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자들의 세계 (266)화 (266/274)

미래를 위해서

뜻밖의 얘기를 들은 레이는 이번에야말로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슐러 백작령이라니.’

지금 에밋 슐러 교수의 영지를 빼앗아 자신에게 넘겨주겠다는 말인가? 그런 의문이 든 레이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슐러 교수를 향했다.

그러나 사전에 이미 얘기가 다 되어있었던 듯, 노인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그는 홀짝이던 찻잔을 내려놓더니, 별거 아니라며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내겐 필요 없는 땅이니 부담 갖지 말고 받게나. 솔직히 말하면 연구하느라 바빠서 직접 가본 적도 없는 곳일세.”

“아무리 그래도 제가 어찌···.”

“내가 괜찮다고 하지 않았나. 작위와 영지를 물려줄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늙으니까 관리하는 게 귀찮기만 하더라고.”

그렇지 않아도 할 일이 태산인데 영지와 관련된 보고까지 받으려니 영 피곤하다는 그의 말은 꽤나 진심처럼 들렸다.

이에 여황제는 그것 보라는 듯 피식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서류에 사인하는 것도 귀찮아진 슐러 백작보다는, 루체스 백작이 영지를 국익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훨씬 잘 책임져 줄 것이라 기대하겠네.”

갑자기 돌아온 하대는 여황제로서 내리는 명령임을 뜻했기에, 레이는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믿겠습니다.”

여황제가 흡족한 미소로 대답하는데,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슐러 교수가 대뜸 한마디 했다.

“폐하께서는 참 양심도 없으십니다. 비옥한 토지도 아니고 영지의 반이 얼음인 곳을 내리시면서 뭘 그리 부담을 주십니까? 뭐 나올 게 있다고요.”

“슐러 백작은 가능성이나 혁신이라는 단어 모르는가? 하긴, 약쟁이가 영지 개발에 대해 뭘 얼마나 알겠나.”

“그 약쟁이한테 백작위를 주신 것이 폐하십니다.”

“그야, 약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만들었으니까.”

“그거면 됐지 뭘 더 바라십니까? 아무튼, 약 밖에 모르는 저라도 그 땅에서 나올 게 없다는 건 알겠습니다.”

“사실 현재로선 정말 쓸데없는 곳이긴 하지.”

“그러니 심보가 고약하시다는 겁니다.”

“아하하하!”

마치 오래된 친우처럼 편하게 농담을 주고받던 두 노인은 끝내 웃음을 터뜨렸다. 특히 호탕하게 웃은 여황제는 이내 레이를 돌아보며 양해를 구했다.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더 좋은 영지를 주고 싶었으나, 노른자라 할 수 있는 곳들은 이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미 다 나눠 가진 상황인지라.”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레이가 가져가게 될 곳은 제국 최북단에 위치한 땅.

딱히 전략적 요충지도 아니고 이렇다 할 가치도 없어서, 타국의 견제도 없이 통으로 제국의 소유가 되어버린 곳이었으니까.

레이가 여황제의 말에 대답하려던 순간, 슐러 교수가 헛기침을 하며 설명을 늘어놓았다.

“큼. 그렇다고 아주 형편없는 곳은 아닐세. 물론 북쪽에 토착민 거주 지역에 가까워질수록 개발이 안 되어 있기는 하지만, 도시는 제대로 현대화되어 있다네. 작지만 공항도 있고. 다만 도로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아서, 영지 곳곳을 돌아보려면 차량보다는 경비행기를 타고 다녀야 좋다더군.”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면서 열심히 설명하는 모습이, 행여나 레이가 내심 실망할까 봐 급하게 말을 덧붙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레이가 느끼는 감정은 실망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음에 든 젊은이에게 뭐라도 하나 해주고 싶은 슐러 교수의 마음이 와닿았기에 더욱 그러했다.

