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자들의 세계 (254)화 (254/274)

공룡이 두 마리

“제가 이런 스튜디오를 많이 방문해 본 것은 아닙니다만, 이곳이 손에 꼽힐 정도로 좋다는 것 정도는 알겠군요.”

“예, 꽤나 심혈을 기울였다고 들었습니다.”

제이콥은 이 건물을 매입한 뒤 아낌없는 투자를 감행하였고, 촬영을 위해 최적화된 시설을 갖춘 곳으로 탈바꿈시켰다.

장비들 또한 모두 고가의 제품으로 마련했는데, 그중에는 업계 전문가들조차 쉽게 보기 힘든 것들도 있었다.

그러나 비전문가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다름 아닌 깔끔하고 세련된 인테리어였다.

“처음부터 내부 모습을 영상에 자주 담을 예정이었던 터라, 보이는 부분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합니다.”

스튜디오가 대중에게 자주 노출될수록, 누군가 이곳을 초능력자 집단의 비밀 아지트라고 생각할 확률은 줄어들 것이다.

“대담하면서도 효과적인 방식 같네요.”

“예. 그리고 본인의 능력이야 감추더라도, 대중 친화적인 초능력의 소유자들을 종종 게스트로 섭외한다고 합니다.”

“유하란 씨 같은 분들 말이군요.”

“맞습니다. 그리고···.”

레이는 아까부터 작은 발걸음 소리가 나는 뒤쪽을 잠시 흘끔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조금 높이며 말을 이었다.

“추후에는 아카데미생들 중에서 지원자를 받아 방송에 출연시켜볼 생각입니다. 예컨대 순식간에 꽃을 피울 수 있는 사라 양이라면 금세 인기를 끌 수 있을 것으로 보이니까요.”

콰당!

뒤쪽에서 누군가 가볍게 넘어지는 소리가 났지만, 두 사람은 당사자를 배려해 일부러 못 들은 척하며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초능력자 아카데미의 학생이라면 싫든 좋든 이목이 쏠릴 테니, 그 관심을 이쪽에서 먼저 긍정적인 방향으로 활용하는 것이 본인들에게는 더 좋을 수도 있겠군요.”

“그리고 대중들의 경계심을 낮추는 데에도 효과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린 학생들이라면 조금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미디어를 통해 자주 접하다 보면, 사람들은 점점 초능력자들에게 익숙해질 것이다.

막연한 두려움과 거부감이 드는 베일에 쌓인 존재가 아니라, 자신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사람으로.

그렇게 한 세대만 지나도 전반적인 인식과 대우가 지금보다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두 사람이 주고받는데, 앞서 걷던 제이콥이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이곳이 바로 회의실입니다. 두 분께서 말씀하신 찬란한 미래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물밑작업이 이뤄지고 있는 곳이죠.”

제이콥은 일렉티로서의 사명감과 자부심이 넘치는 모습으로 문을 열어주었다.

달칵.

일렉티 단원들, 류양과 그의 패밀리, 제이슨, 그리고 서혜리와 애런을 비롯한 루체스가 식구들까지.

각양각색의 초능력자들과 유능한 인물들이 한데 모여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 * *

레이가 최근 로레인 위트록에게서 얻어낸 정보를 전달하자, 회의실 안이 눈에 띄게 술렁였다.

“그러니까 현 총리의 납치를 사주한 게 프로비던스라는 거죠? 로비가 전혀 통하지 않는 인물이니까 갈아치우려는 목적으로?”

“예, 정리하자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로비 내용까지는 알 수 없었는데···.”

여기서 레이가 헤이든을 바라보았다.

“떠도는 소문일 뿐입니다만, 최근에 높으신 몇몇 분들 사이에서 초능력자 임상시험과 관련된 법안에 대한 얘기가 오간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프로비던스의 사업 중에 의료 산업과 연관 있는 것이라고 해봤자, 의료기기에 들어가는 배터리 정도가 전부 아닌가요?”

떠도는 소문과 프로비던스의 총리 납치 사주를 연관 짓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냐는 질문이었다.

“맞습니다, 지금은 심증일 뿐이죠. 다만 예전에 세드릭 알무스가 그런 식으로 말하더군요. 프로비던스에서 초능력자들 양성에 지대한 관심이 있고, 그쪽 회장이 욕심이 크다고 말입니다.”

“음···.”

더군다나 초능력자들을 중심으로 한 산업은 현재 유망 산업으로 떠오르고 있는 상황. 그러니 프로비던스가 미리 발을 담그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레이의 추측이었다.

그때, 누군가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앓는 소리를 냈다.

