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보여야 할 사람
[···이러한 공로를 인정하여, 레이 루체스 남작에게 백작위를 하사하는 바이다.]
장내에 울려 퍼지는 엄숙한 선언에 이어, 여황제의 손에 들린 검이 레이의 양쪽 어깨에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슈네스펠트 왕국의 필드에서 맨몸으로 환생했던 레이가 룩스 제국의 백작이 되는 순간이었다.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폐하.”
“젊은 나이에 벌써 이만한 업적을 이룬 그대이니, 앞으로 더욱 많은 것을 보여주겠지?”
“···폐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래, 기왕이면 우리 아들도 많이 도와주고.”
여황제는 그렇게 말하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레이에게 악수를 건넨 뒤 퇴장함으로써 백작위 수여식의 모든 절차가 완료되었다.
‘생각보다 빨리 끝났네.’
현대에 들어서 이런 전통적인 예식들도 많이 간소화된 덕분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몇 번의 예행 연습이 필요했으나, 바로 옆에서 동선부터 고개를 숙이는 타이밍까지 전부 알려주는 진행요원이 따로 있어서 어려울 것은 없었다.
‘진짜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건 지금부터지.’
작위 수여식 뒤에 이어지는 칵테일 리셉션과 디너파티에서, 레이는 수많은 귀족을 상대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 중, 진심 어린 축하를 건네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일단 루체스가 식구들. 애런, 리암, 루크는 물론이고, 보통 이런 자리가 있어도 CCTV로 관찰하는 것에 만족하는 서혜리와 나이젤도 오늘만큼은 직접 와주었다.
다음으로 가장 든든한 아군은 레이를 귀족 세계로 끌어들인 장본인인 빈센트와 헤이든, 그리고 루체스 에너지를 함께하며 한 배를 타게 된 니콜라이가 있었다.
이외에도 에밋 슐러 교수, 키치너 백작, 페이 자작, 그리고 루체스 남작령이 백작령으로 승격된다는 연락을 받고 올라온 클라루스 시장, 피터 브루너까지도 확실한 레이의 편이라 볼 수 있었다.
‘솔직히 브루너 씨는 너무 오랜만에 봐서 바로 못 알아봤지만···.’
어쨌든, 이들을 제외한 인물들은 레이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심지어 안면조차 없는 경우도 허다했는데, 그런 이들의 목표는 대부분 레이가 아닌 여황제와 황태자에게 눈도장을 찍는 것이었다.
아무리 약 이백 년 전부터 룩스 제국이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다지만, 황실은 여전히 대대손손 이어진 부와 권력을 틀어쥐고 제국의 정점에 서있는 존재였으니까.
물론, 점점 주목받고 있는 레이 루체스라는 인물을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인연을 맺을 기회를 노리고 온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처럼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온 사람들이었지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자리가 엄연히 레이의 백작위 수여식이라는 것이었다.
즉, 레이는 오늘 자리한 모든 사람들을 한 번씩은 상대해야 한다는 소리.
“루체스 백작, 며칠 전보다 신수가 훤해졌군요.”
“후작님이야말로 나날이 빛이 나십니다.”
레이는 언제나처럼 차분한 색상의 드레스를 차려 입고 나타난 밀레스 후작을 향해 싱긋 웃으며 칭찬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마치 딸처럼 사이 좋게 붙어 있는 페이 자작을 향해서도 눈인사를 건넸다.
사냥 대회 때만 해도 깊은 대화를 나눈 적 없던 밀레스 후작이 이렇게 호감을 드러내는 것에는 그녀의 영향도 없지 않을 것 같았기에.
물론, 아마도 레이의 작위가 한 번에 두 단계나 상승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가능성이 높았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만.’
사실 밀레스 후작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아는 체를 해주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이는 레이가 주요 귀족들의 무리 안에 들어섰다는 것을 인정해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러나 밀레스 후작은 실질적으로 도움도 되면서 상대하기 힘들지 않은 몇 안 되는 경우였다.
이곳에는 교양 넘치는 말투로도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욕심과 오만함을 다 가리지 못하는 이들이 더 많았던 것.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다름 아닌 스피놀라 백작이었다.
“루체스 백작, 여기 있었군!”
“스피놀라 백작님.”
“오늘 여왕 폐하 앞에서도 참 늠름하더군! 역시, 사회 인식의 변화를 주도하는 젊은 귀족다워!”
그는 마지막 만남에서 레이의 사교계에서 포지션을 정의 내린 듯, 세상에 둘도 없는 사이처럼 레이에게 친한 척 들이댔다.
“하하··· 과찬이십니다.”
레이는 속으로 질색했으나, 겉으로는 미소를 유지하며 그를 상대했다. 그리고 적당히 핑계를 대고 그에게서 서둘러 멀어지다가, 다른 이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니콜라이와 잠시 눈이 마주쳤다.
“······.”
