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자들의 세계 (267)화 (267/274)

앞일은 모르는 법

올드타운 내에서도 대로에서 살짝 벗어난 한적한 위치. 여기에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건물, 널찍한 마당, 그리고 루크와 나이젤이 사용했던 수련장까지.

루체스 남작저는 초능력자 아카데미의 새로운 부지로 더할 나위 없이 적합했다.

그리하여 이곳에는 현재 교사진과 11명의 학생들은 물론이고, 마르셀라가 카엘레스티아 연구소에서 데리고 나온 7명의 아이들까지 넉넉하게 기숙생활을 하고 있었다.

저벅저벅.

겨울 햇살이 쏟아지는 복도를 걸으며, 레이는 오스틴에게 사립학교로 거듭난 저택의 곳곳을 구경시켜주었다.

사실 크게 뜯어 고친 것은 없었기에, 이곳은 일반 학교에서 찾아보기 힘든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시설을 자랑했다. 특히나 드넓은 식당과 도서관은 이러한 부분이 더욱 도드라졌다.

“학생 수가 많지 않으니 조금 더 가족적인 분위기의 학교여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곳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이 지역의 치안이 좋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고요.”

“그러셨군요.”

오스틴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눈에 담았다. 이런 훌륭한 곳을 아이들에게 내어주었다는 점에서, 그는 아이들을 향한 레이의 따듯한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백작님께서는 아이들에게 참 많은 것을 베풀어주시는군요.”

존중을 넘어 존경심이 한껏 드러나는 오스틴의 눈빛에, 레이가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남는 집을 빌려주는 것 뿐입니다. 겸사겸사 저도 이곳에 자주 들릴 일이 생겨서 좋고 말입니다.”

레이는 솔직히 양심이 살짝 찔렸다. 오스틴은 자신을 굉장히 선량하게 보고 있었지만, 이곳은 애초에 순수한 학교도 아니었으니까.

‘굳이 따지자면 아지트에 가깝지.’

첫 번째 아지트가 백작저라면 두 번째가 제이콥의 스튜디오이고, 이곳이 세 번째인 셈.

그리고 레이는 아카데미의 전체적인 관리를 페니에게 위임했다. 공식적으로는 평범한 양호선생님으로 지내면서, 학생들의 성장과 변화를 누구보다 면밀히 관찰하는 역할을 맡긴 것.

그는 중간상인 거리에서 주둔하던 멜리사도 불러들여 전산실 관리를 부탁했다. 더불어 그녀와 언제나 한 묶음으로 다니는 메이슨, 테이, 그리고 제프리를 경비로 세웠다. 혹시 모를 비상시 발 빠르게 대처해 줄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면서.

초능력을 가르칠 교사로는 일렉티 단원들과 제이슨, 그리고 유하란을 지목했고, 그 외의 과목을 담당할 교사진은 슐러 교수를 통해 유수한 인물들을 섭외했다.

‘모두 믿을 만한 사람들로 채워 넣었지. 물론···.’

레이는 마침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마르셀라와 연구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들은 레이를 알아보고 꾸벅 인사를 한 뒤, 다시 조용히 멀어졌다.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오스틴은 살짝 치가 떨리는 듯한 얼굴로 조용하게 말했다.

“엘릭서에서 파견한 사람들이군요.”

“예.”

“백작님, 저희 초인부는 엘릭서와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한 감시도 늦추지 않고 있습니다. 혹시나 저들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거나 한다면 꼭 말씀해 주시길 바랍니다.”

“예, 알겠습니다. 아직까지는 이쪽에서 철저히 부려먹고 있으니 너무 걱정 마시고요.”

페니와 멜리사가 버티고 있는 이곳에서 저들이 무언가 몰래 도모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으나, 레이는 오스틴의 말이 기꺼웠다. 어쨌든 같은 편에 공권력이 버티고 있는 것은 좋은 일이었으니까.

“그러면 이제 수련장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외부로 나온 두 사람은 저택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건물로 향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비명소리라 착각할 만큼 커다란 학생들의 환호가 들려왔다.

오스틴은 호기심을 드러내며 안에 들어섰다. 그리고 계단식으로 줄줄이 늘어선 촛대들 위로 순식간에 불이 번지는 광경을 목격했다.

화르르!

강단에 서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제이슨이었다.

초능력을 쓸 때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고려해야 할 점들을 하나하나 짚어주면서 시범을 보이는 중이었던 것.

그는 수백 개의 촛불들을 자유자재로 껐다 켜며 설명을 하다가, 일순 불꽃을 전부 그의 시그니처인 푸른 화염으로 바꾸어 초를 순식간에 모두 녹여버리는 묘기를 보여주었다.