“엘릭서가 아니라 프로비던스라니. 우리가 그동안 헛다리 짚었던 건가?”

“너야말로 무슨 소리야? 상대해야 될 놈들 목록에 프로비던스가 추가된 거지, 엘릭서가 빠진 게 아니라고. 그쪽은 애초에 확실한 증거가 있잖아.”

슈베린의 천문대에서 일렉티를 사칭했던 이들이 가지고 있던 자료. 그것을 분석한 결과, 그들은 제이슨이 잡혀 있던 연구소의 연구를 똑같이 이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들의 연구 목적이나 수집하는 데이터의 종류가 제이슨이 과거에 당했던 실험과 너무도 흡사했던 것.

그런 데다 당시 그의 연구를 담당했던 마르셀라와 동료들은 현재 모두 엘릭서로 복귀한 상태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증거를 되짚어주자, 한 단원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면, 혹시 지금 두 기업이 담합해서 같이 움직이고 있다는 뜻일까요?”

“와, 그건 좀···.”

눈앞이 깜깜해지는 가설에,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엘릭서만 해도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제약회사다. 그리고 프로비던스는 에너지 산업을 중심으로 여러 굵직한 산업에 진출해 있는 글로벌 기업이고.

이러한 두 공룡이 손을 잡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들을 상대하려는 이들에게는 암울한 방향으로.

때문에 다들 잠시 말을 잃은 가운데, 누군가 꽤나 타당하게 들리는 질문을 했다.

“그런데 만약 그렇다고 해도, 엘릭서가 굳이 프로비던스와 손을 잡을 이유가 뭘까요? 자금이 모자라는 것도 아닐 텐데요.”

“본인들은 없고 프로비던스는 있는 무언가라면, 음지에서의 무력이지 않겠습니까.”

이곳에 모인 이들 중, 프로비던스가 암흑가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더군다나 프로비던스는 원래부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사들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슈베린에서 가짜 일렉티를 내세워 초능력자들을 수급하려 했을 때도 무력을 앞세웠고···.”

“더러운 일을 대신 도맡아서 해줄 존재가 필요했던 거였군요.”

한 단원의 중얼거림에, 제이슨이 동의를 표하며 한마디 거들었다.

“그것도 그렇지만, 프로비던스가 자본을 대면 엘릭서는 빠져나갈 구멍이 생긴다는 게 중요하지. 만약 일이 안 좋게 풀리더라도, 연구소 직원들이 사적으로 진행한 거라며 꼬리를 자르면 그만일 테니까.”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이지만, 직원 몇을 잘라내고 기업을 지킬 수 있기에 흔히 사용되는 수법이었다.

“서로 책임을 나누겠다는 얘기군요. 여럿이 얽히면 스케일이 커지는 만큼 누가 섣불리 건드리기도 힘들 테니까.”

“와, 진짜 있는 사람들이 더 하구나. 아니, 그렇게 굴어서 그만큼 커진 건가?”

“만약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이 일에 얽힌 이들이 과연 그 두 기업뿐일까요?”

마지막 질문을 들은 사람들의 고개가 자연스레 헤이든을 향해 돌아갔다. 이에 그는 차분한 얼굴로 자신의 의견을 들려주었다.

“각 기업의 대주주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가능성은 낮습니다. 연구의 성과가 나오고, 그것이 합법화되어 큰 수익을 창출할 수 있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겠죠.”

“···그렇다면 이런 얘기를 퍼뜨리려 해도 소용이 없겠군요. 관련된 모든 이들이 공론화를 막기 위해 손을 쓸 테니.”

자본과 권력이 뭉치면 이것이 문제였다. 진실에 다가섰더라도 섣불리 건드릴 수가 없다는 것.

“결국 해답은···.”

류양이 말끝을 흐리며 레이를 바라보았다. 제 친구의 문제 해결 방식이 충분히 예상 갔던 것. 아니나 다를까, 레이가 내놓은 방안은 단순하고도 과격한 것이었다.

“고상한 방법으로 잡으려면 너무 많은 시간과 인력, 그리고 돈이 들어 갈 겁니다. 그러니 현장을 덮치는 모습을 생방송으로 내보내는 것이 좋을 듯한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찬성이에요! 리에트구 경찰서장 부부를 보냈을 때 느꼈는데, 라이브로 때리는 게 가장 확실할 것 같더라고요!”

서혜리는 상대 쪽에 대응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마음에 든다며 손뼉을 쳤다.

루체스 남작가의 가장 강력한 행동대장 두 명이 의견 일치를 보자, 나머지 사람들은 별다른 의견 없이 다음 문제로 넘어갔다.