니콜라이는 마치 웃기는 장면을 봤다는 듯이 한쪽 입꼬리만 당겨 웃더니, 이내 다시 대화에 집중했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은근히 부아가 나서, 레이는 니콜라이의 대화 상대가 자리를 떠나자마자 그 자리를 냉큼 꿰찼다.
“도와주시지는 못할 망정, 그렇게 웃으시기 있습니까?”
“웃긴데 웃어야지 그럼.”
간결하고도 얄미운 대답에 레이의 눈썹이 잠시 꿈틀했으나, 그는 다른 주제로 대화를 이어 나가는 것을 택했다.
적어도 니콜라이나 빈센트와 얘기하고 있으면 접근해오는 이들의 숫자가 현저히 줄어드니, 이 기회에 한숨 돌릴 요량이었던 것.
“엠마 비서실장에게 듣자 하니, 요즘 회사에 출근도 안 하신다면서요.”
따지는 듯이 물었으나, 사실 그냥 하는 소리였다. 어차피 니콜라이는 일반적인 연구원이 아니라, 루체스 에너지 출범 당시 차별화된 기술 연구를 위해 특별히 초빙했던 것이었으니까.
이제는 어느 정도 자리도 잡았고 프로비던스를 견제하는데도 성공했으니, 발렌시아의 차기 공작인 그가 굳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그걸 본인이 모를 리 없었으나, 니콜라이는 레이의 얘기에 어울려주었다.
“저런, 육아휴직 신청이 제대로 안 들어갔나 보네.”
“직접 넣으셨습니까?”
“스벤에게 시켰지. 그나저나, 네가 나한테 회사에 성실히 출근하라고 잔소리 할 입장은 아니지 않아? 바지사장, 아니, 바지회장님이 말이야.”
“이래 보여도 보고는 전부 받고 있습니다.”
이처럼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는 두 사람을 향해, 세드릭 알무스의 형인 에드윈 알무스가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니콜라이 형님. 그리고 루체스 백작님, 백작으로 승급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그는 부드러운 미소와 목소리로 자연스레 대화에 끼어들었다. 니콜라이는 잔을 가볍게 들어 올리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고, 레이 역시 가벼운 목례를 건넸다.
에드윈이 다가온 순간, 다수의 시선이 이쪽으로 은밀하게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차기 공작들의 만남이라 이건가.’
둘의 사이가 좋든 나쁘든, 워낙 거물급들이다 보니 다들 호기심이 일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작 당사자들은 사람들의 관심에도 눈 하나 깜짝 않는 것이, 역시 난사람들이다 싶었다.
“백작님과는 신년 음악회 때 이렇다 할 대화를 나누지 못해 아쉬웠는데, 이렇게 기회가 생겨 다행입니다.”
에드윈이 기품 있는 미소와 함께 나긋나긋 말을 붙였다. 그 귀족의 표본과도 같은 모습에, 레이 역시 빙긋 웃어주었다.
제 동생과 대화를 주고받을 때는 한마디도 보태지 않다가 오늘 이렇게 따로 찾아온 데에는 필시 어떤 이유가 있으리라.
그런데 에드윈보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의외로 니콜라이었다. 이어지는 대화를 들으며, 레이는 두 사람이 자신의 예상보다 더 편한 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드릭은 안 왔나 보지?”
“예, 오늘은 몸이 좋지 않아서···.”
“쯧, 걔도 걱정이네. 아직 장가도 못 간 녀석이.”
안타깝다며 혀를 차는 니콜라이의 말에, 에드윈이 놀라워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형님, 방금 그 발언은···.”
“뭐, 왜.”
“이제는 정말로 아저씨가 다 되셨군요. 작년까지만 해도 안 그러셨는데 말입니다. 역시, 글로리아가 태어나서 그렇습니까?”
놀리는 듯한 말에도, 니콜라이는 픽 웃으며 인정할 뿐이었다.
“뭐, 그렇다고 봐야겠지. 그러는 너는 언제 결혼할 건데?”
“이런, 유부남 아저씨와의 대화는 지치는군요. 저는 이만 가보는 게 좋겠습니다.”
에드윈이 뒤로 물러나는 시늉을 했고, 레이는 내심 황당함을 느꼈다.
‘아니, 이럴 거면 왜 온 거야?’
그런 레이의 속마음이 들리기라도 한 것인지, 에드윈은 떠나기 전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앞으로 자주 뵙고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세드릭과도 좋은 친구 사이가 되어 주신다면 기쁠 것 같군요.”
친구 없는 동생과 놀아 달라는 부탁의 말을 끝으로 에드윈은 떠났다. 이에 레이는 어이없어 하는 얼굴로 니콜라이에게 물었다.
“방금 그건 뭡니까?”
“뭐긴 뭐야, 형님의 아우 사랑이지.”
“장난하지 마시고요.”
“왜 장난이라 단정 짓는···.”
