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자들의 세계 (260)화 (260/274)

길었던 터널의 끝

마르셀라는 전형적인 연구원 체질이었다. 세상 물정은 잘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고, 오로지 연구에만 몰입하는 성격을 타고났던 것.

여기에 수재들만 모였다는 엘릭서에서도 수석 연구원에 오를 만큼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삶에 꽤나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세계적인 제약 회사에서 최고의 지원을 받으며 마음껏 연구에 집중할 수 있었으니까.

‘···멍청이가 따로 없었지.’

연구실을 벗어난 마르셀라 하퍼는 그저 헛똑똑이에 불과했다.

엘릭서를 나와 새로운 연구소를 설립하자던 동료 연구원들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었다.

누구도 밝혀내지 못한 진실. 세계를 뒤흔들 연구 결과. 그것을 밝혀내는 영광을 손에 쥘 수 있다는 꾀임은 그녀의 판단력을 흐렸다.

‘거대한 덫에 걸렸다는 것도 모르고.’

계속 정신없이 휩쓸리다가 문득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지했을 땐, 그녀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 있었다.

자신의 남편이자 든든한 동료였던 제이슨은 어느새 유리벽 안에 갇힌 실험 쥐 신세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높으신 분들’에게 따로 불려가 마주하게 된 진실은, 한낱 개인이 거부하거나 고발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설사 자신의 목숨을 바쳐 이 일을 세상에 알린다 한들, 그저 잠깐 소란이 일다가 수그러들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정작 당사자들은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을 테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부조리와,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다는 절망이 그녀의 숨통을 조여왔다.

그러나 버텨야만 했다. 자신마저 포기하거나 순응하면, 모든 진실은 그대로 영원히 묻힐 뿐일 테니까.

그래서 더더욱 연구에 미친 사람처럼 굴었다. 윗선에서 원하는 대로. 계획을 위해 동료 연구원들은 물론이고 남편 마저도 속였다.

그러던 어느 날, 결국 남편을 연구소에서 탈출시키는데 성공했다. 비록 제이슨이 자신을 평생 원망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아니, 그래야 마땅하다고 여겼다. 그의 삶을 망가뜨린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으니까.

이후, 그녀는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다른 연구원들과 함께 다시 엘릭서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동안의 ‘업적’을 인정받아 이곳의 책임자로 발령 받게 되었다.

‘끔찍하게도.’

마르셀라는 이곳에서 또 한 번 자신의 무력함을 실감했다.

자발적으로 인체 실험에 지원하는 이들을 볼 때도 그랬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까지 이곳에 갇혀 있는 것을 봤을 때의 참담함이란.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너무 어리면 인체 실험에 적합하지 않다고 피력하고 싶어도, 정확한 연구 결과를 위해서는 최대한 다양한 실험체가 필요하다는 말에 반박할 수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제이슨 때처럼 무턱대고 탈출시키는 것도 불가능했다.

일단 예전 연구소보다 이곳의 감시가 더 심하고, 자신이 의심을 살 것이 분명하다는 것도 문제였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어린 아이들이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간다 해도 제이슨처럼 알아서 잘 숨어 지낼 거라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결국 마르셀라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자신의 선에서 최대한 아이들의 실험을 미루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끝없는 죄책감과 두려움 사이에서 허우적대며 기약 없이 버티고 또 버텼다.

그리고 마침내, 생각지도 못한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콰아아아.

연구소 안은 여전히 뜨거운 불길과 짙은 연기, 그리고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로 엉망진창이었으나, 그 가운데에는 바람으로 만들어진 통로가 하나 생겨났다.

“······.”

마르셀라는 태풍의 눈처럼 고요한 그 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아이들이 곤히 잠들어 있는 병원 침대를 꿋꿋하게 밀면서.

덜컹!

이따금씩 굵은 전선 따위에 걸린 침대가 흔들렸지만, 마르셀라는 굳건한 눈빛으로 침대를 다잡으며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뒤는 일부러 돌아보지 않았다. 미안함, 고마움, 그 모든 감정은 이미 마지막 인사와 함께 묻어두었기에.

