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받는 삶
팔락.
이번 사태와 관련된 내용이 대서특필로 보도된 신문을 찬찬히 넘기며, 세드릭 알무스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재차 말했다.
“아주 재미있어.”
오랜만에 느끼는 흥미로움은 창백한 그의 얼굴에 혈색이 돌게 했고, 따듯한 헤이즐넛 색 머리카락에 대비되는 서늘한 청회색 눈동자를 반짝이게 했다.
툭.
세드릭은 다 읽은 신문을 내려놓았다. 그는 입가에 띄운 잔잔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티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다 자신의 곁에 시립한 노집사를 향해 여상스레 물었다.
“그래, 여전히 알아낸 바가 아무것도 없다고?”
“면목이 없습니다, 세드릭 님.”
“···뭐, 괜찮아. 자네에게 걸리는 것이 없었을 정도라면 상대가 만만찮은 인물들이라는 소리일 테니. 지금부터라도 촉각을 바짝 곤두세우면 되겠지.”
어쨌든 재미있으면 그만이라고 다시금 중얼거린 세드릭은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어떨 때는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신문을 들여다보는 간단한 행동만으로도 피로했기에.
그러나 그는 얼마 가지 않아 다시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요즘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흥미롭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그 콧대 높던 프로비던스의 노괴가 이렇게 느닷없이 누구인지도 모를 인물에게 한 방 먹다니. 그 꼴을 바로 옆에서 구경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건 참으로 아쉽네.”
“아직 데미안 소르본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습니다. 한번 알아보도록 할까요?”
“아니, 그럴 것까지야.”
살짝 고개를 저어 보인 세드릭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잔뜩 성나 있을 늙은이를 굳이 긁어서 뭐 하겠어. 어차피 뻔하고 지루한 반응이나 돌아올 건데.”
“알겠습니다.”
“지금은 보는 눈도 많고··· 때가 되면 그쪽이 알아서 찾아올 거야. 애초에 이런 일로 완전히 고꾸라질 인물도 아니고.”
“그래서 더 의외이긴 합니다.”
“뭐가?”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허용했다는 것 자체가 말입니다.”
“아아. 최근 들어 너무 대담하게 일을 진행한다 싶긴 했지. 뭐, 돈이면 뭐든지 다 될 거라 여기는 그 오만한 안일함에서 비롯된 불운이지 않을까?”
졸부의 천성을 버리지 못한 거지.
뒷말을 조용히 삼킨 세드릭은 집사가 건넨 찻잔을 들어 올리며 작게 키득거렸다.
“그 노괴는 지금까지 수많은 경쟁사의 인재들을 아무렇지 않게 매수해 왔잖아? 사람의 신의가 돈 앞에서 얼마나 부질없는지 그렇게 봐왔으면서, 정작 제 손주가 같은 이유로 자신을 배신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것 같지?”
“그 말씀은··· 엘리엇 소르본이 돈 때문에 자신의 조부를 저버렸다고 보시는 겁니까?”
“뭐, 언제까지나 프로비던스의 ‘차기 회장’에 머물고 싶지는 않을 거 아냐? 그리고 현 회장을 빨리 끌어내리기 위해서는 이만한 기회도 없었을 거고.”
달칵.
세드릭은 입술만 살짝 축인 뒤 찻잔을 미련 없이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소파에 몸을 묻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이번 일로 프로비던스가 적지 않은 손해를 본 것은 사실이지. 특히나 비밀 연구소가 발각된 것, 그리고 초능력자 산업의 선두주자가 될 기회를 놓친 것은 제법 뼈 아플 거야.”
“······.”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직 발생하지 않은 미래 이득이고, 지금 당장은 프로비던스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잖아.”
세드릭의 설명을 조용히 경청하던 노집사는 아직 새것이나 다름없는 찻잔을 한쪽으로 치우며 물었다.
“데미안 소르본의 뜻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프로비던스 전체가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는 것보다는, 자신만 희생하고 손주는 무고하다 여겨지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 것이라면···.”
집사의 추측에 뭐라 답할 듯 입술을 달싹이던 세드릭은 이내 그저 작게 웃으며 긍정했다.
“하기야,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군. 남의 집 속 사정이야 모르는 거니까. 이러나저러나 딱히 중요한 것도 아니고.”
세드릭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신년 음악회에 늦지 않게 도착하려면 지금부터 슬슬 준비를 해야 했으니.
