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자들의 세계 (257)화 (257/274)

안 보고 못 배기는

갈 곳을 잃은 이들이 서로 힘을 모아 살아가는 스텔라 힐즈. 그 곳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스텔라 신전.

달칵.

비단옷을 곱게 차려 입은 어린아이가 따듯한 김이 올라오는 찻잔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

대무녀의 시선이 점심을 먹고 뒹굴다가 곤히 잠든 치카와 시빌의 얼굴에 머물다가, 이내 창밖으로 향했다.

새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산속의 풍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마음이 차분해지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평화롭구나.’

이 고즈넉한 평안함이 깃든 일상은, 그녀가 오랫동안 바라 마지않던 것이었다.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어미와 갈 곳 없는 두 어린 소녀를 책임지기로 결심한 이후, 그녀는 이를 악물고 버텨왔다.

그 당시 그녀가 그렸던 하루는 오늘과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도 따듯한 곳에서 배곯지 않고 편안히 지낼 수 있는 것. 그거 하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의 목표를 이뤘다고 할 수 있는 지금, 에스텔라는 문득 회의감이 들었다.

‘···너무 내 방식대로만 이 아이들을 이끌어 온 것은 아닐까?’

그때는 전생의 기억과 타고난 능력을 살려 신전을 세우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최고의 선택이라 믿었다.

실제로 그녀는 몇 년 동안 신통한 아기 무당으로서 활약한 끝에, 꽤나 번듯한 보금자리를 일궈낼 수 있었다.

‘문제는 이 녀석들이지.’

자신과는 달리 이렇다 할 신력도 없으면서 매일같이 무녀복 차림으로 생활하는 아이들. 에스텔라는 최근 들어 부쩍 이 아이들의 장래에 대한 걱정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이 세계에서의 나이만 따지면 오히려 에스텔라 쪽이 더 어렸지만, 그녀는 시빌과 치카를 자신이 마음으로 낳은 아이들처럼 여겼다.

그래서 더욱 신경 쓰였다. 전생의 자식들은 자신의 직업을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이 아이들이라고 다를까?’

사실은 무녀 역할을 하는 것이 싫지만, 그저 내색을 못하는 것일 뿐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너무 어렸을 때부터 이 일을 해 온 탓에 무감각해졌을 가능성도 있고.

그리고 본인들이 괜찮다고 해도, 주변의 시선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무녀라는 특이한 직업을 고수하는 이상, 정말로 평범한 일상을 가질 수는 없을 테니까.

‘어느 정도 금전적인 여유도 있으니, 이제라도 신전을 정리하는 것이 좋으려나···.’

물론 새 출발을 하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대무녀’라는 이름을 버리면, 에스텔라는 그저 평범한 12세 소녀가 될 뿐이다.

게다가 제 어미에게 보호자 역할을 기대할 수 없으니, 아이들과 계속 함께 지내려면 무언가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쉽지가 않구나.’

그렇게 에스텔라가 고요함 속에서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고 있는데, 시빌이 돌연 끙끙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 것이 잘 자다가 갑자기 왜 이러는···.”

에스텔라가 의아해하면서 시빌을 흔들어 깨우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손이 닿기도 전에, 시빌이 번쩍 눈을 뜨더니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허헉···!”

시빌은 마치 전력 질주라도 한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무릎으로 기어서 탁자까지 오더니, 에스텔라가 내려놓은 찻잔을 집어 들어 단숨에 비워냈다.

이른 본 에스텔라는 작은 손으로 시빌의 등짝을 매섭게 내리치며 호통쳤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지! 밥이란 밥은 다 먹고 귤까지 까먹다 퍼질러 자던 것이 웬 호들갑이여?”

“앗 따가! 아, 잠깐만요 어머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럼 뭣이 중헌디!”

“저, 저 그 뭐냐, 방금 접신! 그래, 접신! 그런 걸 한 것 같아요!”

“그게 뭔 개소리여!”

