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자들의 세계 (263)화 (263/274)

비교는 사절입니다

원래 타고난 것인지, 아니면 지위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윌리엄 황태자가 가진 존재감은 굉장히 강렬한 편이었다.

그가 내뿜는 기세는 자석처럼 시선을 끌어 모으는 힘이 있었고, 그건 그를 등지고 있던 세드릭 알무스에게도 해당되는 사항이었다.

“···전하를 뵙습니다.”

돌연 걸음을 멈추고 힐끗 뒤를 확인한 세드릭은 그대로 목례하며 한쪽으로 비켜섰다. 누가 보더라도 황태자가 용건이 있어 보이는 것은 레이였기 때문.

그러나 황태자는 그런 세드릭의 어깨에 친근하게 한 팔을 두르더니, 레이에게도 가까이 오라며 손짓했다.

“마침 내가 찾던 두 사람이 모두 여기 있었군!”

“저희를 찾으셨습니까?”

“내 그대들에게 긴히 할 말이 있어서 말이야. 자세한 얘기는 자리를 옮겨서 계속하지.”

황태자는 그렇게 말하며 중앙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러자 레이에게 한마디라도 걸어보려고 주변을 서성거리던 귀족들의 얼굴에 아쉬움이 깃들었다.

아무리 낯이 두꺼워도, 룩스 제국의 실세들만 앉아 있는 곳을 멋대로 비집고 들어갈 담력은 없었으니까.

“알겠습니다, 전하.”

레이 역시 괜히 반항하는 대신 순순히 대답하며 그를 따라갔다.

아무렇지 않게 인파를 뚫고 들어와 자신과 세드릭을 매끄럽게 빼낸 황태자라면, 자신이 여기서 무슨 핑계를 대든 소용없으리라는 판단이 들었던 것.

“자, 편하게들 앉게.”

“예, 전하.”

세드릭이 자연스럽게 본인의 형 옆에 앉는 동안, 레이는 빈자리들을 빠르게 훑었다. 그리고 빈센트와 니콜라이의 사이가 마침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왜 굳이 한 자리 건너서 앉은 건데?’

머릿속으로 의아해하면서도, 레이의 두 발은 똑 닮은 삼촌과 조카를 향해 움직였다.

“결국 잡혀왔군.”

“왔으면 앉아.”

“···예, 두 분도 반갑습니다.”

둘 다 그의 등장을 당연하게 여기는 반응이라, 레이는 두말 않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주변에 목례를 하며 이곳에 착석한 이들을 하나씩 확인했다.

‘아까 음악회에서 분명 발렌시아 공작도 있었는데.’

레이가 보이지 않는 얼굴을 찾아 두리번거리자, 빈센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알려주었다.

“하인리히 형님이라면 여왕 폐하께서 따로 마련하신 자리에 가셨다.”

“아, 그렇군요. 이 안에서도 또 그룹이 나뉘는 겁니까?”

이번에 레이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오른쪽에 앉은 니콜라이였다.

“폐하께서는 소란스러운 자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시거든. 그래서 아주 가까운 몇 명만 부르신 거지.”

“그렇군요.”

“우리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뵙고 자랐던 누님에게 본인 손주 자랑하러 가신 거나 마찬가지이고.”

“···제국의 황제 폐하와 공작 각하께서 나누시는 대화 치고는 굉장히 개인적이군요.”

“사람 사는 거야 다 똑 같은 것 아니겠어?”

고귀한 푸른 피를 타고났다 일컬어지는 황족과 귀족이라고 해도, 다들 누군가의 가족이라는 소리.

물론 레이가 아는 역사만 해도 권력을 두고 같은 혈육끼리 피를 보는 경우가 허다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는 동의할 수 있었다.

‘일단 윌리엄 황태자만 해도 겉은 번드르르하지만···.’

그가 그간 보여준 태도는 소탈하다 못해 조금 지나치게 친근한 면도 없지 않았으니까.

‘지금도 나름 신경 써준 것 같고.’

그는 긴히 할 말이 있다고 레이를 데려온 사람 치고는 그냥 전체적인 대화에 참여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마도 레이가 먼저 이 무리에 낄 수 없으니, 본인이 나서서 데려다 앉혀 놓은 것이 아닐까 싶었다.

