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자들의 세계 (259)화 (259/274)

선을 넘은 사람들

털썩.

이길 수 없는 상대에 대한 두려움과 힘의 오남용으로 인해 이미 한계까지 내몰렸던 청년은 레이가 머리에서 손을 떼자마자 그대로 기절했다.

레이가 방금 그에게 해준 특별 시술은 지난번 나이젤에게 해주었던 것과는 정확히 반대되는 개념이었다.

그때는 답답하게 막혀 있던 곳을 뚫어 흐름을 원활하게 해준 것이라면, 이번엔 과하게 뚫려 있던 곳들을 다시 막아버린 것이었으니까.

‘그대로 두었다간 위험했을 거야.’

청년은 자신이 본래 다룰 수 있는 수준을 한참 벗어난 힘을 사용했다. 비록 그것이 한순간뿐이었더라도, 분명 몸에 크게 부담이 갔을 것이다.

한마디로, 억지로 얻은 강력한 힘을 휘두를수록 스스로의 생명을 깎아 먹는 짓이 될 것이란 소리.

“······.”

레이는 좋은 꿈을 꾸듯 평온해진 청년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다시 보아도 이제 겨우 스물이나 되었을까 싶을 정도로 앳되었다.

‘이런 사람들이 몇 명이나 더 있는 걸까···.’

잠시 씁쓸해하던 레이는 이내 고개를 젓고 기감을 널리 퍼뜨렸다.

이 정도로 소란을 피웠으니 모든 경비 인력이 이쪽으로 몰려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의 감각에 가장 먼저 걸린 것은 지하에서 썰물 빠지듯 한쪽으로 빠져나가는 사람들의 움직임이었다.

‘시작됐구나.’

먼저 진입한 일행이 예정대로 움직여 주고 있음을 확인한 레이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돌연 청년의 옆에서 성인 만한 크기의 꼬투리 하나가 불쑥 솟아올랐다. 그리고 꿀렁이는 움직임과 함께 머금고 있던 경비원을 토해냈다.

철퍼덕!

“······!”

레이는 바닥을 적시는 정체불명의 점액질을 피해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고 있는데, 어느새 다가온 헤이든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저 경비원은 내일 눈을 뜰 때쯤이면 오늘 밤 일 같은 건 가물가물 할 겁니다. 지금 살짝 약에 취해 잠든 상태 거든요.”

“···살짝이요.”

“예,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니까요. 아무튼, 여기 이 청년에게도 비슷한 조치를 취해줘야 하지 않을까요?”

레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이 청년이 자신처럼 사람 고유의 기운을 구별할 수 있다면 나중에 곤란한 일이 생길 수도 있었으니.

‘능력을 되돌려 놨으니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보이긴 하지만.’

텁!

꿀렁!

스스스···.

그가 동의를 한 순간, 꼬투리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청년을 머리부터 삼켰다. 그 모습에 다시 한 번 몸서리 치면서도, 레이는 상황 파악을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다른 경비원들이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헤이든은 여유로운 태도로 꼬투리를 쓰다듬으며 그의 의견을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먼저 들어간 일행과 합류해야죠. 저들이 믿음직스럽기는 하지만, 저도 제 할 일은 해야 하니까요.”

“레이 씨라면 그러실 것 같았습니다. 그나저나 어느 방향으로 진입하실 거죠? 참고로 아까 저분들은 공중에서 저쪽 환풍구로 빠졌습니다.”

헤이든이 친절하게 리암 일행이 들어간 곳을 알려주었으나, 레이는 그 길을 그대로 이용할 생각이 없었다.

“저는 좀 더 쉽게 가겠습니다.”

레이는 그렇게 말하며 등 뒤에 메고 있던 총을 손에 쥐었다.

철컥!

지난 번에 받은 레이저 총은 황태자와 그의 친우들의 얼굴이 조각된 산과 함께 날려먹었기에, 지금 이건 니콜라이에게서 다시 뜯어낸 것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첨단 기술의 집합체를 무식하게 폭탄처럼 쓰는 놈에게 내어줄 물건은 없다며 거부당했다.

