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의 경고
시두스 엑시티움이 비밀 경매에 부쳐졌던 날에도, 감옥에 수감된 클리프의 면회를 갔던 날에도, 레이는 로레인 위트록의 기운을 감지했다.
사실 비밀 경매까지만 해도 그것을 특별히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큐레이터로서 귀한 전시품을 수집하는데 정상적인 루트만 고집하라는 법은 없었으니까.
그러나 일반인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외딴 교도소에서, 그것도 하필이면 클리프가 수감된 곳에 그녀가 다녀갔다는 것을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하기는 어려웠다.
이에 그는 오스틴을 통해 따로 알아보았고, 두 사람이 자신에 앞서 면담의 시간을 가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니 로레인이 만약 여기서 발뺌을 한다면, 레이는 그날의 일에 대해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모르쇠로 나오지 않았다. 그저 서늘할 정도로 담담한 얼굴로 되물을 뿐이었다.
“어떻게 아신 거죠?”
유물 연구가 기대된다며 눈을 반짝이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미건조한 태도.
“······.”
레이는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시선을 돌려 시두스 엑시티움을 다시 눈에 담았다.
그가 로스토크에서 로잘리테를 도와 이 보옥의 발굴한 이유에는, 알바트로스로 추정되는 도굴단이 이것을 손에 넣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도 있었다.
그리고 굳이 수고스럽게 경매라는 형태를 빌려 룩스 제국에서 공개되는 것에 일조했다.
제국의 귀족이 왕국의 유물을 빼돌렸다는 의혹을 피하는 한편, 알바트로스가 함부로 손댈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보옥의 존재를 널리 알리려는 목적으로.
‘이런 세세한 사정까지 전부 파악하고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로레인 역시 알바트로스 소속인 이상 클리프가 이 보옥을 찾고 있던 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현재 로잘리테의 조수라는 신분으로 보옥에 접근할 명분을 얻은 상황.
‘이게 우연 일리가.’
알바트로스가 시두스 엑시티움에 눈독을 들일 이유야 많았다. 일단 고대 유물이자 보옥으로서의 막대한 금전적인 가치와 역사적 가치를 지녔다는 것부터가 그랬다.
그러나 레이는 그들이 보다 위험한 용도로 그것을 사용하려 했으리라 짐작했다.
수많은 에너지석을 농축시키는 방식으로 수도를 날려버릴만한 대형 폭탄을 개발한 그들이니, 거대한 에너지를 품은 보옥은 훌륭한 연구 재료가 되어주리라.
아니면 보옥 자체를 폭탄처럼 쓰려고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알바트로스에 이만한 힘을 다룰 수 있는 전기 초능력자들이 있는지가 관건이지만···.’
그러나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사실 지금의 레이에게는 그런 것보다 더 궁금한 것이 있었으니까.
여전히 보옥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는 여상스레 물었다.
“클리프 씨의 자살은 알바트로스에서 사주한 겁니까?”
“······.”
지금껏 전혀 동요를 드러내지 않던 로레인이 처음으로 멈칫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찰나의 침묵 후 담담하고도 사무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아닙니다. 오히려 출소한 뒤 활동 국가를 옮겨보는 것이 어떤지 권유했지요. 급진적인 면이 없지 않기는 했지만, 그는 꽤 유능한 인재였으니까요.”
“그 말은, 지금까지 그의 행동이 모두 그의 독단에 의한 것이었다는 뜻입니까?”
“적어도 저희 전체의 뜻은 아니었습니다. 알바트로스는 그렇게 수직적인 조직이 아니거든요.”
“······.”
“물론 클리프가 그런 대담한 일들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사상에 동조하는 이들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겠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발언으로도 들립니다만. 애초에 반란군이라고 불리는 세력에서 그 정도의 자율성이 허락된다는 말입니까?”
“저희는 단순한 반란군이 아니니까요. 융통성을 아는 혁명군이죠.”
