했다.
제이콥은 좋지 못한 기억이 또 한 번 떠올라서였고, 류양은 빙판 위에서 거침없이 싸우던 바네사의 무시무시했던 모습이 떠올라서였다.
한편, 레이는 그녀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일단 보이는 대로 상대하는 걸로 하지.”
그렇지 않아도 왕국에서 그 짓을 하고 돌아다녔던 이들의 배후를 끝내 밝혀내지 못했던 것이 마음 한편에 남아있었는데, 어쩌면 실마리를 찾을 기회일지도 몰랐다.
레이는 자신보다도 이런 기회를 기다렸을 제이콥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감히 일렉티를 사칭하던 놈들을 꼭 잡고 싶다고 했잖아. 지금이 그때일지도 몰라.”
“···예, 마스터! 해내 보이겠습니다!”
제이콥이 의지를 불태우며 대답하는데, 돌연 스벤이 한 손을 높이 치켜들며 소리쳤다.
“저도, 저도 이번 임무에 꼭 참여하고 싶습니다! 예전에 단원들에게 보급했던 장비들보다 훨씬 업그레이드된 버전도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열의가 가득한 두 눈엔, 자신이 개발한 장비들의 성능을 시험하고 싶다는 욕망과, 이 일을 핑계로 대학원 과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이 동시에 번뜩였다.
이에 레이는 피식 웃으며 그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참여하고 싶은 게 아니라, 당연히 참여해야 하는 거다.”
“···아, 네!”
레이는 스스로를 평화주의자라 여겼다. 하지만 그의 사람들이 열과 성을 쏟아붓고 있는 일을 정면으로 방해하는 이들을 그대로 둘 정도로 너그럽지도 않았다.
“걸어오는 싸움은 받아줘야지.”
바야흐로 초능력자들 간의 전쟁이었다.
* * *
보름 후.
“아, 정말 감질나게!”
서혜리는 탕 소리가 나게 테이블을 내려쳤다. 일방적으로 전쟁을 선포한 것이 무색하게, 일렉티는 그 정체불명의 단체와 보름 동안 겨우 두 번 마주치는 것에 그쳤다.
이 정체불명의 단체는 정말로 초능력자들의 이미지를 훼손하는 것만이 목적인지, 군부가 대대적으로 나서기 애매한 수준의 자잘한 테러만 일으키면서 빠르게 치고 빠졌던 것.
그런 그들의 움직임을 일렉티가 포착하고 현장에 도착할 즘이면, 그들은 이미 자리를 뜬 후였다.
“도망은 또 왜 그렇게 잘 치는 거야?!”
서혜리가 열을 내는 이유는 사실 이것 때문이 가장 컸다. 그들의 흔적을 쫓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
그녀를 비롯한 오퍼레이터들의 감시망을 피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CCTV를 물리적으로 차단하는 것이었다.
전원이 꺼지거나, 카메라가 먹통이 되는 경우. 혹은 실력자가 있어서, 구역별로 외부 접속을 끊어내는 방식.
그리고 이들은 이 방법을 꽤나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그런 현상이 보이는 곳이 몇 군데로 특정된다면 그 구역의 인물들을 싹 털어보겠지만, 그때그때 자리를 옮기는 것 같아서 그것도 힘듭니다.”
평소 서혜리와 잘 맞지 않는 스벤 역시 옆에서 거들었다. 평소에 레이 일행이 자주 써먹던 방식을 역으로 당하니 더 약오르는 면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애로사항을 접수한 레이는 잠시 고민하다, 류양과 바네사를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부터 패밀리와 플루투스가 세레누스 순찰을 시작해 줘야겠는데.”
류양과 바네사는 둘 다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때로는 발로 뛰는 것이 가장 확실한 법이지.”
적들이 카메라의 감시를 효과적으로 피한다면, 실제로 돌아다니는 눈을 늘리면 그만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