저벅저벅.

마침내 다다른 출구에는, 마르셀라와 아이들을 비추는 눈부신 빛이 기다리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여기 아이들이 있어! 덮을 것을 가져와!”

“······.”

그것은 자신을 포함한 어른들의 죄는 낱낱이 밝히고, 아이들에게는 새로운 희망을 알려줄 빛이었다.

그 눈부신 광경에, 마르셀라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길고 어두운 터널의 끝이었다.

* * *

“선생님, 여기 추워요!”

차가운 겨울 공기에 몸을 바르르 떤 아이는 그래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이내 주변을 둘러보며 해맑게 웃었다.

“헤헤, 밖이다.”

“우와, 사람 많다···.”

“경찰차다! 왜 경찰차가 왔지?”

어떤 아이들은 이불 속에서 고개만 빠금 내민 상태로 주변을 관찰했고, 어떤 아이들은 대담하게 침대 바깥으로 뛰어내려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처음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갑자기 바뀐 환경과 소란스레 돌아다니는 어른들을 보고 놀라서 가만히 있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커진 모양이었다.

작았던 목소리들도 점점 커져갔고, 굳었던 표정도 점점 밝아졌다.

따뜻한 방에서 나와 마주한 세상은 어수선한 데다 제법 쌀쌀하기까지 했으나, 상상보다 넓었고, 공기는 상쾌했으며, 하늘은 드높았기에.

“앗 차가워!”

한 아이는 맨발로 잔디밭을 이리저리 돌아다녀 보다가, 이내 신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 우리 왜 바깥으로 나온 거예요?”

“···나올 때가 되었으니까. 왜, 혹시 싫으니?”

마르셀라의 질문에, 아이는 머리를 붕붕 저었다. 그 움직임에 따라 양 갈래로 묶은 머리도 이리저리 흔들렸다.

“아니요, 너무 좋아요! 하늘이 보이니까!”

“그래···.”

사람에게는 하늘을 마음껏 바라볼 자유가 있어야지.

그 말을 속으로 삼키며, 마르셀라는 실로 오랜만에 고개를 들어 어느덧 구름이 걷힌 하늘을 눈에 담았다.

* * *

[베리타스 데일리의 헬렌 브라이튼 기자입니다. 저는 지금 프로비던스 산하에 있는 카엘레스티아 컨트리 클럽에 나와있습니다. 지금 제 뒤로 보이시는···.]

투타타타!

헬렌 브라이튼의 목소리가 헬리콥터의 소음을 뚫고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생방송으로 송출되고 있는 영상에는 상공에서 내려다본 카엘레스티아 컨트리 클럽의 전경이 보이고 있었다.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시커먼 연기가 끊임없이 피어오르고 있는 빌딩과, 그 건물에서 대피한 듯한 하얀 가운 차림의 연구원들과 환자복 차림의 사람들이었다.

서혜리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오스틴의 TFT와 군부대, 경찰들, 그리고 뒤이어 도착한 구급차들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쪽에는 레이가 홧김에 번개를 내려친 탓에 처참히 부서져버린 데미안 소르본의 동상의 잔해도 보였다.

이러한 광경이 뉴스를 통해 밤새도록 전국에 방송된 것이다.

단, 처음에는 ‘프로비던스의 비밀 연구소 발각’ 정도의 제한된 정보만이 풀렸다. 기자든 TFT든,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

그러나 동이 트는 것과 함께 서혜리와 스벤이 열심히 정리한 자료가 추가로 퍼졌고, 프로비던스에 이어 엘릭서의 이름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헤드라인을 장식한 이 뉴스는 다음날 제이슨이 기자회견을 열고 자신이 겪은 일을 공개하면서 더더욱 화제가 되었다.

세계적인 대기업 두 곳이 얽힌 이 전대미문의 스캔들은 계속해서 널리 널리 퍼져갔다. 아무리 대단한 힘을 가진 권력자라고 해도 도무지 통제할 수 없을 만큼.

