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속삭임
“배웅도 마다하고 가셨네요.”
“갈 길이 바쁘신 모양입니다.”
“분명 웃고 있는데도 무섭던데요.”
서혜리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던 헤이든의 표정을 떠올리며 말했다. 이에 레이는 평온한 어조로 대답했다.
“본인 상사가 허락한 일인데 어쩌겠습니까.”
“부탁은 사장님이 하신 거잖아요.”
“그야··· 편한 길이 있는데 굳이 돌아갈 필요는 없으니까요.”
“한 사람은 전혀 편하지 않은 데도요?”
“헤이든 씨가 능력을 쓰는 걸 혜리 씨가 직접 못 보셔서 그렇습니다. 지하터널을 뚫는 정도는 저분께 그리 힘든 일이 아닙니다.”
“에이, 시간 외 근무라는 게 문제죠! 하여간, 가만 보면 사장님이 제일 못된 것 같다니까요.”
“제가요?”
레이가 진심으로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되물었고, 서혜리는 그런 그를 보며 고개만 설레설레 저었다.
이에 레이는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았으나, 다들 바쁜 일이 있다며 자리를 피했다.
어차피 회의도 끝난 터라 잡을 명분이 없었기에, 잠시 후 레이의 곁에 남은 것은 리암과 애런 뿐이었다.
“남작님, 바로 이동하시겠습니까?”
“내가 어디 가려는지는 알고?”
“블레이크 씨가 가장 있을 법한 곳으로 갈 생각 아니신지요?”
“···맞아, 굳이 미룰 것 없으니까.”
“예, 그러면 바로 차를 준비시키겠습니다.”
레이는 따로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의중을 척척 읽어내는 보좌관을 잠시 응시하다가 물었다.
“그런데 말이야, 네가 보기에도 그래?”
레이의 질문에 애런은 온화한 미소를 짓더니, 어딘가 자부심마저 느껴지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남작님.”
“역시 그 정도는 아니라는 거지?”
“아니요. 어차피 세상에 ‘좋은 상사’라는 것은 없으니 신경 쓰실 필요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내가 헤이든 씨의 상사인 건 아닌데.”
“그렇지만 후작님의 허락을 얻어내셨지요. 그리고 곧 자작보다 작위가 높아지실 예정이니 이래저래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조금 일찍 하극상을 부려도 문제없을 거라며 웃는 애런의 모습에, 레이는 자신이 이 전직 플루투스 브로커에게 너무 물든 것은 아닌가 잠시 고민했다.
* * *
스페치알리 메모리아스 호텔 12층에 위치한 미모사 북클럽.
디자이너부터 배우, 화가, 그리고 유력가 자제들까지, 한창 재능을 꽃피우는 젊은 예술가들과 후원가들이 함께 어울리는 곳.
이 품격 있으면서도 사치스러운 사교모임은 연말연시 시즌을 맞이하여 매일 같이 파티를 열었다.
오늘도 클럽 마스터 마리 블레어의 기준을 만족시킨 회원들과 그 파트너들은 밝게 웃고 떠들며 한창 파티를 만끽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블레이크 도슨의 타고난 성정을 생각하면, 그는 그 한복판에 있어야 마땅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술, 음악, 가십, 그리고 주목받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니 하루가 멀다 하고 파티가 벌어지는 연말 시즌은 그에게 최고로 신나는 시기였던 것.
거기다 저마다의 뛰어난 능력과 화려한 배경을 갖춘 멤버들 틈에 있다는 것 자체가 이 사회의 주류에 속한다는 하나의 증명이 되기에, 그가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하아···.”
그러나 오늘의 그는 메인 홀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대신, 프라이빗 룸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의 젊은 인생을 통틀어, 요즘만큼 속이 복잡한 나날이 없었기 때문.
“······.”
블레이크는 어깨를 힘없이 축 늘어뜨린 채로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거리 위로 소복이 쌓인 흰 눈, 금빛 전구가 반짝이는 가로수, 그리고 갖가지 장식으로 꾸며진 건물들.
