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자들의 세계 (262)화 (262/274)

다가오지 마

황궁 별관에 있는 그레이트 홀.

루크는 자신이 발을 들인 공간의 화려함에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와···.”

그의 머리 위로 마치 금빛의 은하수를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한 커다란 샹들리에가 빛을 뿌리고 있었다.

높은 천장은 최고의 예술가들이 오랫동안 공을 들였을 것이 분명한 명화와 정교한 조각들로 꾸며져 있었고, 좌석을 감싸고 있는 벽들마저 우아한 형태를 띄고 있었다.

그야말로 하나의 거대한 예술품 같은 홀을 열심히 눈에 담던 루크는 이내 아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황실에서 보낸 초대장의 수는 넉넉했기에, 본인들이 원했다면 얼마든지 올 수 있었다.

그러나 서혜리와 나이젤은 그냥 편하게 화면으로 보겠다며 집에 남기로 했다.

‘음악 듣다가 졸기나 할 것 같다면서 극구 사양했지.’

싫다는 사람들을 억지로 끌고 올 이유도 없었기에, 오늘 음악회에 참석한 식구는 레이와 루크, 애런, 그리고 리암 뿐이었다.

‘솔직히 두 사람 다 그냥 귀찮아서 빠진 것 같지만···.’

레이는 그들을 탓할 수 없었다. 일단 본인부터가 영양가 없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힘 빼기 싫어서 시간에 딱 맞춰 도착한 참이었으니까.

어차피 정말로 중요한 건 음악회가 끝나고 열리는 애프터 파티이니 그래도 되었다.

“루크, 구경은 앉아서 해도 되니까 일단 자리로 가자.”

“앗, 네!”

정신없이 두리번거리는 루크를 챙긴 레이는 직원의 안내에 따라 지정석으로 향했다.

그의 뒤에선 애런이 이런 자리에 참석하게 된 것에 크게 의미 부여를 하며 감격스러워하고 있었고, 리암은 언제나처럼 무심한 얼굴로 그저 조용히 뒤따랐다.

‘리암이 반응하는 건 위기와 민트 초코 프라푸치노 정도 밖에 없지···.’

레이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좌석에 앉았다. 화려한 붉은 벨벳 의자는 예상되는 가격대에 걸맞게 매우 푹신했다.

‘···아, 위험한데.’

급격히 몰려오는 졸음에, 레이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애런이 지적한 대로, 그는 요즘 세이비어 재단의 공동대표로서 바쁘게 돌아다니느라 잠을 통 못 자고 있었다.

재단이 불법 인체 실험 피해자들을 책임지고 보호하겠다고 나서면서 워낙 유명해진 탓이었다.

‘불평하는 건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세이비어 재단’이라고 짧게 부르지만, 공식 명칭은 ‘루체스-프로비던스 세이비어 재단’이다.

레이는 루체스 남작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재단의 명성을 드높이고, 엘리엇은 프로비던스를 통해 필요한 자금을 대는 것이 원래의 계약.

그리고 현 상황에서는 레이가 전면에서 활동한 것이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사람들은 프로비던스가 아닌 레이 루체스라는 이름을 보고 재단에 기부하고 있었으니까.

어찌 되었든, 프로비던스는 현재 아카데미를 제외한 모든 부분에 대한 비용을 부담하고 있었다.

단, 말 그대로 자금만 댔기에, 재단을 어떤 방향으로 운영하고 인사배치를 어떻게 할 것인지는 오롯이 레이의 몫이었다.

그런데 그가 급격히 커진 재단의 규모와 늘어난 직원들을 관리하느라 바빠진 사이, 엘릭서가 끼어들었다.

‘그렇게까지 뻔뻔할 줄이야.’

엘릭서는 불법 인체 실험에 대해 모르는 일이라며 관련 연구원들을 전부 해고했다고 밝혔으나, 실제로는 자회사를 통해 다시 고용했다.

그리고 그 직원들을 세이비어 재단과 초능력자 아카데미에 의료진으로 무상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비록 실험을 명령한 바는 없지만, 어쨌든 직원 관리를 소홀히 한 책임을 진다는 명목으로.

그들을 통해 초능력자들을 가까이에서 관찰하며 정보를 빼내 가겠다는 속셈이 뻔히 보이는 제안이었다.