“자세한 작전이야 차차 짠다고 치면, 이제 문제는 하나군요. 이 모든 가설이 사실이라고 했을 때, 과연 어디에서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사장님, 프로비던스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을 알고 있잖아요. 그 사람을 털어 보시는 건 어때요?”

서혜리가 지칭하는 것은 두말할 것 없이 프로비던스의 차기 회장으로 점쳐지는 엘리엇 소르본이었다.

“그러고 보니, 분명 본인 입으로 초능력자 수집이 취미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일단 그의 비서부터가 초능력자이고 말입니다.”

줄곧 가만히 회의를 경청하기만 하던 애런이 예전의 한 식사 자리를 떠올리며 물었다. 레이 역시 이를 기억하고 있었으나, 그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글쎄. 그때 그가 관심을 보인 것은 환생자 구조 프로젝트에 활용할 수 있는 초능력뿐이었는데.”

“시치미를 뗀 것일 수도 있죠!”

“그럴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만···.”

레이의 감은 달리 말하고 있었다. 엘리엇이 이 일과는 무관할 것이라고.

‘뭐, 그렇게 믿고 싶은 것도 있기는 하지만.’

그가 본 엘리엇은 적당한 오만함과 출중한 능력이 버무려진 차세대 대기업 오너였다. 그리고 그 정도의 위치를 유지해 줬으면 하는 것이 레이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앞길이 창창한 인재니까.’

그러나 이런 개인적인 바람을 차치하더라도, 레이의 직감을 뒷받침 할 만한 증거는 많았다.

초능력을 기반으로 한 사업에 야심이 있다고 하기엔, 세이비어 재단 산하 아카데미의 재학생들을 향해 별다른 관심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리고 최근에 파티에서 만났을 때도, 레이는 엘리엇에게서 특별히 꺼림칙한 부분을 발견하지 못했었다.

‘···마르셀라 때문에 중간에 자리를 비우기는 했는데.’

시원시원하게 회의를 진행하던 레이가 잠시 생각에 잠기자, 이를 지켜보던 애런이 돌연 뜻밖의 이름을 꺼내 들었다.

“엘리엇 소르본에게서 별다른 성과를 얻을 수 없을 것 같으시다면, 프로비던스와 관련된 지인이 한 명 더 있지 않으십니까?”

“···블레이크 도슨?”

레이가 중얼거린 이름에 먼저 반응한 것은 의외로 헤이든이었다.

“아, 그 이름은 저도 최근에 들어본 이름이군요.”

“블레이크 도슨을 말입니까?”

“예. 살루스 연구소에서 받는 보고에 업계 소식도 포함이 되는데, 신약 개발을 위해 고군분투하던 그의 연구소가 문을 닫았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생각지도 못한 정보에, 레이는 다소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른 것이 아니라, 블레이크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던 탓이다.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갈 곳 없는 고급 인력에게 어떠한 제안이 들어갔을 수도 있죠. 특히나 프로비던스와 긴밀한 집안의 자제라면 더더욱.”

“···그렇군요. 예,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그러면 중요한 안건은 얼추 마무리되었다고 보면 될까요?”

다시 이나투스가로 돌아가야 했기에, 헤이든은 오늘 자신의 역할이 여기까지냐고 레이에게 물었다.

“아, 가시기 전에 잠시만 이것을 봐 주십시오.”

레이가 헤이든을 붙잡으며 스벤을 향해 손짓하자, 회의실 한가운데 거대하고 복잡한 3D 지도의 홀로그램이 띄워졌다.

푸르게 번쩍이는 선들로 연결된 지도를 본 헤이든은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이건 뭐죠?”

“세레누스의 지하 통로들을 누비며 만들어낸 지도입니다. 이중 상당수가 알바트로스가 뚫은 곳들이고요.”

“그러면 이 지도는···.”

“예, 곧 익명으로 오스틴 콕스에게 넘길 예정입니다. 알바트로스가 이용하고 있는 장소들의 입구를 표시해서 말이죠.”

“그렇군요.”

“그 전에 여기저기 좀 손을 보아서 누구도 모르는 저희만의 전용 통로를 확보하려고 합니다.”

스벤의 클릭 한 번에 지도 위로 금빛이 뻗어 나가며 새로운 터널들을 나타냈다. 그 광경을 보며 서서히 얼굴이 굳은 헤이든은 짐짓 모른 척하며 물었다.

“아··· 그래서 제게 이 지도를 보여주시는 의도가 뭔지 물어도 될까요?”

“지난번에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야근 일정이 비는 날 연락 주십시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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