만약 레이가 평범한 남작이었다면 그러한 배려에 눈물 나도록 고마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레이에게 이 사람들은 어차피 얼마 후에 있을 백작위 수여식에서 다시 볼 인물들.

때문에 적당히 시간을 때우다가 먼저 집에 돌아가려 했던 레이로서는 다소 착잡한 심정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 테이블에 모인 이들이 레이를 향한 관심을 빠르게 거두고 다시 본인들 대화에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다들 룩스 제국에서 힘 깨나 쓰는 인물들이다 보니, 레이보다는 본인들의 얘기가 더 중요했던 것.

덕분에 레이는 차분히 찻잔을 기울이며 동석한 이들의 면면을 살필 수 있었다.

‘나와 세드릭이 가장 어린 편이군.’

레이보다 열 살가량 많은 빈센트와 니콜라이조차도 이 테이블에서는 꽤 젊은 축에 속했다.

그래서 그런지, 빈센트는 조금 전부터 1분에 한 번 꼴로 장가가라는 주변 어른들의 집중 공격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레이는 오랜만에 빈센트를 보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보통이 아니라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명절날 친척 어르신들의 잔소리를 마주하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에서도, 빈센트는 눈썹 한 번 찌푸리지 않고 그 모든 말을 귓등으로 흘려 넘기고 있었던 것.

반면 이곳에서 막내인 세드릭은 그런 재촉 대신 적당한 관심과 예쁨을 받는 위치인 듯했다.

“그러고 보니 세드릭은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 통 사교계에 얼굴을 비추지 않으니 궁금한 것투성이구나. 건강은 좀 괜찮고?”

한 나이 지긋한 여백작이 마치 장성한 손주를 대하는 듯한 눈빛으로 세드릭을 바라보며 물었다. 친근함이 느껴지는 그 태도에, 두 집안끼리 오랜 세월 동안 가깝게 지냈을 것이라는 추측이 들었다.

레이는 관심 없는 척 다른 곳을 보면서도 귀를 쫑긋 세우고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했다.

“여전합니다. 자리보전하고 있는 날이 많아 자주 찾아 뵙지 못하는 것이 송구할 따름이지요. 별달리 하는 일이 없다 보니 늘 아버지와 형님께 폐나 끼치고 있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요···.”

“무슨 그런 말을 다 하느냐? 네가 하는 일이 없기는! 너희 어머니가 남기고 간 보육원과 복지단체들을 네가 잘 이끌고 있다고 들었는데.”

세드릭의 친모인 전 알무스 공작 부인은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세드릭은 그녀가 운영하던 자선 사업들을 기꺼이 이어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제 이름만 올려놓고 가끔 들여다보는 정도일 뿐입니다. 아무래도 새어머니께서 거기까지 신경 쓰시기에는 워낙 공사다망하시어···.”

‘하!’

가만히 듣고 있던 레이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물론 겉으로는 흠잡을 데 없이 매끄러운 얼굴을 유지하면서.

‘착한 손주 역할을 꽤나 충실하게 연기하고 있군.’

레이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세드릭은 결코 본인의 주장처럼 무능력한 인물이 아니었다.

일단, 보육원과 복지단체에서 제법 많은 인원을 선별하고 교육해 알무스가의 직원으로 집어넣고 있었다.

그리고 비록 알무스가의 굵직한 사업들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 있다 해도,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낱낱이 보고 받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물론 아직은 대부분 추측에 불과하지만.’

예전에 빈센트도 알무스 공작가가 엘릭서의 뒷배일 가능성에 대해 언급한 바 있으나, 그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고 했다.

그러나 레이는 세드릭이 초능력자와 관련된 주제로 대화하던 중 데미안 소르본을 언급한 것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최근 사태와 관련해서도 무언가 알면서 모르는 척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여겼다.

“저는 형님과 다르게 특출 난 능력이 없으니, 그저 집안에 폐가 되지 않도록 노력할 뿐입니다.”

“세드릭, 너는 정말이지 너무 겸손한 것이 탈이구나.”

달칵.

찻잔을 내려놓은 레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싶은 것을 참으며 이름 모를 디저트를 입 안에 넣었다.

‘말하는 걸 보니 타고 났군.’

옆에서 관찰한 결과, 세드릭은 부드럽게 대화를 이끌며 자연스럽게 상대방의 호의를 사는데 능숙했다.