그러나 그의 딸 글로리아가 레이의 선물인 보석 딸랑이를 매우 마음에 들어 한 덕분에, 니콜라이는 못 이기는 척 새로운 레이저 총을 내어주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써봐야지.’

레이의 입가에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개시도 하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했던 레이저 총의 한을 풀어줄 때가 드디어 온 것이다.

* * *

화륵!

화르르!

느닷없이 연구소를 덮친 화마는 겉잡을 수 없이 번지며 몸집을 키워갔다. 곳곳에 비치된 소화기도, 천장에서 떨어지고 있는 스프링클러의 물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정도로.

심지어 불이나 물을 다루는 초능력자들의 능력도 통하지 않았다. 잠깐 수그러드는 것 같다가도, 잠시 후 오히려 더 불이 더 거세지기만 했던 것.

이러다 보니 처음에는 지침대로 사태를 수습해 보려던 연구원들과 경비원들조차, 이제는 비명을 내지르며 유일한 출구를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으아아악! 저리 비켜!”

“꺄아악!”

“쿨럭, 쿨럭!”

곳곳에서 무작위로 치솟는 불길을 피해 도망가는 사람들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선연한 공포였다.

사방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 천장을 가득 메운 매캐한 회색 연기, 그리고 이곳이 창문 하나 없는 폐쇄된 공간이라는 사실 때문에 공황에 빠졌던 것.

“X발, 길 막지 말라고!”

퍼엉!

게다가 생명의 위협을 느낀 초능력자들이 극심한 불안과 공격적인 행동을 보이기까지 했기에, 지하 연구소 안은 점점 아비규환의 수라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심히 수상한 현상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이는 없었다.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이는 불길은 물론이고 스프링클러의 물줄기조차도 어째서인지 컴퓨터와 기기들은 전혀 건드리지 않고 있다는 점이라든가, 짙은 회색 연기가 이상하게도 천장 쪽으로만 자욱하게 퍼져서 CCTV를 죄다 무용지물로 만들고 있는 점 등을 말이다.

“···흠, 이 주변에는 아무도 없나요?”

“그런 것 같소만.”

“그러면 뚫겠습니다.”

“아니, 잠깐···!”

콰앙!

투두둑.

연구소 깊숙이 자리한 구석진 공간. 돌연 천장이 굉음과 함께 부서지며 세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리암은 제 발로 날렵하게 착지했고, 페니는 바람을 타고 사뿐하게 내려섰다. 그리고 제이슨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추락하다가 페니 덕분에 엉덩방아를 찧는 것으로 그쳤다.

“···거 기왕이면 멀쩡하게 내려주면 어디가 덧납니까?”

“이런, 죄송해요. 저는 리암 씨가 잡아줄 줄 알았답니다?”

페니는 은은한 미소를 띄운 채 대답하면서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그리고 제이슨이 ‘하나도 안 미안해 보인다’고 투덜거리는 동안, 그녀는 주변에 있는 컴퓨터로 다가가 스벤에게서 받은 기기를 연결했다.

그녀가 기기에 달린 작은 안테나를 세우자, 이어폰에서 삐빅 하는 소리와 함께 스벤의 음성이 들려왔다.

[연결 완료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약 10분 정도 소요될 것으로 예상···.]

그런데 그가 채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발랄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것보다는 조금 더 걸려요! 한 15분쯤?]

[10분이나 15분이나, 그게 그거잖습니까!]

[에헤이, 이런 작전에서 5분 차이가 얼마나 큰데 이러실까. 역시, 경험이 부족한 티가 이런 데서 드러나네.]

[뭐라고요? 지금 말 다했습니까?]

[꼭 할 말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물어보는 거 알아요?]

“어우 귀 따가워.”

제이슨은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이어폰을 잠깐 뺐다가 꼈다.

두 사람은 여전히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지만, 바쁘게 손을 움직이는 소리도 들려왔기에 그래도 각자의 할 일은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타닥, 타다닥!

타닥타닥, 타닥!