묘한 자부심마저 느껴지는 발언에, 레이는 더 설명해 보라는 듯 한쪽 눈썹을 까닥였다. 이에 로레인은 자신의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알바트로스라고 해서 모든 2세대들을 적대시하고, 무차별적인 테러를 일으키는 집단이라고 생각하시면 곤란하답니다. 만약 정말로 그랬다면 그 이름이 이렇게 오랫동안 유지될 수 없었겠죠.”
그녀는 조직 전체가 그렇게 급진적인 행보를 보였다간 그저 확실한 제거 대상이 될 뿐이지 않겠냐며 건조하게 웃었다.
“저희가 지금껏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그때그때 이해가 일치하는 권력자들과 적당히 타협해왔기 때문입니다.”
“···솔직하시군요.”
“이미 어느 정도 짐작하고 계신 것 같기에.”
사실이었다. 그러나 레이는 굳이 이를 시인하는 대신, 다른 말을 입에 담았다.
“그렇다면 클리프 씨 같은 과격파는 조직 내에서 견제를 받았을 것 같은데···.”
“말씀드렸다시피 그를 따르는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 반대로 그가 지나치게 공격적이라 여기는 이들도 많았죠.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면서 말입니다.”
“···그는 거기서도 외로운 존재였군요.”
“······.”
로레인은 조용히 레이의 표정을 살피다가, 이내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클리프 씨와 어떻게 인연을 맺으신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의 일이라면 저도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
“다만, 저는 이번 일에 있어서 그 누구도 탓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 말입니까?”
“그는 자신의 슬픔에 중독된 사람이었으니까요. 전생에 대한 그리움은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했습니다.”
한숨처럼 내뱉은 로레인의 얼굴에는 미약한 연민과 안타까움, 그리고 아쉬움이 묻어났다.
“아마도 그를 가장 괴롭게 했던 것은 자신의 죄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점이었을 겁니다. 끊임없이 죄의식에 시달렸던 것이겠죠.”
“······.”
레이는 조용히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본인의 입으로 환생 후 단 한순간도 행복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으니까. 그에게 삶은 아물지 않는 지독한 상처를 계속 달고 지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터.
“도망칠 수도 없는 자신만의 감옥에 갇힌 사람은, 누구도 구해줄 수 없어요. 저는 지나치게 괴로워하는 것은 결코 속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남겨둔 이들을 향한 사랑도 아니고요”
“······.”
“그 사람은 그저, 그 괴로운 삶에 중독되었던 거예요. 벗어날 수 없는 지옥에 스스로를 가둔 거죠. 지옥이 별거인가요?”
* * *
냉정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을 마친 후, 로레인은 자세를 바로 하며 루체스 남작의 반응을 살폈다.
처음 그에게 접근했을 때만 해도, 그저 유망해 보이는 신흥 귀족과 인맥을 쌓으려는 의도가 전부였다.
그러나 지금 눈 앞에 있는 이 젊은 귀족은 상상 외로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구태여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당당하고 여유로운 태도는 로레인이 경계심을 한껏 끌어올리게 만들었다.
‘좋지 않다.’
비록 혁명군이기는 하나, 알반트로스는 세계 각국의 주요 세력들과 암암리에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무차별적인 테러나 시위로 얻을 수 있는 것은 굉장히 한정적인 데다가, 결국 숙청을 재촉할 뿐이었으니까.
그러니 어느 나라든 대부호들, 특히나 정치적, 사회적 특권층을 함부로 건드리는 것은 위험했다.
‘알바트로스를 이용하려는 귀족들 중에 이렇게 일개 단원에 대해 궁금해하는 경우는 없어. 그런데 이렇게 추궁하듯이 물어본다는 것은···.’
어떻게 봐도 긍정적인 신호는 아니었다. 클리프의 죽음과 관련해 무언가 심기가 불편하다는 뜻일 테니.
‘루체스 남작과 척지는 일은 되도록 피해야 해.’