뭐라고 말을 이으려던 니콜라이는 자신의 보좌관이 다가와 뭐라 속삭이자, 어딘가를 보며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그리고 파티홀에서 이어지는 방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버지가 부르신다. 가자.”
“저도 말입니까?”
“오늘은 네가 주인공이잖아. 아마 황제 폐하께서 사적으로 한마디 하실 모양이야.”
갑작스러운 호출이 당황스럽긴 했으나, 레이는 별말 없이 니콜라이를 따라갔다.
근위병들이 지키고 있는 문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자, 여황제와 황태자, 그리고 발렌시아 공작과 빈센트, 슐러 교수 등을 포함한 고위 귀족 몇 명이 자리하고 있었다.
신분의 고하를 기준으로 모였다기보단, 여황제와 진정으로 가까운 이들의 모임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그리고 사회적 가면을 내려놓는 곳이란 생각이 들자, 레이는 조금 긴장해버리고 말았다. 마치 명절에 갑자기 일가친척 앞에 놓인 막내가 된 것 같았기에.
그러나 레이에게는 다행히도, 이 모임의 우두머리인 여황제가 먼저 지목한 것은 그가 아닌 니콜라이였다.
“니콜라이, 너는 왜 한 번도 아기를 데려오지 않는 거니? 로잘리테는 또 왜 안 온 거고?”
위엄 넘치던 공식 석상에서와 달리, 그녀는 말투부터가 장성한 손주를 대하는 할머니의 것이 되어있었다.
니콜라이 역시 그녀를 어려워하는 기색 하나 없이 편하게 답했다.
“날이 추우니까요. 아이가 감기에 걸리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폐하께서 책임져 주실 것도 아니잖습니까?”
편해도 너무 편한 것 같은 말투에, 레이는 반사적으로 주변인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익숙한 일이라는 듯, 다들 평온한 모습이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여황제의 대답과 호탕한 웃음 소리였다.
“아하하핫! 아이고, 하인리히. 너는 도대체 자식 교육을 어떻게 시켰길래 쟤 말본새가 갈수록 너를 꼭 닮아가는 거니?”
여황제는 진심으로 유쾌해하는 것으로 보였다. 레이는 몇몇 귀족들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는 것을 보았으나, 그녀는 아랑곳 않고 또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늙은이의 욕심을 채우려고 갓난아기가 아프면 안 될 일이지. 그러면 봄에는 꼭 데려오거라. 어차피 너네 집안이야 붕어빵 찍어내듯 똑같은 얼굴들만 나온다지만, 그래도 애 얼굴은 봐야지.”
“저희 글로리아는 자기 엄마를 닮았습니다.”
“아하하! 그렇게 믿고 싶은 거겠지. 하인리히가 너희 태어났을 때 했던 말과 똑같은 소리를 하는 걸 보니, 그런 것도 집안 내력인가 싶구나.”
이번에는 하인리히와 니콜라이 부자가 동시에 미간을 찌푸렸고, 다른 귀족들은 예의상 입을 가리며 피식 웃었다.
그러나 여황제는 이제 시작이라는 듯, 거침없이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빈센트, 그러고 보니 너는 왜 아직도 결혼을 안 하는 거니? 아무리 붕어빵이라도 계속 찍어내야지!”
“······.”
한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의 결혼 잔소리에, 빈센트는 별다른 대답 대신 그저 미소만 지었다.
그런 그를 위해 황태자가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아무래도 능력이 너무 좋다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이 녀석은 언제나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지 않습니까?”
“하기야, 동네 백수 같은 너와는 얘기가 다르겠구나.”
“아무리 그래도 백수라니요.”
“저런, 한량이라고 해줄 걸 그랬니?”
피식 웃으며 황태자를 놀리는 여황제의 모습에, 레이는 내심 감탄했다. 그 정신없는 황태자도, 어머니 앞에서는 그저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것.
‘대단한 할머니이시군.’
그때, 여황제가 드디어 레이를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레이 루체스 백작. 요즘 사교계에서 가장 인기가 좋다지요?”
“아닙니다. 본의 아니게 잠시 과분한 관심을 받고 있을 뿐입니다.”
“겸손하군요. 그렇지만 너무 좋은 일만 많이 하려 하지 말고, 부디 젊을 때 사고도 많이 치고 즐겁게 보내기를 바랍니다.”
“예···?”
“대신, 본인 말고 아랫사람들 단속은 잘 하고요. 충성심이 과할수록 헛짓을 하는 가신이 있기 마련이라. 보통 그런 일은 젊고 유망한 주인이 있을 때 일어나더군요.”
“아··· 예, 알겠습니다.”
다소 파격적이기는 해도 연륜이 묻어나는 조언을 해주는 것 같았기에, 레이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여황제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참, 그리고 슐러 백작이 관리하던 백작령을 루체스 백작에게 넘길까 하는데.”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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