“와아아아!”

수업보다는 신기한 공연을 본 것처럼 환호하며 손뼉을 치는 학생들의 뒤에서, 오스틴은 마찬가지로 박수를 보내며 말했다.

“꼭 마법을 배우는 학교 같군요.”

“조금 비슷하다고 할 수도 있겠죠.”

“무엇보다 학생들이 즐거워하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이런 수업은 다른 어디에서도 받을 수 없을 테니까요.”

대부분의 학생은 지금껏 제대로 된 훈련을 받기는커녕, 자신의 능력을 숨기기에 급급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여럿이 모인 공간에서 당당하게 초능력을 논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선할 터.

그리고 비록 서로 능력의 종류는 다르더라도, 이렇게 숙련된 자의 시범을 보는 것만으로 배울 수 있는 점이 많았다.

“어이쿠, 중요한 분들이 오셨군.”

“오래만입니다, 제이슨 씨. 혹시 수업에 방해가 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방금 막 끝났으니 괜찮습니다. 얘들아, 인사드려라. 너희들이 앞으로 꼭 알아둬야 할 분이시다.”

제이슨의 소개를 받은 오스틴은 아이들과 간단하게 인사를 주고받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다 다른 일정이 있는 것을 아쉬워하며 먼저 떠났다.

한편 제이슨은 다음 수업을 위해 에너지석을 포대자루째 들고 온 일렉티 단원과 교대한 뒤, 과거 레이의 서재였다가 이제는 원장실이 된 곳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의외로 적성에 맞는 듯했으나, 동시에 살짝 지쳐 보이기도 했다.

“아이들을 상대하는 것이 많이 피곤합니까?”

“음?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제이슨이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리자, 이제껏 조용히 따라다니기만 하던 애런이 슬쩍 웃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상대하느라 피곤한 건 학생들이 아니겠지요.”

“그게 무슨 소리··· 아.”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레이는 뒤늦게 제이슨의 상황을 떠올렸다.

복잡한 과거가 있는 전 배우자와, 시도 때도 없이 플러팅을 날리는 페니와 같은 공간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음, 제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닙니다만···.”

“나도 알아. 그러니까 둘 다 쓸데없는 생각들 마시게.”

“쓸데없는 생각입니까?”

“크흠! 나는 이제부터 애들만 바라보는 참 스승의 길을 걸을 거라고.”

“예에, 그러시겠죠.”

“애런, 자네 지금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건가?”

“그럴 리가요. 행운을 빕니다.”

애런은 그래도 숙녀분들께 너무 냉정하게 굴지는 말라며 계속해서 제이슨을 약 올렸다. 이에 제이슨은 무어라 대꾸하려다, 이내 무시하는 것을 택했다. 그리고 아카데미 교사라는 본분에 충실한 대화 주제를 꺼냈다.

“근데 그 유하란 선생 말이야··· 그, 괜찮은 거 맞나?”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필드에 사람 쉼터도 아니고 동물 쉼터를 만드는 프로젝트를 학생들한테 소개하던데, 그게 맞는 건가 싶어서 말이지.”

“···아, 그 프로젝트 말이군요.”

“뭐야, 이미 알고 있는 얘기였나?”

“저도 예전에 얼핏 들은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면 이것도 알고 있나? 동식물 쪽 초능력자들을 데리고 다음 학기부터 ‘테라포밍을 목적으로 한 생태계 변형’에 관한 리서치 프로젝트를 진행할 거라던데···.”

이게 정녕 괜찮은 것인지 묻는 제이슨의 눈빛에, 레이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리다가 그냥 주제를 돌려버렸다.

“···그보다, 세드릭 알무스 쪽에서 보내온 학생들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다들 실력이 좋아. 똑똑하고. 이런 말 하기 뭐 하지만, 살짝 맹한 구석이 있는 일렉티 애들 하고는 비교가 안 될 정도야.”

레이는 그래도 우리 애들이 착하지 않냐고 한마디 하려다가, 제이슨이 내미는 태블릿 화면에 시선을 빼앗겼다.

전기 초능력자가 낼 수 있는 파괴력을 측정해 보는 영상이었다.

[파지직! 콰앙!]

“···정말로 실력이 괜찮군요.”

대여섯 개의 에너지석을 한 번에 폭발시키는 데 성공한 여학생을 보며 레이가 나지막이 감탄했다.

보통 사람들은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에 감탄하겠지만, 레이는 그녀가 보여주는 컨트롤 능력을 높이 사는 것이었다.

“전혀 힘들어하지 않는군요. 거기다 세심하고 세련된 컨트롤은, 아무래도 성격이 묻어나는 부분 같고요.”