여황제도 마찬가지였다. 백작령이 쓸모 없는 땅이라고 슐러 교수와 농담 식으로 강조한 것도, 어쩌면 다른 귀족들의 시선을 고려해서 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평민 출신의 젊은 백작이란 이유로 탐탁지 않아 하는 이들도 분명 있을 텐데, 과분한 영지까지 하사 받았다고 알려져서 좋을 것은 없겠지.’

마치 손주의 앞길을 염려해 주는 듯한 두 노인의 인자한 눈빛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몰랐다.

“분에 넘치는 선물을 받았는데 어찌 불만을 품겠습니까. 저를 믿어 주신 만큼,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레이는 진심을 담아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솔직한 심정으로, 제국 최북단도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는 얼음 위에 테마 호텔이라도 세울 인간이 있었으니까.

‘애런이 뭐라도 하겠지.’

* * *

“백작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벌써?”

서재에서 새 백작령에 대한 서류를 보고 있던 레이는 그것을 책상에 내려놓고 집사를 따라 나섰다.

‘아직은 좀 낯설단 말이야.’

레이는 응접실로 향하는 긴 복도를 걸으며 주변을 눈에 담았다. 그는 현재 백작위와 함께 하사 받은 백작저로 옮겨온 상태였다.

그리고 그의 새로운 집은 얼마 전까지 지내던 저택보다 족히 5배는 되는 것 같았다.

드넓은 연회장을 비롯해 남작저에는 없던 다양한 공간이 생긴 것은 물론이고, 그 하나하나가 훨씬 넓고 화려했다.

그 중에서 레이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은 단연 자신의 침실이었다. 이사하는 김에 최고급 침대와 침구를 들여놓은 덕분에 수면의 질이 크게 향상되었던 것.

그 외에도 자신의 개인 서재와 회의실이 철저하게 분리된 것도 흡족했다.

이처럼 전체적으로 넓어지고 방의 개수도 많아졌지만, 루체스 백작저는 벌써부터 꽉 찬 느낌이 들었다.

일단 식구들마다 자기만의 공간을 넉넉하게 배정받은 것이 컸는데, 개인 음악실을 갖게 된 루크는 약과였다.

일이든 여가든 모두 집에서 해결하는 서혜리는 아예 저택의 지하층 절반을 차지했던 것. 거기에 맥시멀리스트 성향을 마음껏 살려 공간을 꾸민 결과, 그녀는 첩보 영화에서나 볼 법한 상황실을 만들어냈다.

나이젤 역시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는 만큼 상당한 공간이 주어졌는데, 사실 그의 경우엔 혼자서만 쓰는 것이라 하기 애매했다.

그의 방에는 레이도 모르는 사이에 들여온 일곱 마리의 아기 고양이가 있었으니까.

레이는 나중에 그 기운을 감지하고 무슨 일인지 보러 갔다가, 꼬물거리며 돌아다니는 털뭉치들을 발견하곤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다.

그것을 키워도 된다는 허락이자 딱히 가까이하고 싶지는 않다는 뜻으로 이해한 나이젤은 웬만하면 방 안에서만 지냈다.

물론 아무리 식구들이 공간을 넓게 쓰고 개인 짐이 많아졌다고 해도, 대저택을 다 채울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니 이 드넓은 백작저가 휑해 보이지 않는 데에는 집주인보다 더 신이 난 알베르트와 애런이 예술혼을 불태우며 열심히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도 한몫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실제로 저택을 드나드는 인원이 많아졌다. 루체스가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의 수가 전에 비해 두 배가 된 데다, 오늘처럼 레이를 찾아오는 손님의 수도 크게 증가했던 것.

“오랜만입니다.”

레이가 활짝 웃으며 손님을 맞이했다. 해가 바뀌고 그가 백작이 된 사이, 초능력자인권부 장관으로 임명 받은 오스틴 콕스였다.

* * *

“초능력자인권부라면, 임시였던 TFT가 이제 정식 부서로 승격된 것입니까?”

“예, 맞습니다. 아직 인원도, 규모도 그대로이지만, 부서의 방향성이 달라진 것에 의의를 두고 있습니다.”