동화에 나올 법한 아름다운 광경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아니, 애초에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건가···.’
블레이크는 프로비던스의 임원으로서 언제나 고군분투하던 자신의 아버지를 보며 자랐다. 그리고 생각했다. 자신은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물론 대기업 임원의 자제로서 누리는 것도 많았지만, 프로비던스 특유의 사내 정치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프로비던스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의약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블레이크는 자신이 정말로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다. 사회 초년생답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도 컸고, 열정도 넘쳤으니까.
유능한 선후배들과 함께 항우울증 신약개발을 위한 프로젝트 팀을 결성했고, 야심 차게 투자를 받아 연구소를 설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의욕만 앞섰던 것이 문제였다. 그의 팀은 모든 것이 갖춰진 환경에서 연구하는 것에만 익숙했을 뿐, 직접 연구소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지식과 경험은 없었던 것.
연구에 별다른 진척이 없으니 계속해서 투자자들의 눈치가 보였다. 그렇다고 집에 손을 벌리는 것은 싫어서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으나,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연구소를 설립한지 오래지 않아 문을 닫게 되는 부끄러운 상황이 되었다.
연구소를 세우기 전에 워낙 여기저기 많이 얘기를 흘리고 다닌 탓에, 더더욱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던 것.
그래도 수치심으로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그의 팀은 곧 스카우트 제의를 받게 되었다. 프로비던스 임원 자제들의 모임을 통해서.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찾아간 곳은 다운타운의 한 세련된 오피스였다.
자세한 설명은 안에 들어가서야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을 스카우트 하려는 건 엘릭서의 연구원들이 독립해서 설립한, 초능력자들의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위한 임상 및 의료 연구소라고.
엘릭서 출신 연구원들이라는 이름값, 시대에 발맞춘 듯한 연구 내용, 그리고 소개해 준 이가 지인이라는 점은 그가 별 의심 없이 계약서에 사인을 하게 만들었다.
연구소에서 제시한 연봉도 좋았고, 모양새도 제법 괜찮아 보였으니까. 그래서 신약 개발을 위한 비밀 유지 서약서를 작성할 때만 해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지 못했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의문을 느낀 것은 첫 출근 날이었다.
연구소로 안내하겠다면서 프로비던스 산하의 멤버십 골프장인 카엘레스티아 컨트리 클럽에 들어섰을 때는 이게 뭔가 싶었고, 지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두 눈으로 확인했을 때는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본 선배 연구원은 그런 모습이 익숙하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한마디 했다.
‘너무 걱정 마. 머지않아 법안이 통과될 예정이니까. 그러면 프로비던스는 이 분야의 선두주자로서 자리매김하게 되겠지. 우리는 그 영광을 함께 누릴 기회를 얻은 거라고.’
블레이크는 겨우 그런 감언이설에 넘어갈 정도로 어리숙하지 않았다. 다만, 이어진 말에 반박할 수 있을 정도로 대범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네 아버지도 이미 알고 계실지도 모르잖아? 카엘레스티아 컨트리 클럽 지하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뭐, 어느 쪽이든,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
그때 블레이크는 깨달았다. 겨우 비밀 유지 서약서 따위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그의 온 집안이 프로비던스의 그늘 아래 있었다. 자신이 섣불리 움직였다가 나머지 가족에게 어떠한 여파가 있을지 모를 일.
“젠장···.”
블레이크는 고개를 푹 숙이며 머리를 쥐어 뜯었다가, 벌써 몇 잔 째일지 모를 술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의 팀원들은 조금만 지나면 당당해질 수 있다는 말에 넘어간 듯했지만, 블레이크는 그런 말에 혹할 만큼 도덕성과 이타심이 결여된 인간이 아니었다.
애초에 며칠만 임상 시험에 임하는 환자들의 상태를 지켜보면 알 수 있는 진실이 있었다.