“제시카, 18살이네. 그 다음에 나오는 남자애는 19살인 매튜이고.”

19살은 독립해서 직장을 구할 수도 있는 나이였으나, 반년이라도 아카데미를 체험해 보라는 세드릭의 권유로 오게 된 학생이었다.

[화르르! 퍼엉!]

무서운 기세로 주변에 번져가며 이따금씩 폭발하는 불길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리고 제이슨도 그 점을 지적했다.

“아카데미 밖에서 반대 세력으로 마주친다면 꽤나 애를 먹을 능력들이라고 봐야지.”

그런데도 계속 가르칠 것이냐는 질문을 내포한 말이었다.

“지금이야 어설픈 구석이 있는 애들이라고 해도, 몇 년만 있으면 한 사람분의 몫을 해낼 거야.”

“예, 그러니 조금 더 성심성의껏 가르쳐 주십시오.”

“···진심인가?”

“이 아이들이 반드시 저희 반대편에 설지는 아직 모르는 것 아닙니까.”

냉정하게 말하자면 위협이 될 수도 있는 초능력자들의 특성을 미리 파악해 두자는 것이고, 조금 감성적으로 말하자면 이들이 자신의 힘을 올바른 곳에 쓸 수 있도록 이끌어 달라는 뜻이라고 레이는 설명했다.

“자네 뜻이 정 그렇다면 나도 최선을 다하겠네만, 그러다 이 아카데미 출신이 나쁜 짓을 하고 다니기라도 하면 어쩔 생각인가?”

레이는 차분히 말을 골랐다. 그가 지금까지 만난 아이들은 모두 그의 말을 잘 들어주었기에.

“그때는···.”

* * *

부우우웅!

류양은 자신의 패밀리원이자 새로 출범한 라이트 택배의 직원들과 몇 개의 팀으로 나뉘어 배달 중이었다.

물품은 라히툼 갤러리의 경매품.

바네사는 어느새 세레누스에도 골드 및 실버 등급 브로커들을 여럿 두었는데, 그들이 라히툼 갤러리로 경매품을 조달하기 시작했던 것.

운송품의 대해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는 류양은 이곳 브로커들에게도 환영받는 배달 수단이었고, 류양 역시 슈베린에서보다는 훨씬 수월하고 안전하게 돈을 벌 수 있어 만족했다.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관계.

[와, 형님들! 제국의 겨울은 정말 춥다!]

칼바람을 뚫고 달리는 와중에도, 반리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떠들었다.

여기에 대답한 사람은 스벤이었다. 그는 니콜라이가 억지로 밀어 넣은 황립 대학원에 다니면서 받은 스트레스를, 오퍼레이터 일에 자원하며 해소하는 편이었다.

[제국은 슈네스펠츠 왕국보다 훨씬 북쪽에 있으니까요. 당연한 일입니다.]

세레누스의 겨울은 원래부터 슈베린의 겨울보다 훨씬 추웠다. 게다가 올 겨울은 넓은 피게르강 대부분이 얼어버릴 만큼 유난히도 추웠다.

그러나 산전수전을 다 겪은 류양과 패밀리원들에게 이런 추위 따위는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았다.

라히툼 갤러리 목전에 다다랐을 때, 불현듯 가로등 몇 개가 터져 나가며 바이크를 덮치기 전까지는.

콰장창!

끼이이익!

큰 사고로 이어질 뻔한 순간이었으나, 신기에 가까운 라이딩 실력을 가진 이들은 침착하게 피해냈다.

[속도 멈추지 말고 그대로 달려!]

그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다만 문제는 다른 팀이었다.

[B 팀쪽 두 명이 습격자들에게 바이크를 강탈당했습니다!]

류양은 B 팀이 달리던 곳에서 바이크 두 대가 갑자기 강으로 방향을 틀더니, 그대로 뛰어드는 것을 보았다.

[미친···!]

아무리 강 전체가 단단하게 언 것처럼 보인다지만, 중앙 쪽은 얇은 얼음 밑으로 흐르는 물이 드문드문 보일 정도다.

그야말로 따라올 테면 따라와 보라는 도발에, 류양은 자신만 따로 빠져서 저들을 추격해야 하는 것인지 고민되었다.

그러나 그가 결론을 내리는 것보다, 이어폰에서 스벤의 대답이 들려온 것이 더 빨랐다.

[예, 저희 쪽 미친 고객님이 출동했습니다!]

[뭐?]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따져 물으려던 순간, 류양은 보았다.

하이힐을 신은 바네사가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얼음 위를 질주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바이크 강탈범들을 때려잡는 모습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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