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자들의 세계 (264)화 (264/274)

귀족들의 기싸움

“······.”

찻잔에 새겨진 꽃잎 무늬의 개수를 세고 있던 레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테이블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 한 명 한 명의 명성을 생각하면 위축되기 쉬운 분위기였으나, 레이는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은 뒤 차분하게 답했다.

“한 가지 정정해야겠군요. 아이들을 제가 개인적으로 거두는 것이 아니라, 세이비어 재단에서 일정 시간 동안 보호하기로 한 것입니다.”

레이는 그렇게 말하는 중간에 세드릭 알무스를 향해 빤질빤질하게 웃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애프터 파티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있다가 집에 가려 했던 자신에게 굳이 시선을 집중시킨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는 혼자만의 의미로.

“다들 평범한 아이들로 확인되었지만, 그동안 각종 연구에 노출되었던 만큼 시간을 두고 돌볼 필요가 있다는 연구원들의 의견이 있어서 말입니다.”

“호오.”

이어진 레이의 설명에, 한 풍채 좋은 귀족이 풍성한 콧수염을 씰룩이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스피놀라 백작이군. 욕심이 많은 인물이라고 했던가.’

레이가 머릿속으로 상대의 정보를 떠올리는 사이, 스피놀라 백작은 기대감이 깃든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 그 아이들이 초능력을 각성할 낌새라도 발견되었는가? 그런 가능성과 관련된 실험이 진행된 것으로 들었네만.”

“아니요. 그런 건 전혀 아닙니다.”

공연한 추측은 사절하겠다는 듯, 레이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답했다.

“그저 좋지 않은 환경에 처했던 아이들이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보살피는 것이라 생각하시면 될 듯합니다.”

“흠, 그렇군.”

스피놀라 백작은 그 이상 캐묻지 않았으나, 레이의 대답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 눈치였다.

아이들의 복지 같은 것에는 일절 관심이 없어 보이는 그의 모습에 레이가 속으로 혀를 차는데, 이번엔 다른 귀족이 질문을 던졌다.

한 번 물꼬가 터지니, 다들 내심 궁금했던 것을 물어볼 기회라 여기는 모양새였다.

“그러면 그곳에서 발견된 성인 실험체들은 누가 가져··· 아니, 보호하게 되었는지요?”

연구소에 갇혀 있던 이들을 어떻게 여기는지 고스란히 보여주는 무신경한 단어 선택.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질문이었으나, 레이는 매끄러운 표정을 유지하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임상 시험에 지원했던 초능력자들은 현재 세이비어 재단이 제공하는 기숙사에 머물며 사회화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이후 그들이 원할 경우, 재단에서 취업 알선 또한 지원할 계획입니다.”

“그렇습니까··· 이것 참, 루체스 남작이 좋은 일을 많이 하시는군요. 혹여 무리하시는 건 아닌지 걱정될 정도입니다.”

얼핏 듣기에는 레이를 칭찬하는 듯한 말이었으나, 실상은 그 많은 초능력자들을 독차지한 것 아니냐는 불만에 가까웠다.

“아닙니다.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레이는 초능력자들을 구해내는데 보태 준 것도 없으면서 괜한 눈독 들이지 말라는 마음을 담아 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여간 욕심들은.’

귀족들 중에 초능력자들을 무슨 희귀한 컬렉션쯤으로 여기는 작자들이 꽤 있다는 것은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다.

하지만 인체 실험에 고통받다가 구출된 이들을 마치 시장에 풀린 한정판 보석 취급하는 태도들을 보고 있자니, 슬슬 부아가 치미는 레이였다.

한편, 세드릭은 자신이 던진 질문의 여파를 흥미롭게 지켜보다가 이윽고 다시 입을 열었다.

“과연, 루체스 남작께서는 소문처럼 사려 깊고 따듯한 마음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보살펴주고 계셨군요.”

그리고 여상스러운 목소리로 연못에 새로운 돌을 던졌다.

“알면 알수록 믿음이 가네요. 그런 의미에서, 알무스 공작가에서 후원하는 초능력자 아이들 중 몇 명을 남작에게 맡겨볼까 합니다.”

