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자들의 세계 (252)화 (252/274)

파티 그 이후

음악이 끝나고, 마르셀라는 홀연히 파티장을 떠났다. 혼란스러워하는 제이슨을 홀로 내버려 두고.

애런은 홀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제이슨을 신속하고도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휴게실로 데려갔다.

뜻밖의 재회에 당황했을 그를 위한 배려인 동시에, 파티 중에 어색한 장면이 연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레이 또한 방금 전에 펼쳐진 막장 드라마를 빠르게 머릿속에서 지워내며 표정관리를 했다.

지금은 호스트로서 사교계 주요 인사들과 인맥을 다지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각고의 노력 끝에, 이날의 파티는 한동안 사교계에서 화제가 되기에 충분할 정도로 성공리에 마무리되었다.

“······.”

몇 시간 후, 레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떠난 파티장을 둘러보다가 두꺼운 커튼으로 가려진 발코니로 다가갔다. 밖에는 제이슨이 홀로 와인을 홀짝이고 있었다.

달칵.

문을 열고 나가자 겨울 밤의 차가운 공기가 피부에 와닿았다.

“추운데 여기서 뭐 하십니까?”

“음? 아, 남작님이었구먼. 그냥, 잠깐 바람 좀 쐬느라.”

“이미 다들 돌아갔습니다.”

“이런,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되었나?”

얼마나 발코니에 있었던 건지, 제이슨은 파티가 진작에 끝났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저희 일행만 남았으니, 안으로 들어오셔서 뒤풀이 겸 한 잔 더 하시죠.”

“···그럴까?”

제이슨은 못 이기는 척 몸을 일으켜 레이의 사무실로 따라갔다. 그러고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더니, 긴 한숨을 토해냈다.

“심란하구먼.”

그러나 마음이 복잡하다는 말과 달리, 그의 표정과 목소리는 제법 덤덤한 편이었다. 다만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었기에, 레이는 섣불리 말을 얹는 대신 조용히 건너편 소파에 앉았다.

제이슨은 살짝 피곤이 묻어나는, 하지만 여전히 덤덤하다 할 수 있는 목소리로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자네는 혹시 전생에 결혼을 했었나? 아니면 누구와 같이 살았다던가?”

“아니요, 그런 경험은 없습니다.”

“그래··· 그러면 잘 안 맞는 두 사람이 같이 살았을 때의 고충 같은 건 전혀 모르겠구먼.”

“···서로 잘 안 맞으셨나 봅니다.”

마르셀라의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 레이는 적당히 얼버무리며 물었다.

그러자 제이슨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타고난 성향이 달랐어. 예를 들어 똑같이 술을 좋아해도 나는 친구들과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마셨다면, 마르셀라는 반대로 조용히 즐기는 것을 선호했지.”

“그러셨군요.”

“그리고 나는 좀 대충 어질러 놓고 사는 타입인데, 마르셀라는 늘 깔끔했어.”

“아, 예.”

“···툭하면 집에서도 옷 좀 깔끔히 입고 다니라고 잔소리나 하고 말이야.”

“음.”

“돈 문제도 그랬어. 나는 좀 즉흥적으로 쓰는 편이거든? 그런데 마르셀라는 늘 꼼꼼하게 가계부를 다 썼다니까.”

제이슨이 끝없이 늘어놓는 차이점들을 묵묵히 들어주던 레이는 끝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의문을 드러냈다.

“···실례지만, 도대체 어떻게 사랑에 빠져서 결혼까지 하게 되신 겁니까? 지금 하시는 얘기만 들어서는 여러모로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하, 정말이지 사랑을 한 번도 안 해본 티가 팍팍 나는구먼.”

“예?”

“이봐, 남작님. 사랑은 말이야, 그냥 어느 순간 정신 차려 보면 이미 빠져 있는 거야. 불가항력이지. 방금까지 내가 주절거린 것들쯤이야 가볍게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아, 예···.”

레이는 다소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듣다 보니 뭔가 서혜리와 애런이 생각나서 물어본 것도 있었는데,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니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실례하겠습니다.”

때마침 애런이 술상을 들고 찾아왔다. 메뉴는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소주와 과메기.

그는 크리스털 잔에 소주를 우아하게 따라서 레이와 제이슨에게 한 잔씩 건넸다.

애주가인 제이슨은 곧바로 호기심을 드러내더니, 망설임 없이 소주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크으···! 뭐야, 이거 괜찮은데?”

