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자들의 세계 (256)화 (256/274)

겨울의 꼬투리

비록 술에 취한 탓에 발음이 중간중간 꼬이기는 했으나, 블레이크는 제법 명확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잘 안 풀리던 연구소를 접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들어온 스카우트, 카엘레스티아 컨트리 클럽에 위치한 지하 연구소, 그리고 임상 시험을 빙자한 인체 실험까지.

“뇌의 활성화··· 를 위한 여러 가지 실험을 진행했어. 고강도의 전기 자극이랑, 약물 투약··· 그리고 별 이상한 실험까지···.”

그는 자신이 다니게 된 연구소에서 어떤 실험들이 이뤄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털어놓았다.

미미한 수준의 초능력을 약물로 강화할 수 있는지, 나아가 일반인들에게도 초능력을 발현시키는 것이 가능한지를 확인하기 위해 자행되고 있는 짓들에 대해서.

물론 레이는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라 대충 듣고 넘겼다. 지금은 제대로 꼬리를 잡았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다만, 블레이크의 말들 중에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인체 실험을 받는 이들 중 아무도 별다른 반발을 보이지 않았다고?”

“어. 초능력은 정신 상태에 영향을 받는다는 가설 하에··· 주로 고양감을 느끼게 해주는 약물을 쓰는데···.”

그럴싸한 말로 포장했지만, 결국 마약성 흥분제와 비슷한 약물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실험이 끝날 때는 꼭 안정제를 주입해. 그것도 말이 좋아 안정제지··· 그들은 정확히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제대로 인식조차 못할 거야.”

“그래서, 네가 보기에 효과는 있어 보였어?”

“어느 정도는···? 어, 그건 있다고 봐야겠지.”

그건 그랬을 것이다. 제이슨은 겨우 담뱃불을 붙일 수 있던 능력이 강력한 푸른 불꽃을 마음대로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으니까.

그러나 그는 사실 기적적으로 잘 풀린 경우였다.

본인은 과도한 자극을 견딘 덕분에 웬만한 약에 대한 저항성이 높아졌다며 가볍게 말했지만, 보통은 그런 과정을 버텨내는 것 자체가 힘겨울 것이다.

‘그렇게 여러 약물을 투입하고 나면 뇌에 후유증이 남을 수밖에 없을 텐데···.’

이런 레이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블레이크가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헤집으며 중얼거렸다.

“그 사람들은 나중에 제대로 된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거야··· 아니, 그들에게 나중이란 것이 과연 있을까···?”

“······.”

레이는 진심으로 괴로워하는 블레이크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주었다.

‘이 녀석의 상황을 고려하면, 연구원들의 양심고백을 언론에 공개하는 방법은 힘들겠어.’

일단, 집안 전체가 프로비던스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는 점부터가 걸렸다. 그가 나서서 프로비던스를 고발할 경우, 그의 가족에게 어떤 보복이 가해질지 모를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설사 인터뷰를 한다 한들, 무사히 방송을 타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어쩌면 그런 인터뷰를 했다는 사실이 새어 나가서 괜히 저쪽에게 대처할 시간을 주기만 할 수도 있는 상황.

‘무엇보다, 정작 인체 실험을 당하는 사람들이 탈출에 대한 의지가 없어 보인다는 것이 문제야.’

현 상태에서 비밀 연구소를 무턱대고 언론에 폭로해 봤자, 레이가 원하는 결과는 나오기 힘들 것이다.

오히려 프로비던스가 실험체들의 상태에 대해 멋대로 떠들고, 모든 것이 합의하에 이루어진 것이라며 좋게 포장할 수 있는 기회만 주는 꼴일 테니까.

‘그렇다고 뭐가 잘못된 건지도 모르고 갇혀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설득하는 것도 쉽지 않을 테고···.’

레이는 어느덧 가물가물 잠에 빠지려고 하는 블레이크를 흔들어 깨우며 한 가지를 더 물었다.

“엘리엇은? 엘리엇에게는 찾아가 봤어? 그도 이 일에 대해서 알아?”

“···엘리엇? 아, 엘리엇.”

블레이크는 한 손으로 마른 세수를 하며 한숨처럼 말했다.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그리고 나도 어서 빠져나오라고 말하더라.”

“앞뒤가 안 맞는 말이군.”

“자기가··· 조용히, 처리하겠다고··· 병가를 내든지··· 일단 나와서··· 조용히 입다물고 있으라고···.”

“···그래, 알았다. 그만 자라.”