그리고 레이는 그 저변에 사람을 제 입맛대로 조종하려는 천성이 깔려 있다고 느꼈다.

‘게다가 야망도 꽤나 있어 보이고.’

자신과 처음 만날 날, 대뜸 초능력자들을 위한 자선사업을 펼치는 이유가 세력을 키우기 위한 것이냐고 떠본 것만 보아도 그랬다.

그런 의심을 한다는 것 자체가, 본인이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니까.

이러한 점들을 고려했을 때, 그는 꽤나 만만찮은 상대였다.

‘이번 사건으로 엘릭서가 열심히 꼬리를 자르는 동안, 알무스와 관련해서는 기사 한 줄도 나지 않았지.’

그건 정말로 아무런 관련이 없거나, 그만큼 철두철미하다는 뜻.

레이는 입안에 맴도는 단맛을 차로 씻어내며 세드릭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지금까지 사교계에서 보인 모습만 따지면, 그는 조용히 칩거하는 얌전한 성격으로 보였다. 겉으로는.

‘약간 스벤 같은 과인가?’

레이는 스벤을 처음 보았을 때 받은 느낌과, 이후 알게 된 그의 본성 사이의 괴리를 가만히 떠올렸다.

허구한 날 연구실에 가둬 놓고 일만 시켜도 싫은 소리 하나 못할 것처럼 순한 인상.

‘아, 물론 니콜라이 한테는 여전히 찍소리 못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직접 겪어본 스벤은 결코 무르기만 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부심이 있는 분야에 한해서는 무모할 만큼의 강단과 행동력을 보여서 골치가 아플 정도였으니까.

심지어 스벤은 서혜리를 향해 승부욕을 드러낼 때도 순하고 동그란 눈을 말갛게 빛내는 타입이었다. 그래서 레이는 가끔 그를 볼 때 핵폭탄을 만들 줄 아는 무시무시한 다섯 살짜리 어린애를 보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저 인간도 어딘가 비슷한 느낌이란 말이지···.’

그때, 시선을 느낀 듯 세드릭이 고개를 돌려 레이를 바라보더니 이내 싱긋 웃었다.

이에 레이 역시 우연히 시선이 얽힌 것처럼 가볍게 눈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역시, 묘하게 짜증 나네.’

레이가 세드릭이 과연 뒤로 무슨 짓을 벌이고 있을지 곰곰이 생각하는데, 옆에서 그를 흘끗 돌아본 빈센트가 웃으며 조용히 물었다.

“설마 지금 동족 혐오 비슷한 걸 하는 건 아니겠지?”

“동··· 뭐요?”

레이는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냐는 눈빛으로 되물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입까지 살짝 벌어진 채로.

“세드릭도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꼬이는 편이거든. 타고났다는 면에서 너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

“하하, 오늘따라 말씀이 심하시군요.”

주변 시선을 의식한 레이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불평했다. 하나 빈센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다만 세드릭은 세심하게 사람을 파악하고 본인의 의지로 끌어들인다면, 너는···.”

“······?”

잠시 무언가 가늠하듯 레이를 살피던 빈센트는 이내 적당한 표현이 떠오른 듯 피식 웃었다.

“가끔씩 보이는 너의 그 대책 없고 거침없는 면모에 사람들이 홀리는 느낌이 없지 않지.”

“대책 없··· 제가 말입니까?”

자신의 사려 깊은 배려심에 대한 얘기가 나올 줄 알았던 레이는 살짝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번에야말로 어이없다는 듯이 빈센트를 쳐다보다가, 억울한 심정으로 헤이든을 찾았다.

“헤이든 씨.”

“네?”

“그···.”

자신의 편을 들어달라 부탁할 생각이던 레이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헤이든과 눈이 마주치자 그동안 자신이 그에게 했던 짓들이 뇌리를 스쳤던 것. 결국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눈앞의 찻잔으로 조용히 눈길을 돌렸다.

그런데 이번엔 세드릭이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카엘레스티아 컨트리 클럽 연구소에서 구조된 어린 아이들을 루체스 남작이 거두기로 하셨다지요?”

세드릭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건넨 말에, 테이블에 있는 모든 이의 시선이 레이에게로 집중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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