“그렇지요? 저도 나름 꽤 많은 주종과 안주를 맛보았다고 자부합니다만, 이 둘은 썩 괜찮은 조합이라고 생각됩니다.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임에도 품위 있는 한 잔을 즐길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지요.”

레이는 휘황찬란한 크리스털 잔과 접시에 담으면 뭐든 품위 있어 보이는 거 아니냐고 반박하고 싶었으나, 모처럼 눈에 생기가 돌아온 제이슨을 보고 말을 삼켰다.

소주 맛에 제대로 심취한 이 외국인 아저씨는 어느새 각종 술과 어울리는 음식들에 대해 애런과 즐겁게 토론하고 있었다.

전처의 갑작스러운 등장과 일방적인 이별 통보에 대한 충격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모습에, 레이는 자기 몫의 소주를 홀짝이며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기로 했다.

“······.”

세이비어 재단이 주최하는 파티에 마르셀라가 등장했다. 무언가 냄새를 맡은 엘릭서가 분위기를 살피기 위해 움직인 것이라 의심해 볼 만한 상황.

하지만 그녀의 주장대로, 정말로 개인적인 용건 때문에 온 것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당장 뭔가 조치를 취할 것까지는 없으리라.

‘설마하니 제이슨이 이쪽을 배신하고 마르셀라에게 붙을 가능성도 없고.’

이러한 확신은 그간 제이슨이 보여준 신의 같은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진 뛰어난 판단력에 근거한 것이었다.

‘마르셀라의 등장이 의외이기는 했지만··· 결국 그다지 달라질 건 없겠어.’

레이는 이쯤에서 마르셀라에 대한 생각을 접기로 했다.

열심히 준비한 파티는 성황리에 끝났고, 오늘 해야 할 일은 전부 다 했다. 몇 시간 동안 접객을 하느라 심신이 지쳐 있던 그는 잠시 머리를 비우고 눈 앞에 애주가들의 대화나 구경하기로 했다.

마침 두 사람은 꽤나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고 있었다.

“술 안주를 박스 채로 선물해 줬다고? 그건 연인을 넘어서 거의 부부라고 봐야겠는데?”

“크흡! 쿨럭!”

확신에 가득 찬 제이슨의 발언에, 애런은 사레가 들려서 연신 기침을 해댔다.

급하게 냅킨으로 입가를 닦아낸 그는 뭔가 깨달음을 얻은 얼굴을 하고 있는 자신의 상사를 힐끔 보더니, 애써 태연한 척하며 말을 돌렸다.

“그, 큼! 순전히 제 감이긴 합니다만, 이 술은 제대로 된 마케팅만 뒷받침된다면 지금보다 훨씬 잘 팔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음? 이 소주가 말인가?”

“예. 물론 고급화하는 방법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제조단가가 비교적 낮다는 장점을 최대한 살리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가성비 술로 말이군.”

“그렇죠. 로머들이 자주 찾는 술집이나 음식점 위주로 납품해 보면 어떨까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뭐, 이론적으로는 말이 되지만··· 그게 그리 쉽겠나?”

제이슨은 주류 시장을 뚫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을 거라며 회의적인 의견을 보였다.

그러나 레이는 애런의 아이디어를 듣는 순간, 마치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 들었다.

“초기 유통망 구축에는 블루벨 상회의 협력을 얻는 방향으로···.”

애런은 이미 상당히 구체적인 부분까지 고려한 듯 계획을 막힘없이 설명했고, 레이는 그런 그를 어느 때보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전생에 소주의 세계화가 이루어졌던가? 분명 여기저기 수출은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어쨌든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소주가 현재 룩스 제국에서 대중적인 주종이 아니지만, 삶이 고단하고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로머들과 노동자들에게 딱이라는 사실이었다.

‘···통할 가능성은 충분해.’

아직 본격적으로 이 아이템에 뛰어든 거대 자본이 없다는 것이 천운이라 느껴질 정도였다.

‘역시 애런의 천부적인 재능은 돈 냄새를 맡는 것이었나.’

레이가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전율하며 바라보는데, 돌연 애런이 위험한 발언을 중얼거렸다.

“아, 물론 루체스가의 이미지와는 맞지 않는 아이템이지요. 그래서 저 혼자 따로 해볼 생각···.”

“애런.”

레이는 단호히 애런의 말을 끊으며 눈을 빛냈다.