* * *

“···예?”

생각지도 못했던 제안에 레이가 잠시 말문이 막힌 사이, 내내 시답지 않은 잡담만 하던 윌리엄 황태자가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보육원생 중에 1.5세대들이 많은 모양이지?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초능력이 그리 쉽게 발견되지는 않을 텐데.”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아이들을 돌보는데 세대를 구분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세드릭은 깨어 있는 귀족이 할 법한 발언을 하며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알무스 공작가는 제국 전역에 있는 많은 보육원들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 보육원에서 초능력이나 특출 난 재능을 가진 아이가 발견되면 모두 수도로 보냅니다. 그렇게 선발된 아이들은 가문에서 직접 운영하는 보육원에서 지내며 더 많은 기회를 접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도 초능력자들의 수는 열 손가락을 채우지 못한다고 그가 덧붙이는데, 스피놀라 백작이 다시 한 번 관심을 드러냈다.

“그래도 그 아이들이 그대로 크기만 하면 충성스러운 초능력자 가신이 생기는 것 아닌가.”

“하하, 그건 아이들의 의사에 달려있겠죠. 충성이란 것이 강요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다른 곳도 아니고 알무스 공작가에서 은혜를 베풀었는데, 염치가 있다면 그대를 따르겠지.”

“물론, 아이들이 그래준다면 저에게도 기쁜 일이겠습니다만···.”

레이는 세드릭이 겸손한 척 떠드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가 했던 제안에 대한 답을 돌려주었다.

“아이들을 보내시죠.”

“받아 주시는 겁니까?”

“예. 그렇지 않아도 마침 아카데미의 규모를 확장하기 위해 새로운 부지를 물색 중에 있었습니다. 기숙사가 딸린 곳으로요.”

세드릭이 무슨 속셈인지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레이는 일단 거기에 따라 주기로 했다. 만약 그가 아이들에게 손을 댔다면 자신이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

올바른 교육을 통해 아이들이 훗날 무조건 알무스 공작가에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이유도 있었다.

‘물론 저 자식은 아무래도 그 반대의 경우를 노리는 것 같지만.’

저렇게 자신 있게 아이들을 보내겠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세드릭은 아마 그들이 이미 철저하게 자신의 수족이라 여기는 것이리라.

그러니 그들을 통해 세이비어 재단과 아카데미의 정보를 빼내는 한편, 자신의 영향력을 서서히 넓힐 수도 있을 거라 기대하는 것이겠지.

그러나 레이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굳게 믿었다. 알무스 쪽에서 어떠한 유혹이 들어오든, 그들은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대놓고 회유하려 들면 당연히 반발할 거고, 만약 은근하게 회유하려 든다면···.’

처음 일렉티 단원들과 만났을 때 마주한 그들의 순진함을 떠올린 레이는 떨떠름한 심정으로 확신했다.

‘···신호를 보내도 못 알아챌 확률이 더 높아.’

일렉티는 고난과 역경을 딛고 마침내 세계를 구하는 영웅으로 거듭나는 것을 목표로 뭉친 사람들이다.

레이가 나타나기 전까지 무모하게 날뛰었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리암에게 혹독한 훈련을 받은 덕분에 다들 꽤 쓸만해지기는 했지만···.’

아무리 현실감각을 불어넣어 주려 애써도, 일렉티 단원들은 원래의 순수함만큼은 절대 잃지 않았다.

레이는 첫 만남 때 그들의 기강을 잡기 위해 힘자랑을 지나치게 한 것은 아닐까 가끔 후회되기도 했다.

그날 레이의 압도적인 능력을 확인한 이후, 그들은 레이를 자신들의 꿈을 실현시켜줄 유일한 존재로 여기고 있었으니까.

‘아니, 잘 따르는 건 좋아, 좋은데···.’

어쩐지 한숨이 나올 것만 기분에, 레이는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부하들의 머리가 꽃밭인 건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지금은 세드릭을 상대하는 것이 더 중요했기에, 레이는 다시 현재에 집중하려 했다.

그때, 테이블 위를 오가는 미묘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황태자의 밝은 목소리가 모두의 주의를 끌었다.