“아니, 진짜라니까요? 일단 들어보세요! 어머니라면 이해하실 거예요! 글쎄 웬 넓은 들판 위에서 번쩍번쩍 번개가 마구 치는데, 그 속에서 누군가 위풍당당하게 걸어 나왔다고요!”

“···그냥 다시 퍼질러 자라.”

“아니, 막 번쩍이는 번개의 남신을 봤다니까요! 얼굴은 안 보였지만 왠지 엄청 잘생겼을 것 같았다고요!”

“에라이, 이 년아.”

에스텔라는 자다 깨서 횡설수설하는 시빌을 향해 근처에 있던 귤을 냅다 집어 던졌다.

* * *

띠딕··· 띠디딕···.

제이슨은 헤이든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가 들고 있는 작은 단말기에서 지속적으로 흘러나오는 기계음이 신경 쓰였기 때문.

헤이든에게 괜한 질문을 던졌다가 추가 업무만 얻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에 뭘 묻기가 꺼려지긴 했지만, 제이슨은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저기,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그건 대체 뭡니까?”

“저희 이동 경로를 나타내 주는 기계입니다. 땅속의 매립된 전선이나 배관, 지하 시설물을 피해서 돌아가다 보면 방향을 잃기 쉬우니까요. 참고로 스벤 씨가 제작해 주신 겁니다.”

“흠, 그 친구는 그런 기계를 뚝딱뚝딱 잘도 만들어 내는군요.”

“예. 비록 이미 존재하고 있는 기술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입맛에 맞게 설계해서 바로 실사용이 가능하도록 제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는 흔치 않죠.”

그때,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레이가 헤이든을 향해 힘겹게 물었다.

“···지금 스벤과 나이젤이 탄 차량의 움직임도 제대로 확인됩니까?”

두 사람은 오늘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침입조가 비밀 연구소 전산 시스템에 스벤표 특수 장치를 연결시키면, 원격 조정을 통해 정보를 뽑아낼 예정이었던 것.

“네, 서로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으니 좋군요. 아, 저쪽은 이제 이동을 멈췄습니다.”

의심을 사지 않을 만한 위치이면서도 카엘레스티아 컨트리 클럽 주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다다랐다는 얘기였다.

“저희도 이제 컨트리 클럽 부지에 들어선 것으로 표시되는군요. 그럼 일단 숲 쪽으로 이동해서···.”

그 순간, 레이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동시에 일행의 머리 위로 굉음이 들렸다.

콰과광!

* * *

우르르릉···!

새로 들어온 후배와 함께 순찰을 돌던 컨트리 클럽의 베테랑 경비원은 얼이 빠진 얼굴로 야산 쪽을 돌아보았다.

그는 방금 전 한줄기의 번개가 내리꽂혔던 장소와, 그곳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후배를 번갈아 보다가 물었다.

“바, 방금 당신이 그런 겁니까?”

“예, 예···!”

신입 경비원은 숨을 헉헉 몰아쉬면서 대답했다. 그의 이마는 어느새 식은 땀으로 흥건한 상태였다.

“···아니, 갑자기 왜요? 그것도 맨땅에?”

되묻는 베테랑의 목소리에서 희미한 짜증이 묻어났다.

느닷없는 번개에 놀란 것도 그렇지만, 자신의 새로운 순찰 파트너가 영 어리숙해 보였던 것.

사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이가 무시무시한 힘을 휘두를 수 있다는 것도 짜증 나는 동시에 두려웠다.

그런데 이 후배는 선배의 타박에 위축되는 대신 꿋꿋이 대답했다.

“저기, 땅속에 사람이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예, 뭐라고요? 참 나···.”

베테랑은 골치 아프다는 듯이 제 머리를 짚었다. 이 어리바리한 신입이 가리킨 곳은 지하 연구소가 있는 방향이 아니었으니까.

“이봐요, 땅속에서 사람이 어떻게 움직입니까? 두더지 같은 거랑 헷갈린 거겠죠.”