‘시험 중이 아닐 때는 일견 멀쩡해 보였지만···.’
와락 얼굴을 구긴 블레이크는 아예 술병을 입으로 가져가 꿀떡꿀떡 들이켰다. 이미 주량을 한참 넘었음에도 정신이 놓아지지 않았다.
그가 새로운 술병을 막 집어 들었을 때, 누군가 그의 등을 툭툭 쓰다듬듯 두드렸다. 놀란 블레이크가 고개를 휙 돌렸고, 그곳에는 사람 좋은 미소를 걸친 레이가 있었다.
“뭘 이렇게 혼자 많이 마셨어.”
“어···.”
뭔가 그럴싸한 인사를 건네야 하건만, 블레이크는 제대로 된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고 그저 어버버했다.
그러나 그의 잘난 친구는 그런 그를 타박하지 않고 다정하게 찬물 한 잔을 건네 주었다.
“힘든 일이 있으면 날 부르지. 친구 좋다는 게 뭔데.”
심적으로 너무 힘들었던 블레이크는 믿음직한 친구의 다정한 말과 행동에 그만 눈물이 핑 돌았다.
그가 건넨 물에서 처음 마셔보는 술 맛이 살짝 난 것도 같았으나,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결국, 블레이크는 그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일들을 술술 쏟아내기 시작했다.
* * *
“그래서 투자자들 눈치가 너무 보이더라고··· 아니, 우리 아버지 앞에서는 한마디도 못할 인간들이 엄청 뭐라고 했다니까?”
“그래, 네가 많이 억울했겠네.”
레이는 비슷한 얘기를 벌써 세 번째 반복하고 있는 블레이크의 주정을 들어주며 재차 잔을 채워주었다.
그가 이제 그만 그 다음 얘기를 해주기를 기대하면서.
‘분명 뭐가 더 있을 거야.’
레이가 알기로, 블레이크는 하던 사업이 망했다고 해서 이 정도로 무너져 내릴 위인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건만, 블레이크는 무언가 새로운 얘기로 넘어가려 할 때마다 머뭇거렸다. 아무리 취했어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지키겠다는 듯이.
탁.
레이는 블레이크가 이번에도 도돌이표처럼 했던 이야기를 반복하려는 것을 보고 바에 잔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그는 지금 블레이크의 머릿속에 있는 정보가 필요했다.
물론 실제로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동안 미모사 북클럽 안에서 인맥을 넓히는데 그의 도움을 받은 것도 많았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좀 모자라서 그랬지 애는 착했다.
돌려 말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나가기로 한 레이는 친구의 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블레이크,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거라 그랬어.”
앞뒤를 잘라낸 말이었으나, 무언가 찔리는 게 있었던 블레이크는 저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그, 그래···?”
“그래.”
프라이빗 룸의 조도를 훅 낮춘 레이는 자신의 목소리도 덩달아 낮췄다.
“지금이라도 모든 걸 말해. 미심쩍거나 뭔가 아닌 것 같은 일이 있다면 같이 해결해 나가자. 그렇지 않으면···.”
“않, 않으면?”
우르릉!
돌연 마른 하늘에 번개가 번쩍이더니, 곧이어 지척에서 천둥 소리가 들려왔다.
레이는 흠칫 떠는 블레이크의 어깨를 잡은 뒤,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벌이 내릴지도 몰라.”
“천벌?”
우르르릉!
다시 한 번 창밖이 환해지면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레이는 블레이크에게 더욱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나에게 말하면 돼. 고백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 결 나아질 거야.”
“그, 그럴까?”
“그렇다니까.”
레이는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만약 블레이크가 나중에라도 이 순간을 떠올린다면, 자신도 너무 취해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둘러댈 심산이었지만.
어쨌든 블레이크는 취기 때문에 더 쉽게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더 이상의 쓸데없는 저항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안 것인지는 몰라도, 더듬더듬 새로운 얘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