“이런 이런. 세드릭 쪽도 그렇고, 레이가 운영하는 재단도 그렇고, 다들 고생이 많군.”

“······.”

레이는 순간 두 가지에 대해 딴지를 걸고 싶었다. 언제부터 자신을 이름으로 불렀는가, 그리고 프로비던스 쪽에서 돈을 대는 걸 뻔히 알면서 어째서 굳이 자신이 단독으로 운영하는 것처럼 말한 것인지.

그러나 황족의 하는 발언 앞에서 일개 남작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웃는 것뿐.

다만 이어진 그의 말엔, 그 미소 마저도 살짝 금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귀족의 귀감이 되는 이 두 청년들의 얼굴을 본떠서 기념 주화라도 내야 하나?”

* * *

며칠 후, 이른 새벽.

레이 루체스 남작의 자랑스러운 보좌관인 애런 로렌스는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번쩍 떴다.

오늘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의미가 있는 날이었으니까.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벌떡 일어나 씻고 몸단장을 한 그는, 은쟁반에 필요한 것들을 빠르게 챙겨 방을 나섰다.

그리고 긴 복도를 지나 레이의 침실로 들어선 뒤, 망설임 없이 창문으로 향했다.

촤악!

기운차게 커튼을 걷자 암실 같던 침실에 아침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내친 김에 창문까지 활짝 연 애런은, 이윽고 넓은 침대 위 이불 속에 파묻혀 있던 레이를 찾아내 깨웠다.

“남작님, 일어나시지요. 이제 루체스 백작님이 되러 가실 시간입니다.”

“···5분만.”

레이는 이 외에도 계속해서 뭐라 뭐라 웅얼댔으나, 애런은 그런 그의 얼굴에 마스크팩을 찹 소리 나게 붙였다.

“······.”

얼굴을 덮은 차갑고 축축한 감촉에, 레이는 속으로 앓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잠에서 깨어났다.

“오늘은 그야말로 역사적인 날입니다! 남작님에게도 그렇지만, 제 인생에 있어서도 말이지요. 뒷골목에서 시작한 제가 모시는 분이 무려 백작님이 되시는 겁니다. 그것도 무려 그 룩스 제국에서요!”

누가 보면 본인이 백작이 되는 것이라 착각할 만큼, 애런은 누구보다 들뜬 얼굴로 자신의 기쁨을 늘어놓고 있었다.

레이는 그런 애런의 목소리를 알람 삼아서 아침잠과의 사투를 벌였다.

십수 분 후에 겨우 침대 위에 바로 앉은 그에게, 알베르트가 진한 향을 풍기는 커피를 가져다주었다.

들뜬 것은 마찬가지였는지, 그는 감회에 젖은 얼굴로 말했다.

“남작위를 수여하는 임명장을 전달해 드린 것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정말이지 감개무량하군요.”

“···그러네. 그때는 자다 깬 몰골로 침대 위에서 귀족 타이틀을 달았었지.”

“오늘 작위 수여식에는 그때보다 더 꾸미셔야지요.”

그때보다 훨씬 친근해진 집사의 말에, 레이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따듯한 커피를 한 모금 넘긴 후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곧 이 집과도 안녕인가?”

이 저택은 처음 제국에 발을 들였을 때, 이나투스 후작가에서 마련해 준 곳이었다.

세레누스에서도 한적한 편인 올드타운에 위치한, 넉넉한 부지와 클래식한 외관의 건물이 마음에 들어 선택했던 곳.

“아쉬우십니까? 하지만 여전히 남작님, 아니 백작님의 소유인 것을요. 물론 아무래도 그저 소유하는 것과 직접 거주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아니, 그런 건 아니야.”

레이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 맞지만, 영영 떠나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자신의 소유이니, 파티를 열든 뭘 하든 종종 들릴 일이 있을 테니까.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기도 바쁠 텐데 아쉬워하고 있을 시간이 없지.”

“예, 맞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레이는 새해 들어 벌써 두 번째로 방문하게 된 황실에서 이 ‘새로운 생활’의 휘황찬란한 한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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