그래서 레이는 처음에 절대로 안 된다며 선을 그으려 했으나, 이내 마음을 바꿔 받아들였다.

마르셀라와 블레이크를 포함한 연구원들이 해코지를 당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고, 오히려 파견 나온 의료진들을 통해 역으로 엘릭서를 감시할 수 있다는 의견이 있었던 것.

레이가 제안을 받아들이자, 그 소식에 가장 안도한 것은 블레이크였다.

얼떨결에 정말로 제대로 된 초능력자 연구 기관에서 지원 인력으로 일하게 되면서, 마음을 무겁게 내리누르던 죄책감에서 해방될 수 있었기 때문.

‘···어쨌든.’

여전히 할 일을 태산같이 쌓여 있었지만, 레이는 음악회가 이어지는 동안만이라도 머리를 비우고 한숨 돌릴 생각이었다.

그리고 옆에서 들려오는 루크의 천진난만한 목소리는 그런 그의 계획에 제법 도움이 되었다.

이미 웬만한 화려함에는 면역이 된 레이와 달리, 루크는 황궁이라는 장소가 주는 설렘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게다가 한 사람의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신년 음악회 자체에도 관심이 가득했기에, 그는 진심으로 음악을 즐길 준비가 되어있었던 것.

그런 그의 순수한 기대감과 밝은 에너지는 주변 사람까지 덩달아 즐거운 기분이 들게 해주었다.

그리고 루크는 팸플릿을 정독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등, 음악회를 즐기는데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전생에서 듣던 곡도 많이 포함되었네요.”

“그래?”

레이는 오늘 연주될 곡들의 목록을 살피는 한편,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가이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특히 의식주와 관련된 것들에는 지구의 흔적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으니까.

전생을 기억하는 환생자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것을 만들었고, 익숙한 브랜드를 찾았으며, 익숙한 기념일들을 챙겼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졌기에, 많은 지구의 것들이 가이아의 것이 되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떤 이들에게는 지구와 가이아에서의 삶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그저 쭉 이어지는 것일 뿐이었으니까.

“네, 그런데 저는 가이아 고유의 클래식도 꽤 좋아해요. 이래저래 영향을 받아서 애써 구분 짓는 게 무의미한 것 같긴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루크의 두 눈이 반짝거리는 것을 보며, 레이는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두고 온 것에 대한 그리움에 파묻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보다, 기억을 간직한 채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것이 훨씬 나았기에.

“참, 이 곡은 제가 최근에 연습하고 있는 건데···.”

레이가 끊임없이 재잘거리는 루크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스피커에서 관람객들을 향한 안내가 흘러나왔다.

[룩스 제국의 찬란한 태양께서 입장하십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서둘러 몸을 일으키며 한 곳을 바라보았다. 곧 2층 중앙의 문이 열리며 여황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 좋아 보이는 푸근한 할머니 같은 인상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윌리엄 황태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 나머지 황족 일가가 따랐다.

여황제의 좌석의 주변에는 사냥 대회에서 보았던 대귀족 가문들이 나란히 서있었는데, 레이는 그들을 보며 문득 의문을 품었다.

‘···멀리서 보면 분명 기품 넘치고 우아한 사람들인데, 왜 가까이서 보면 돈 많은 동네 백수 형들처럼 느껴지는 걸까.’

* * *

여러 귀족과 사회 유명 인사들이 초대받는 음악회와 달리, 애프터 파티는 그 절반 정도의 인원만이 초대받는 자리였다.

그래서 약 두 시간에 걸친 신년 음악회가 막을 내린 후, 홀을 빠져나온 사람들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그중 파티장으로 향하는 흐름에 합류한 레이는 곧 익숙한 인물을 발견하고 아는 체를 했다.

“찰리 군.”

“안녕하십니까, 루체스 남작님.”

그가 전에 구해주었던 알무스 공작가의 삼남, 찰스 알무스였다. 그는 레이에게 깍듯이 인사를 건넨 후, 곧 루크를 향해 말했다.

“저쪽에 미성년자들을 위한 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데, 너도 갈래?”