“그거, 우리 영지 사업으로 발전시켜보자. 청정한 클라리 호수의 이미지를 따서, 깨끗한 이슬 같은 술이라고 하면 되잖아.”

* * *

얼떨결에 사업 이야기로 불타오른 세 사람은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술잔을 주고받았다.

문제는 아침 일찍 로잘리테에게서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시간이 되면 클레노디움 박물관에 있는 자신의 연구실로 방문해 달라고.

이에 레이는 씻고 옷만 갈아입은 채 곧바로 출발했다. 당연하게도 완전히 술에서 깰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세상에, 루체스 남작! 설마 지금 취한 상태로 온 거예요? 아니, 힘들면 그냥 다음에 온다고 하지···!”

로잘리테는 향수로 다 가리지 못한 술 냄새를 풍기며 나타난 레이를 보며 당황을 금치 못했다.

자신이 조금 급작스레 연락을 보내긴 했지만, 당연히 편한 시간에 와 달라는 거였다. 이렇게 열 일 제치고 달려올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

“이래 보여도 괜찮습니다.”

“···지금 평소보다 웃음이 헤픈 거는 알아요? 아주 기분 좋게 들이켰나 본데?”

“정신은 멀쩡합니다.”

또박또박 말하는 레이의 모습에, 로잘리테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약속한 대로 부르자마자 바로 달려와 준 것이 기특하고 고맙기도 했다. 그만큼 자신의 연구에 관심이 있다는 것이었으니까.

물론, 레이가 가장 관심이 있는 대상은 방 한가운데 자리한 시두스 엑시티움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아닌 척해도 그의 시선이 자꾸 그쪽으로 향하는 것을 느낀 로잘리테는 쿡쿡 웃으며 그를 그쪽으로 데려갔다.

“봐요. 여전히 아름답죠?”

“예. 검은 별이라는 이명이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레이의 은회색 눈동자가 고고한 검은빛을 뽐내는 커다란 보옥을 담아냈다. 그는 그날 동굴 속에서 보았던 환상적인 장면을 떠올리며 물었다.

“잠깐 만져봐도 될까요?”

“그럼요.”

허락을 구한 레이는 천천히 손을 뻗어 보옥 위에 살포시 얹었다.

여전히 깊은 바다처럼 강대한 에너지가 느껴졌지만, 전처럼 눈앞에 환상이 펼쳐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썩 기분 좋은 감각이 손끝을 타고 온몸을 휘감는 듯했다.

로잘리테는 레이가 잠시 보옥을 관찰하도록 내버려 두고 자신의 조수를 불렀다.

병가를 낸 한 큐레이터의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클레노디움 박물관에 오게 되었다던 로레인 위트록이었다.

“로레인, 아까 말한 거 알지?”

“네, 로잘리테 님.”

깍듯하게 대답한 로레인이 프로젝터를 조작하자, 곧 대형 스크린에 로잘리테가 예전에 찍었던 사진들이 띄워졌다.

고대 포르티스 제국의 유산인 거대한 동굴 속 신전. 특히 벽에 정교하게 음각된 문양과, 밤하늘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았던 높은 천정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고대 신전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레이는 자연스레 그날 시두스 엑시티움에서 뻗어 나가던 금색의 빛줄기가 떠올랐다.

레이가 보옥에서 시선을 뗀 것을 확인한 로잘리테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는 이번에 발견된 자료를 토대로, 에너지석과 환생의 비밀을 연결 지어서 연구해 보려고 해요.”

“환생의 비밀 말입니까?”

“네. 포르티스 제국 신전에서 발견된 상형문자는 아직 해석이 불가하지만, 다른 여러 신화들과 관련된 자료들과 비교해 보면···.”

넓은 테이블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자료들을 하나씩 끄집어낸 로잘리테는 열정적인 기세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지구에는 없고 가이아에만 있는 물질은 에너지석이 유일하잖아요? 그리고 여기 이 자료를 보면···.”

“박사님, 실례합니다.”

“무슨 일이지?”

로잘리테는 자신을 찾아온 직원과 귓속말을 나누더니, 이내 레이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떠났다.

열심히 떠들던 목소리가 사라지자, 넓은 연구실에는 돌연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밝았던 분위기마저 싸늘하게 식은 가운데, 얼굴에 맴돌던 웃음기를 모두 지워낸 레이가 로레인을 향해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알바트로스 쪽 사람이었습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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