마침 소문이 커지기 좋은 시기인 탓도 있었다. 각종 연말연시 모임에서 이 소식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들불처럼 번져갔던 것. 덕분에 평소 뉴스를 보지 않는 사람들조차 비밀 연구소에서 자행되던 초능력자 인체 실험에 대해서는 모를 수 없게 되었다.

내용 자체가 워낙 자극적인 것도 소문의 확산과 파급력에 한몫 했다.

요즘 시대에도 인체 실험이 이루어졌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자행한 이들이 대기업 중에 대기업들이라는 것까지, 무엇 하나 자극적이지 않은 부분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매우 당연하게도, 프로비던스와 엘릭서는 이번 일로 이미지에 직격타를 맞았다.

이 사태와 연관된 것으로 드러난 임직원들의 해고 또는 구속 소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특히나, 직접적으로 카엘레스티아 컨트리 클럽을 운영했던 데미안 소르본은 불구속 기소 처분을 받고 프로비던스 회장직을 내려 놓았다. 그가 지하 연구소에서 벌어지는 일을 몰랐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으니까.

반면, 그의 손주이자 차기 회장으로 손꼽히던 엘리엇 소르본은 조사 끝에 정상 참작되었다.

자발적으로 오스틴 콕스를 찾아가 비밀 연구소에 대해 알린 데다, 현장에 출동한 그와 동행하며 검문에 적극 협조한 사실이 확인되었기 때문.

이처럼 프로비던스는 회장의 사임, 그리고 실무진의 양심고백과 적극적인 수사 협조로 이번 사태를 빠져나가려 했다.

더불어 인체 실험 피해자들에게는 두둑한 피해 보상과 안전을 약속함으로써 대중의 뭇매를 피하고 엉망이 된 기업 이미지를 수습하려는 노력도 했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정도 통했다. 언론이 그들을 필요 이상으로 건드리려 하지 않았던 것.

만약 누군가가 그들의 완벽한 몰락을 원했다면, 훨씬 더 많은 진실이 파헤쳐 졌을 것이다.

그러나 프로비던스는 서민들의 일상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기업이었기에, 적당한 선에서 수습을 허락받았다는 것이 일각의 의견이었다.

한편, 이번 사태의 또 다른 주축인 엘릭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했다.

본사는 인체 실험과 관련된 사항은 일절 보고받지 못했다고 입장 표명을 한 뒤, 제멋대로 실험을 진행한 연구원들을 모두 해고했다는 말과 함께 꼬리를 자른 것.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거의 없었지만, 어쨌든 책임을 진 사람들이 있었기에 일단은 이쯤에서 일단락되었다.

마지막으로, 이 사태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음에도 대중에게 크게 주목받은 단체가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세이비어 재단이었는데, 이번에 수면 위로 드러난 피해자들을 책임지고 보호하겠다고 나서면서 화제가 된 것.

언론들이 앞다투어 세이비어 재단을 찬양하고 나선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사회에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면, 그것을 수습하는 역할을 맡을 이도 필요했으니까.

이에 따라 그동안 아는 사람들만 알고 있던 환생자 구조 프로젝트, 초능력자들을 위해 설립된 아카데미,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주도한 레이 루체스 남작이라는 이름이 재조명 받았다.

재단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일반인과 사회단체들의 기부금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물론, 이러한 흐름이 그냥 저절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일단, 세 명의 유능한 오퍼레이터들이 레이를 위해 열심히 인터넷 여론을 움직였다. 적당한 밀고 당기기를 통해 효과적으로 사람들을 부추겼던 것.

이와 더불어, 일부 권력자들의 힘도 함께 작용했다. 그들은 룩스 제국에서 이런 사건이 벌여졌다는 사실에서 어떻게든 대중의 관심을 돌리길 원했고, 이를 위해 한 명을 영웅으로 만드는 것을 합리적인 방안으로 본 것.

이처럼 여러 이해관계가 얽힌 관계로, 레이 루체스 남작의 백작위 수여식은 당초 계획되었던 것보다 훨씬 성대하게 치러지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해졌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중심에서 한 발 비켜난 채 흐름을 예의주시하던 세드릭 알무스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가볍고도 가벼운 한마디를 뱉었다.

“재미있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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