어느 날 혜성처럼 나타난 그는 현재 룩스 제국 내에서 빠르게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는 인물이었다. 심지어 곧 백작위를 받을 예정이라는 소문까지 돌고 있는 상황.
거기다 이것은 순전한 감이었지만, 로레인은 루체스 남작이 최근 알바트로스의 행보를 자꾸만 방해하는 신진 세력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래서 최대한 그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모든 질문에 순순히 답한 것이다.
다만 이처럼 위험을 느끼면서도, 로레인은 강한 궁금증에 휩싸였다.
알바트로스의 정보력은 결코 어설프지 않았다. 권력가들과의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서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정보였으니.
그런데도 비밀기지 두 곳이 날아가고, 총리 납치 사건을 비롯한 여러 임무가 실패하도록 새로 나타난 세력에 대해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했다.
‘그래서 비약일지 몰라도, 비슷한 시기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루체스 남작이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 한 건데···.’
그러나 클리프는 마지막까지도 그에 대한 말은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었다. 그건 그가 알바트로스에 위협이 될 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뜻.
‘···나름 친분이 있었던 것 같은데도 말이지.’
그 탓에 더욱 혼란스러웠다. 신진 세력에게 가장 많이 방해를 받은 것은 다름 아닌 클리프였으니까.
그녀는 아까부터 말없이 보옥을 쓰다듬고 있는 남작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깊게 가라앉은 그의 눈은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마침내 그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나온 얘기는, 로레인의 예상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이 보옥은 계속 이 박물관에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어떤 이유로 검은 별을 원했든, 건드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얘기였다. 그 뜻에 반할 경우 어떻게 하겠다는 구체적인 협박이 없었음에도, 로레인은 함부로 그를 거역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번 총리 납치 사건이 누구에게 사주 받고 움직인 것인지 말해준다면 고맙겠습니다.”
* * *
일렉티의 아지트로 쓰이고 있는 제이콥의 스튜디오.
굵은 눈발을 뚫고 나타난 헤이든은 연말연시 데커레이션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스튜디오 건물을 흥미로운 눈으로 살폈다.
“SNS 스타의 촬영 스튜디오라. 위장용으로 썩 나쁘지 않은 것 같군요.”
“실제로 촬영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무튼, 일단 들어가시죠.”
레이는 짧은 사이에 어깨에 소복이 쌓인 눈을 털어내며 헤이든을 안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레이에 이어 헤이든이 막 문턱을 넘는 순간.
“꺅!”
팡! 파팡!
누군가의 억눌린 탄성에 이어, 스튜디오 로비를 장식하고 있던 붉은 포인세티아가 폭죽처럼 터져나갔다.
헤이든의 머리 위로 팔랑이며 흩날리는 붉은 꽃잎들을 본 레이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감탄했다.
“진짜 꽃으로 만든 꽃가루 폭죽은 처음 보는군요. 누군가가 헤이든 씨의 방문을 진심으로 반기는 모양입니다.”
“······.”
얼굴에 붙은 꽃잎을 한 손으로 털어낸 헤이든은 웃음을 참느라 어깨를 들썩이는 레이를 못 본 척하며 걸음을 옮겼다.
“아이고, 오셨습니까!”
제이콥은 특유의 연극배우 같은 커다란 몸짓과 목소리로 두 사람을 반겼다.
간단한 근황을 주고받은 뒤, 그는 자신의 뒤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지금부터 스튜디오를 구석구석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예, 부탁드립니다.”
웃으며 대답한 헤이든은 제이콥을 따라 걸음을 옮기며 주변을 살폈다.
여기저기 설치되어 있는 각종 촬영 장비, 영상 편집에 열중하고 있는 직원들, 그리고 지금까지 제이콥이 이뤄낸 업적들을 전시해 놓은 공간까지.
이곳은 어디로 보나 의심할 것 하나 없는 훌륭한 촬영 스튜디오였다. 그렇게 결론 지은 헤이든은 옆에 있는 레이에게 자신의 감상을 속삭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