찰리가 가리킨 곳은 메인 파티장 옆에 있는 다른 홀이었는데, 문가에 루크의 또래들이 서성이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부모 때문에 억지로 끌려온 아이들을 위해 따로 마련된 공간인 듯했다.

“형, 저 찰리랑 가도 돼요?”

루크는 그 사이 찰리와 제법 친해진 것인지, 같이 놀고 싶어 하는 것이 역력한 표정으로 허락을 구했다.

‘이 집안 둘째는 몰라도 셋째는 멀쩡해 보이니···.’

빠르게 결론 내린 레이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자 루크는 활짝 웃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찰리와 함께 떠났다.

그 신나 보이는 뒷모습에, 레이는 피식 웃으며 자신도 목적지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후.

‘오늘도 아주 그냥 뚫어지겠네.’

레이는 파티장에 들어서자마자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며 생각했다.

그래도 지난 번과 다른 점은 있었다. 실컷 물어 뜯을 기세로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호의와 호기심, 그리고 질투 따위의 감정이 뒤섞인 눈빛들을 보내고 있었던 것.

본인들이 그를 경계했던 사실은 전부 잊어버린 듯한 그 뻔뻔함에, 레이는 진심으로 감탄을 터트릴 뻔했다. 역시, 귀족들이 가진 가면의 두께는 만만히 볼 것이 아니었다.

‘뭐, 오늘은 거물들이 처음부터 자리하고 있어서 대놓고 그러지 못하는 것도 있겠지만.’

레이의 시선이 파티장 정중앙에서 웃고 있는 윌리엄 황태자와 다른 유수의 귀족들을 향했다.

여황제는 보이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고령이다 보니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

레이는 중앙으로 향하는 대신, 일단 한쪽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봄의 정원처럼 화사하게 꾸며진 파티장 안에는 부드러운 분위기가 흘렀다. 테이블에 앉든, 서서 즐기든, 다들 편하고 자유롭게 즐기고 있었다.

다만, 중앙에 자리 잡고 움직이지 않는 거물들과 나머지 귀족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하는 듯했다.

‘옛날 예법에 따르면 자신보다 작위가 더 높은 이에게 멋대로 다가가 말을 걸 수 없었다고 하지.’

비록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지만, 적어도 이 공간 안에서만큼은 모두 그 예법을 따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따지자면 나는 누가 말을 걸어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소리인데···.’

거기까지 생각한 레이는 문득, 몬스 리조트 파티장에서 자신이 할 말이라도 있냐며 다른 귀족들을 도발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제야 그들의 얼굴에 번졌던 표정이 제대로 납득되었다.

‘음, 조금 심했나?’

혹시 그때 일 때문에 아무도 다가오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고민이 잠시 들었으나,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그에게 말을 붙여보고 싶은 이들이 눈치싸움을 벌이는 가운데, 프레더릭 키치너 백작과 세실리아 페이 자작이 당당하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던 것.

“오랜만에 보는 군.”

“예, 오랜만에 뵙습니다.”

“음악회는 즐거우셨나요?”

“물론입니다. 자작님은 어떠셨는지요?”

세 사람이 화기애애하게 대화하기 시작하자, 계속 기회를 엿보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러나 레이와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성공한 이는 없었다. 프레더릭과 세실리아가 도무지 그럴 틈을 주지 않았던 것.

프레더릭은 자신이 친하다고 생각하는 레이에게 화제의 인물로 등극한 것에 대해 할 말이 많았고, 페이 자작은 사냥 대회 때 레이를 챙겨주지 못한 것이 미안해서 적극적으로 말을 걸고 있었다.

심지어 두 사람은 손발도 잘 맞아서, 페이 자작은 레이에게 다가오는 여성 귀족들을, 프레더릭은 남성 귀족들을 분담해서 막아주는 모양새가 되었다.

특히나 페이 자작은 레이에게 보다 순수한 욕망을 품은 듯한 레이디들의 접근을 아주 효과적으로 차단하고 있었다.

덕분에 편해진 레이는 빤질빤질한 얼굴로 웃고만 있어도 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모든 접근을 막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세드릭 알무스···.’

그다지 반갑지는 않지만, 그는 가까이 두고 관찰해야 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레이는 세드릭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레이의 눈이 돌연 커졌다. 세드릭의 몇 걸음 뒤에서 똑같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황태자 때문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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