블레이크는 그대로 테이블 위에 엎어져 버렸다. 애런이 사람을 불러 그를 자택으로 돌려보내는 동안, 레이는 홀로 앉아 조용히 생각을 정리했다.

그는 엘리엇이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면서도, 조용히 처리하겠다고 했다는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아무래도 최근에 그 일에 대해서 알게 됐고, 그걸 혼자서 어떻게든 수습하려는 심산인 것 같은데···.’

레이는 솔직히 회의적이었다. 엘리엇이 제 회사의 죄를 옹호하지 않고 무언가 손을 쓰려는 듯한 마음은 가상했으나, 어쩐지 실패할 확률이 높아 보였던 것.

게다가 ‘조용히’ 처리하겠다는 것은 이 일을 공론화하지 않겠다는 뜻인데, 그건 레이의 입장에서 조금 곤란했다.

이내 마음을 정리한 레이가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때마침 애런이 돌아왔다. 그는 레이의 어깨에 코트를 걸쳐주며 그의 의견을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친구들이 지고 있는 마음의 짐을 좀 덜어줘야겠어. 기왕이면 올해가 가기 전에.”

“엘리엇 소르본은요? 따로 만나서 말씀을 나누지는 않으실 겁니까?”

“음, 딱히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기업을 살리기 위해서는 손자가 할아버지를 저버리는 패륜을 저질러야 하겠지만··· 그 정도 업보야 알아서 하겠지.”

* * *

크리스마스 저녁, 루체스 남작저.

풍족한 저녁 식사를 마친 루체스 일가와 손님들은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트리와 따듯한 벽난로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한동안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선물을 주고받고 대화를 나누다가, 이윽고 보다 진중한 태도로 회의를 시작했다.

가장 먼저 운을 뗀 것은 리암이 손수 떠준 샛노란 스웨터를 그 자리에서 껴입은 서혜리였다.

“그 놈들을 한 방에 보낼 수 있는 확실한 증거라면, 역시 연구소에 보관된 모든 연구 자료와 데이터를 확보하는 것이 최선이겠죠?”

단순 고발만으로는 사건이 은폐될 가능성이 높다. 권력자들이 연루된 데다, 연구원들과 실험체들이 사실을 부인하면 그만이었으니까.

따라서 절대로 잡아뗄 수 없는 증거를 손에 넣어야 하는데,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프로비던스의 비밀 연구소는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시설이라, 서혜리가 평소처럼 해킹할 수가 없었던 것.

“결국 누가 안으로 직접 들어가서 정보를 빼내와야 한다는 얘긴데.”

“연구원이나 청소부로 위장해서 들어갈 수는 없을까요?”

루크가 눈을 반짝이며 묻는 말에, 제이슨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비밀 연구소에 들락날락하는 직원들 신원확인을 허술하게 할 리가 없잖아. 설사 직원이라도 내부 자료를 외부로 가져가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할 테고.”

“쉽지 않네요···.”

“쉽지 않지. 거의 철옹성이나 다름없으니까.”

지상에 있는 건물이라면 외부로 드러난 수많은 창문과 문을 통해 침입을 시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블레이크에게 알아낸 바에 의하면, 비밀 연구소로 향하는 방법은 단 두 가지였다.

회장실에 있는 전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거나, 지하주차장에 있는 연구소 직원 전용 통로를 이용하거나.

“그리고 그 통로들도 지하에서 하나로 이어지니, 결국 연구소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은 하나뿐이라는 거잖아요?”

설사 삼엄한 경비를 뚫고 1차 진입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2차 진입에서 막히는 것이다.

“그러면 안에 있는 사람들을 빠르게 제압하고 데이터를 빼내 오면···.”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변수가 너무 많아. 침입자들을 대비해 연구소 내부에 어떤 장치를 해놨을지도 모르는 상황이고.”

“그리고 가능하면 이쪽이 가진 무력에 대한 정보를 남기지 않는 것이 좋을 텐데요.”

“사고로 위장해야 된다는 소리잖아. 그 유일한 출입문도 사용하지 않아야 하고.”

“그 와중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전산 시스템에 접속해야 하고 말이죠.”

따져보면 따져볼수록 쉽지 않은 조건에,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레이는 지금이 상식에서 벗어난 무식이 필요한 시점이라 여겼다.

“단순하게 생각하죠. 저희가 할 수 있는 것들 위주로.”

“좋은 방법이 있으신 거예요?”

“다들 아시다시피··· 일단 연구소 근처까지만 간다면, 내부에 있는 사람들을 바깥으로 몰아내는 것 자체는 간단하게 할 수 있습니다.”