자연스럽게 따라붙어 그의 단장을 돕기 시작한 집사는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꺼냈다. 유독 지루함을 못 견디는 세드릭을 오랫동안 모시며 생긴 습관이었다.
“평소에 잘 참석하시지 않는 행사에 갑자기 가신다 하여 놀랐습니다. 혹 따로 눈여겨 보시는 인물이라도 있는 겁니까?”
“아아, 있지. 얼핏 보면 이번 사태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최대 수혜자나 다름없는 사람.”
“···루체스 남작 말씀이십니까?”
“그래. 앞으로는 그자와 주변 인물들을 유심히 관찰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세드릭은 곧 소년처럼 눈을 빛내며 생긋 웃었다.
“그때 만나보니까, 이쪽은 뭔가 긁으면 긁는 대로 재미있는 반응이 나오는 타입이더라고.”
* * *
사실, 요즘 레이가 이번 사태와 모종의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는 것은 세드릭 알무스 혼자가 아니었다.
그를 새로운 영웅으로 추켜세우는데 동참한 이들 중 상당수가 이미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그가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건 말도 안 되지.”
“그건 그렇습니다.”
황실 신년 음악회를 몇 시간 앞둔 시각. 오늘 초대받은 귀족들과 주요 인사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친목 도모와 정보 교환의 일환이었는데, 오늘의 가장 큰 화두는 단연코 레이 루체스라는 인물의 행보였다.
“어쨌든 이번 일로 가장 수혜를 받은 것이 바로 루체스 백작··· 아니, 아직은 남작이지. 어쨌든, 그치 아닌가.”
“모든 것이 우연이라기에는 너무 잘 맞아 떨어졌죠.”
“기회를 봐서 이쪽으로 끌어들이려 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눈에 띄게 행동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다들 그 소문은 들으셨나요? 그의 작위식에도 황태자 전하의 입김이 들어갔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사실이라면, 대체 어떻게 그 속을 알 수 없는 황태자의 눈에 든 건지 의문이군.”
만약 레이가 이 대화를 들었다면 자기가 더 궁금하다고 물어봤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윌리엄 황태자는 그저 자신의 흑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빈센트가 귀찮아 하는 친구 1 정도였으니까.
물론 이러한 사실을 알리 없는 제삼자들은 계속해서 레이에 대한 추측을 늘어놓았다.
“지금 초능력자와 관련된 일이라면 전부 직접 판을 깔고 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 오스틴 콕스 와도 연이 깊다는 말이 돌던데···.”
“그래서, 그의 배후에 누가 있다고 보십니까?”
“그거야, 아무래도 이나투스 아니겠습니까? 루체스 남작이 대리인 역할을 하는 거고요.”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갈수록 의문이 들어서 말입니다. 그 이나투스 후작이 굳이 이 분야에 진출한다고요?”
같은 귀족이라고 해도, 가문마다 대대로 이어온 주 사업분야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나투스는 부동산을 통해 대부호의 반열에 오른 것으로 유명한 가문이었다.
드넓은 후작령에서 거둬들이는 기본적인 수익에 더해, 제국은 물론이고 세계 곳곳에 있는 각종 부동산과 호텔 체인을 통해 벌어들이는 돈이 어마어마했던 것.
덕분에 이나투스는 숨만 쉬어도 재산이 알아서 불어나 정확한 측정이 불가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이는 즉, 이나투스가 굳이 아직 개척되지도 않은 산업에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달려들 이유가 없다는 뜻이었다.
초능력자 관련 산업은 인권 등 민감한 문제와 엮일 요소가 다분해서, 자칫하면 오명을 뒤지어 쓸 위험이 있었으니까.
“이나투스 후작이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일까요? 왜, 이전에도 제약 연구소를 설립할 만큼 소일거리에 진지한 편이잖아요.”
살루스 연구소는 가이아를 통틀어 가장 잘 팔리는 진통제를 개발해낸 곳이다. 그럼에도 빈센트의 소일거리로 취급받는 것은, 원래 가업에서 얻는 수익이 그만큼 더 크기 때문이었다.
“뭐가 되었든, 한 가지는 확실하군요.”
돌고 돌던 이야기의 주제는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지금부터라도 레이 루체스 남작에게 눈도장을 찍어 둬야겠어요. 본인이 판을 깔아 이득을 본 것이든 아니든, 현재 그가 그 산업에 가장 선봉에 선 인물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으니 말이죠.”