“아닙니다! 분명히 사람이었습니다! 그것도 한 명 이상···! 어, 어어?!”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선배를 향한 억울함, 그리고 갑자기 큰 힘을 쓴 힘겨움 때문에 붉어졌던 신입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피어올랐다.

“아, 뭔데 또 그러는···!”

번쩍!

콰아앙!

답답함에 분통을 터뜨리려던 베테랑은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번쩍이는 불빛과 함께 일대의 모든 가로등과 CCTV가 터져나가는 가운데, 돌연 그의 발 밑이 쑥 꺼져버렸기 때문.

“이게, 무슨···! 아악!”

신입은 베테랑 경비원이 사라져버린 곳을 바라보다가, 섬광탄처럼 터지는 불빛에 눈을 가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누군가 자신에게 접근해 오는 것을 느끼며 반사적으로 힘을 사용했다.

* * *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오스틴은 몇 시간째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서류더미에서 고개를 들며 물었다.

그리고 그렇지 않아도 바쁜 연말연시에 초능력자 수색 TFT 일까지 보느라 침침해진 눈가를 문질렀다.

처음 TFT가 결성되었을 때만 해도,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강력한 초능력자들을 수색해 내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루체스 남작을 통해 충격적인 사실들을 접하게 된 이후, 그들이 하는 일은 조금 다른 성격을 띄게 되었다.

단순히 유능한 초능력자들을 찾아내어 협조를 구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초능력자들의 인권과 보호를 위해 움직이는 것으로.

지금 오스틴이 살피고 있던 서류도 이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제이슨을 실험체 취급하다가 엘릭서로 복귀했다던 연구원들의 뒤를 밟고 있는 요원들의 보고서였던 것.

“지금 나를 찾아올 사람은 없는데··· 누구지?”

“예, 프로비던스의 엘리엇 소르본입니다.”

“엘리엇 소르본이라···.”

손님의 정체를 들은 오스틴은 더더욱 의아함을 느꼈다.

엘리엇이라면 오다가다 보는 사이라 어느 정도의 친분은 있었지만, 이렇게 연락도 없이 찾아올 정도는 아니었기에.

심지어 이 TFT는 외부인에게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그래도 기껏 찾아온 이를 문전 박대 할 이유 또한 없었기에, 오스틴은 비서에게 그를 안으로 들이라고 지시했다.

“어서 오십시오. 미리 연락이라도 주셨다면 좋았을 텐데요.”

“급한 일이라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급한 일이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오스틴은 비서에게 이만 나가봐도 좋다고 손짓했다.

엘리엇은 잠시 침묵하며 앉아있다가, 이내 오스틴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TFT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습니다. 대신, 외부로 알려지지 않도록 조용히 처리해 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말씀이군요.”

오스틴은 엘리엇이 TFT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 자체는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이 TFT가 설립될 당시부터 높으신 분들의 이권 싸움이 이어졌으니, 여기저기 줄을 대고 있는 프로비던스의 차기 회장이 무언가를 알고 있다 해도 크게 이상할 것은 없었으니까.

‘오히려 현 정부에서 정보가 새지 않는 편이 더 이상할 지경이지.’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엘리엇의 제안은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그래서 오스틴은 일단 이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저희 TFT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TFT인지 정확히 아십니까?”

그런데 엘리엇은 오스틴의 질문에 얼핏 동문서답처럼 들리는 대답을 내놓았다.

“제가 오늘 이렇게 찾아온 이유는, 오스틴 씨가 무언가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

“제가 부탁하려는 일에는 여러··· 높으신 분들의 이권이 얽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이 새어나간다면, 방해를 받을 위험이 매우 높지요.”

“······.”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신고를 받아들이고 일에 착수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는···.”

띠링!

오스틴이 무어라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연 순간, 그의 모니터 화면에 새로운 알림이 떴다.

TFT 내부적으로만 사용되는 이메일 주소에, 정체불명의 발신인이 보내온 한 통의 이메일.

[긴급!!! 중요!!! 절대로 놓치면 안 되는 타임 딜 신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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