제이슨은 그 ‘간단한’ 방법에 대해서 뭐라 딴지를 걸고 싶은 말들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애써 삼키고 다른 부분을 지적했다.

“이쪽에서 안으로 진입하는 건? 연구원들이 빠져나왔다고 우리가 유유자적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런··· 상황이 되면 그렇지 않아도 연구소로 시선이 쏠릴 텐데.”

“지하에 있는 연구소이니, 땅속으로 이동해서 벽을 뚫고 들어가면 됩니다. 벽이야 어떻게든 뚫을 수 있겠죠. 무력으로든, 레이저로든.”

레이의 과격한 계획에, 이번 임무에서 사정상 제외된 류양이 떨떠름한 얼굴로 의문을 표했다.

“그런 게 가능하다는 것도 놀랍지만··· 조금 더 조용한 방법은 없겠어?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연구소 내에 있는 이들과 불필요한 충돌을 피할 수 있는.”

이번에는 페니가 손을 들어 올리며 자신의 의견을 냈다.

“환풍구를 이용하는 건 어떠세요? 그렇게 큰 건물이면 없을 리가 없거든요.”

“···왜 경험이 있다는 얘기로 들리지?”

“후후, 글쎄요.”

의미심장하게 웃은 페니는 이내 이러한 의견을 낸 이유를 설명했다. 아무리 비밀리에 만든 지하 시설이라 한들, 환풍 시스템은 기본적인 건물들의 구조를 따랐을 것이라는 것.

“도면이 없다는 게 아쉽지만, 현장에 가면 제가 파악할 수 있답니다.”

“흠, 괜찮은 의견 같은데요 사장님? 어느 정도 여기저기 부술 필요는 있겠지만, 그래도 지하에서 벽을 뚫고 나타나는 것보다는 얌전할 테니까요.”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도록 하죠.”

레이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방법을 택할지는 당일에 가봐야 알겠지만,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 두는 편이 좋았으니까.

“또 다른 의견 없습니까?”

비밀 연구소 습격에 대한 회의는 제법 긴 시간 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실행할 만한 전략은 얼추 다 나왔을 때, 일행은 이번 임무의 목적과 행동 방침을 천천히 되짚어보았다.

먼저 연구소 안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바깥으로 내보낸 후 내부로 진입한다.

그 다음 전산 시스템에 접속해서 필요한 정보를 추출하고, 미리 신고를 넣은 경찰과 오스틴의 TFT가 들이닥치기 전에 탈출.

이후 확보한 증거를 빠르게 확인하여 배포할 자료를 추린다.

그것을 언론과 인터넷에 뿌리는 동시에 정부기관에도 넘겨서 이 일을 공론화시키는 것까지가 이번 임무의 골자였다.

그리고 다음날, 레이는 첫 단추를 꿰는 과정에서 커다란 괴로움을 겪어야 했다.

드드드드드!

땅 속을 헤치며 이동하는 거대한 꼬투리 속에는 레이와 헤이든, 리암, 제이슨, 그리고 페니가 함께 앉아 있는 상태였다.

비록 햇빛은 없었지만, 식물이 자체발광을 하는 덕분에 서로를 알아보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

“수장님, 어디 아프신 건가요?”

페니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앉아 있는 레이를 발견하고 물었다. 그러나 레이는 대답할 기운도 없다는 듯, 그저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드드드드드!

꽤나 많은 인원을 태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대 꼬투리는 매우 힘찬 기세로 땅속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 꿀렁거리는 승차감과 두근두근 박동하는 괴상한 생물체의 내부에 다시 들어왔다는 것부터가 끔찍했지만, 레이를 더욱 괴롭히는 것은 따로 있었다.

스으으···.

레이는 자신이 기억하던 것보다 훨씬 습하고 뜨끈하게 부는 식물의 숨결에 진저리를 쳤다. 지옥 같은 순간을 이 악물고 견디던 그는, 묘하게 승리자의 얼굴을 하고 앉아있는 헤이든을 향해 물었다.

“···이거 말입니다. 그때보다 더 뜨겁고 끈적하게 호흡하는 것 같은데, 제 착각입니까?”

참다 참다 던진 질문에, 헤이든은 여느 때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물론이죠, 겨울이니까요. 춥고 건조한 계절에 딱이지 않습니까?”

이에 대답한 것은 공기 능력자인 페니였다. 그녀는 꼬투리의 내부 벽을 손으로 짚으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정말 놀랍네요. 공기의 질도 아주 깨끗하고··· 어머나, 수장님! 호흡 곤란이 오신 것 같으면 오른 손을 들어주세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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