* * *
이처럼 많은 이들이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레이 루체스 남작은 현재 매우 곤혹스러워하고 있는 중이었다.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남작님.”
평소 온화한 말투를 쓰던 집사 알베르트가 드물게 엄중한 목소리로 레이의 어깨를 누르며 말했다.
“집사 말이 맞습니다. 움직이지 마시고 눈 뜨지 마십시오.”
“잠깐, 애런, 진짜 잠깐만!”
“왜 그러십니까?”
“아니, 이거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아?”
“절대 안 됩니다.”
찹!
찰진 소리와 함께 차가운 팩이 레이의 얼굴에 들러붙었다. 아침부터 벌써 세 번째 하는 팩이었다.
“······.”
눈 코 입을 빼놓고 빈틈없이 달라붙은 팩 때문에, 레이는 강제로 입을 다물었다. 팩을 붙인 상태로 얼굴 근육을 움직였다가 어마어마한 잔소리에 시달린 바가 이미 있었기 때문.
벌컥.
“사장님! 지금 바쁘··· 어, 많이 바빠 보이시네요. 그, 파이팅 하세요!”
노트북을 들고 방에 들어왔던 서혜리는 레이의 상태를 보고 그대로 뒤돌아 나갔다. 응원의 한마디도 잊지 않으며.
그리고 잠시 후, 오늘 레이와 함께 음악회에 가기로 한 루크가 말쑥한 차림새로 들어오려다 뒷걸음질 쳤다.
“형. 저희 이제 출발··· 못하겠네요? 이따 다시 올게요.”
“······.”
그렇게 침묵 속에서 15분을 버틴 레이는 마지막 단장을 돕는 집사와 애런에게 참고 참다가 한마디를 하려 입을 열었다.
“꼭···.”
딱 한마디에서 그쳐야 했지만.
레이가 입은 셔츠의 단추를 꼼꼼히 채운 애런은 그의 넥타이를 단단히 조이며 레이가 하려던 말에 열 마디 이상으로 답했다.
“예, 꼭 해야 합니다. 무려 황실에서 주최하는 신년 음악회이니까요. 지난 번 사냥 대회보다 더 많은 귀족들이 한껏 멋을 내고 오는 행사란 말입니다!”
“······.”
레이도 애런과 알베르트가 왜 이렇게 유난인지 머리로는 이해했다. 신년 음악회에 초대되었다는 건, 공식적으로 ‘그들만의 리그’에 들어섰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래도 너무 기합이 들어간 것 아니냐고 따지려는 찰나, 애런의 잔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요즘 그 사건을 수습하시느라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지 않으셨습니까! 오늘 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남작님을 주목할지 아십니까? 주인공이 되시는 건데, 얼굴에서 광이 나도 모자라지요!”
“아니, 사람이 바쁘면 좀 푸석할 수도 있···.”
그런데 이때, 놀랍게도 알베르트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아니요, 그러실 수 없습니다. 남작님,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사교 행사에서 젊은 귀족이 가진 최고의 무기는 그가 쌓은 업적이 아니라 그의 싱그러운 젊음입니다.”
“···어?”
레이가 얼이 빠진 얼굴로 바라보자, 알베르트가 차분히 덧붙였다.
“예전에 빈센트 님께서 첫 사교계 데뷔를 하셨을 때 어떠셨는지 아십니까?”
“···아니?”
“말 한마디 없이 가만히 앉아만 계시다 오셔도 좋은 평판이 돌았습니다. 그게 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알베르트는 소싯적 빈센트의 빛나는 미모를 찬양하려 한 얘기였으나, 레이는 조금 다른 관점을 가졌다.
“그거 그냥 조용히 있어서 반이라도 간 거 아닌···.”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말은 끝맺지 못했다. 애런이 블랙 스노우 플레이크를 넥타이 브로치로 단단히 고정시켜주며 단호하게 말했던 것.
“남작님, 사교계에서는 일단 얼굴이 빤질빤질해야 이기고 들어가는 겁니다.”
“······.”
“남작님을 싫어하는 이들은 그럴수록 재수 없어 할 것이고, 남작님께 호감을 가진 이들은 남작님의 얼굴이 빛날수록 더욱 좋아할 테니까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