그렇게 두 사람이 열심히 연구소의 기밀 정보와 CCTV 영상을 확보하는 동안, 현장에 나와있는 세 사람은 그저 조용히 주변을 지켰다.

사실, 15분은 결코 짧다고 할 수 없었다. 보통은 그 안에 누군가 들이닥치고도 남을 시간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사람들이 빠져나가기 바쁜 연구소의 가장 안쪽. 따라서 경계를 서는 세 사람의 얼굴에 이렇다 할 걱정은 엿보이지 않았다.

“······.”

다만, 제이슨은 다소 떨떠름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화르르!

세차게 타오르는 화염이 내뿜는 뜨거운 열기와 일렁이는 불빛, 아까부터 끊임없이 울리고 있는 화재 경보음, 그리고 점점 짙어지는 연기까지.

페니의 공기 통제 능력 덕분에 숨을 쉬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그는 자신이 재난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분명히 좋은 일을 하러 온 건데, 왜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은지 모르겠네.”

그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페니가 특유의 은근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거야, 이쪽 관계자들한테는 확실하게 나쁜 사람들이니까 그런 것 아닐까요? 무단 침입에, 방화에, 기밀 정보 탈취까지. 참 다양하게도 나쁜 짓을 하고 있네요.”

“거, 루프트 박사는 도대체 누구 편입니까?”

“후후, 글쎄요.”

그렇게 두 사람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느긋하게 잡담을 하고 있던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이곳을 향해 급하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

즉시 대화를 멈추고 발소리에 집중하던 일행은 곧 각자 행동에 들어갔다.

철컥!

리암은 총을 꺼내어 발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겨눴고, 제이슨은 이곳으로 접근하기 힘들도록 불을 더 거세게 피워올렸다. 그리고 페니는 천장에 몰려 있던 연기를 인기척이 나는 곳으로 보냈다.

이 정도 했으면 물러설 만도 하건만, 발걸음 소리는 조금 비틀거리는 것 같다가도 계속 가까워졌다. 불난리 속으로 뛰어들 만큼 중요한 무언가가 이곳에 있다는 것처럼.

그리고 마침내 지척에 다다른 사람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제이슨의 불길이 주춤했다. 아무리 화재용 대피 마스크를 쓰고 있다고 해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었기에.

“···마르셀라.”

“······.”

마르셀라는 복면을 쓴 세 사람을 발견하고도 잠시 아무 말 없이 서있다가, 자신을 겨누고 있는 총구에도 아랑곳 않고 그들을 지나쳐 갔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벽 앞으로 가 자신의 카드 키를 가져다 댔다.

삑!

드르륵!

그러자 이 연구소 책임자의 카드 키로만 열리는 숨겨진 문이 드러났다.

“······!”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제이슨 일행은 숨을 죽이고 마르셀라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드르륵!

무거운 철문이 천천히 열리고, 짧은 복도 너머로 또 하나의 문이 나타났다.

마르셀라는 거추장스러운 듯 마스크를 벗어 들더니,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땀과 재로 범벅이 된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그녀의 옅은 갈색 눈동자는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

그러나 그녀는 이내 마음을 굳게 먹은 듯, 거침없이 다음 행동을 이어갔다.

삑!

삐빅!

[확인되었습니다.]

마르셀라가 카드 키와 지문 인식이 필요한 두 번째 문의 잠금까지 풀자, 비밀 연구소와는 전혀 상관이 없을 법한 공간이 나타났다.

파스텔 톤의 벽, 나란히 놓인 작은 침대들, 푹신한 매트가 깔린 바닥, 그리고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장난감들까지. 이 알록달록한 방은 의심의 여지없이 아이들을 위해 마련된 공간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침대 위에는 총 일곱 명의 어린 아이들이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나이는 어림잡아 5살에서 10살쯤.

바깥의 난리에도 전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무래도 약에 취해 강제로 수면에 든 것처럼 보였다.

그 충격적인 광경에 모두가 할 말을 잃고 바라보는 사이, 뒤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게 무슨···.”

레이저 총으로 연구소 벽면을 뚫고 일행을 찾아온 레이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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