강력한 초능력자들을 색출해 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초능력자들에게 제국의 시민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인권을 보장해 주는 것이 주된 목표라고 오스틴은 설명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당장 극적인 변화가 있지는 않을 겁니다. TFT가 만들어질 당시 여러 사람들의 이해가 얽혀있었던 만큼, 한동안은 여전히 규격 외 초능력자들을 추적하는 것이 주요 업무겠지요. 다만, 차차 부서의 이름에 걸맞은 쪽으로 운영되도록 노력할 계획입니다.”

“그렇습니까.”

“얼마나 많은 초능력자들이 우리 사회에 섞여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떤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지 이제 알게 되었으니까 말입니다.”

“장관님 같은 분이 초능력자인권부를 이끌게 되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군요.”

“저야 말로 이 분야에서 가장 큰 도움을 주실 수 있는 분과 함께 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현재로서는 정부보다 루체스가와 세이비어 재단이 초능력자들을 위해 훨씬 많은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우선, 레이가 이끄는 단체들은 초능력자에 대한 대중의 두려움과 거부감을 희석시키고 전반적인 인식을 개선하는데 앞장서고 있었다.

특히 초능력자 아카데미가 하는 역할이 컸다. 비록 사립이지만, 초능력자들을 위한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는 것 자체만으로 상징적이었던 것.

일반학교에서도 초능력자 학생들을 위한 교육 커리큘럼이 생길 토대를 마련해 주는 동시에, 일반인 학생들에게도 초능력자들을 나와 전혀 다른 ‘종’이 아니라 그저 조금 특별한 능력을 가진 교우로 느낄 수 있게 인식할 기회를 제공하는 일이었다.

“알무스 공작가에서도 아카데미에 학생들을 보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학생 수가 꽤 되겠군요.”

“그래봤자 11명입니다만··· 사실 그 정도만 해도 대단한 숫자라고 볼 수 있겠죠. 워낙에 흔치 않으니까 말입니다.”

레이는 세드릭 알무스가 보내온 7명의 아이들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그리고 살짝 양심이 찔렸다.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는 오스틴에게 또 한 번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었으니까.

‘아카데미에 상주하고 있거나 자주 오가는 초능력자들의 수를 알게 되면 경악하겠지.’

일단 학생 신분으로 재학 중인 일렉티 단원이 4명. 나머지 13명의 일렉티 단원들도 다들 어떤 식으로든 아카데미와 관련되어 있다.

여기에 이사장인 레이, 파트 타임 강사직을 맡은 제이슨, 그리고 가끔 후원 목적으로 들러 아이들의 상태를 살피는 헤이든까지 고려하면, 그야말로 초능력자들이 득시글거린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비록 이런 내부 사정을 밝힐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레이는 오스틴이 장차 아카데미의 가장 도움이 되는 외부 전력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아마도 그가 속으로 생각만 하고 차마 건네지 못하고 있으리라 짐작되는 것을 역으로 제안했다.

“말이 나온 김에, 새로운 아카데미 건물을 한번 살피러 가보시겠습니까? 아직 초능력자인권부에 도움이 될 만한 자료가 확보된 것은 아닙니다만, 학생들도 소개해 드릴 겸 해서 말입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오스틴이 반색하며 되물었다. 지금 초능력자인권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정보였다. 그것도 되도록 자세한 정보.

그러니 아카데미의 자료를 공유 받을 수 있다면 분명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다만, 그걸 먼저 요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남이 애써 모은 자료를 날름 빼 가는 것 같다는 것은 둘째 치고, 생각하기에 따라서 꽤나 민감한 개인 정보였으니까. 아무리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고는 해도, 감시의 목적이 없다고도 할 수 없었던 것.

이러한 부분을 레이도 모르지 않았지만, 그는 조금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앞으로 초능력자들이 당당하고 안전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정부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니 기왕이면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레이의 생각이었다.

‘내가 모든 초능력자들을 거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렇게 레이는 안색이 많이 밝아진 오스틴을 데리고 새로운 아카데미 부지를 찾았다. 다름 아닌, 그가 얼마 전까지 지내던 루체스 남작저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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