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자들의 세계 (251)화 (251/274)

혼란스러운 밤

“남작님은 어쩜 뵐 때마다 더 수려해지시는 것 같네요.”

“과찬이십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에요. 요즘 남작님과 한 번 만나서 대화해 보고 싶어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물론, 외모 때문만은 아니죠. 남작님께선 앞으로 제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유망한 젊은 귀족이시니까요.”

레이는 열성적으로 아부를 늘어놓는 상대를 향해 조용히 웃어주었다.

요즘 파티에서 마주치는 사람마다 이처럼 예전보다 한층 더 가식을 떨며 다가왔다. 물론, 짐작 가는 부분은 있었다.

그가 백작으로 승격될 것이라는 소문이 이미 퍼진 것이든, 지난 황실 사냥 대회에서 황태자와 같이 있는 모습을 보인 결과이리라.

‘뭐, 무시 받는 것보다야 이쪽이 좋긴 한데···.’

사람들이 끝도 없이 다가와 얼굴 도장을 찍으려는 탓에 정신이 없었다.

그들을 하나하나 상대하다간 금방 목이 쉬어버릴지도 모를 일. 결국 레이는 웬만한 칭찬은 그저 눈웃음으로 넘기는 경지에 이르렀다.

또 한 명을 그런 식으로 적당히 상대한 레이는 잠시 샴페인 잔을 기울이며 파티장 안을 둘러보았다.

‘번쩍번쩍하게도 꾸며 놓았군.’

송년회 시즌이 되자, 제국의 상류층들은 마치 누가 더 화려하고 성대하게 파티를 여는지 경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굴었다. 여기에는 얼마나 이름있는 인물이 참석하는지도 당연히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살벌할 정도지.’

레이가 전생에서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연말 모임들도 따지고 보면 인맥관리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이곳의 파티는 그런 것을 넘어서,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파벌을 가르는 장이었다.

화려한 의복과 아름다운 음악, 고급스러운 음식과 술 뒤에 가려진 사교계의 실상은 그야말로 총성 없는 전쟁터였고, 본격적인 사교 시즌은 레이조차도 만만히 볼 수 없는 강행군이었다.

“루체스 남작, 내일 저녁 밀러스 후작의 파티에서도 볼 수 있겠죠?”

“예, 물론입니다.”

레이도 귀족이 된 이후로 이런 저런 사교모임에 종종 참석하고는 했다. 하지만 이렇게 밤낮으로 열리는 파티에 연달아 참석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거기다 초대장을 보낸 이들 중에는 고위 귀족들도 꽤 많았기에, 함부로 빠질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의 솔직한 심정은, 이미 질렸다는 것이다. 좋은 음식과 술도 세 번 먹으면 질리기 마련인데, 똑 같은 얼굴들을 매일같이 보려니 지겨웠던 것.

이런 면에서, 레이는 다른 귀족들과 상류층 인사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어떻게 매번 처음 보는 것처럼 호들갑스럽게 구는 건지···.’

심지어 몇 시간 만에 만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매일 머리부터 발끝까지 힘주어 꾸미고 밤늦게 귀가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아이고···.”

오늘도 길었던 하루를 마치고 들어온 레이는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며 푹신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초인으로서 체력이 좋은 것과는 무관하게, 정신적인 피로가 상당했던 것.

그렇게 그가 잠시 멍하니 앉아서 창밖으로 비치는 달을 보고 있는데, 애런이 작은 쟁반에 술을 받쳐 들고 찾아왔다.

“그렇게 마셔 놓고 또 술이야?”

레이는 힘들지도 않냐며 물었으나, 애런은 조금도 피곤이 엿보이지 않는 얼굴로 웃었다.

“브로커 시절 마시던 것이 있어서 그런지, 그냥 자기에는 허전해서 말입니다.”

애런은 요즘 루체스가에서 가장 바쁜 사람 중 하나였다. 레이가 파티에 참석할 때마다 온갖 물밑 작업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그였으니까.

당연한 얘기지만, 레이가 파티장에서 빛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들어갔다.

일단 각 파티의 드레스코드에 맞춰 매번 새로운 의상을 준비하는 것부터가 일이었다. 게다가 특정한 선물을 지참해야 하는 곳이라면, 재력과 센스를 동시에 드러낼 수 있는 물건을 빠르게 마련해야 했다.

그리고 반드시 환심을 사야 할 사람들이 있는 경우, 레이는 마치 비밀첩보 작전을 수행하는 것처럼 서혜리의 서포트를 받으며 파티장을 누벼야 할 때도 있었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레이를 수행하는 두 주축이 매우 유능하고 또 매우 의욕이 넘친다는 것이었다.

특히나 애런은 자신이 모시는 주인이 가까운 시일 내에 백작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그야말로 지치지 않는 에너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서 레이는 애런이 자신과는 다른 의미로 초인이 틀림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어, 그런데 그거···.”

테이블에 술상을 차리는 애런을 물끄러미 보던 레이가 무언가를 깨달으며 말을 꺼냈다. 당연히 와인일 것이라 짐작했던 술병이, 다시 보니 소주 병이었던 것.

쪼르륵.

“예, 소주입니다. 8도에서 10도 사이일 때 가장 맛이 좋다고 해서 그렇게 준비해 왔습니다.”

애런이 작은 크리스털 고블렛에 소주를 따르며 말했다. 그 행동을 살피던 레이는 이번엔 옆에 놓인 크리스털 접시를 바라보며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과메기?”

“오, 역시 남작님도 아시는 군요.”

“알기야 아는데··· 넌 그걸 어디서 난 거야?”

“이번에 서혜리 씨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한 박스 주셨습니다.”

“어···.”

레이는 잠시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지 망설여졌다.

관심 있는 상대에게 과메기 한 박스를 주다니. 서혜리가 애런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는 뜻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혜리 씨가 추천해 주신 대로 소주에 과메기를 곁들여 보았는데, 꽤나 훌륭한 조합이라서 놀랐습니다.”

미식가들에게 알려지면 꽤 호평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고 말하는 애런의 모습에, 레이는 그가 서혜리의 취향에 진심으로 감탄했음을 알 수 있었다.

‘혜리 씨가 의외로 취향을 저격했나 보네···.’

뭐가 되었든, 애런은 현재 굉장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남작님, 아니 미래의 백작님께서도 한 잔 정도만 하고 자리에 드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내일은 가장 중요한 파티가 있는 날이니까요.”

“···그래, 이만 자야지.”

레이는 애런이 건네 준 소주를 단번에 목구멍으로 넘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은 다름 아닌 세이비어 재단에서 파티를 개최하는 날. 최대한 좋은 컨디션으로 나타날 필요가 있었다.

* * *

세이비어 재단은 프로비던스라는 대기업의 자본력을 등에 업은 덕분에 도심 한복판임에도 불구하고 널찍한 부지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애런은 플루투스의 실버 등급 브로커로서, 그리고 레이의 보좌관으로서 경험한 상류층의 모든 것을 자신의 센스로 녹여냈다.

덕분에 세이비어 재단의 파티장은 단번의 눈길을 사로잡는 화려함과 우아한 기품, 그 어느 것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어디다 내놓아도 손색없을 모습을 하나하나 확인한 레이는 묘한 감상에 젖었다.

‘결국 다 돈이지.’

세이비어 재단을 설립하는데 필요한 길고 복잡한 승인 절차도 프로비던스의 돈으로 빠르게 해결했다.

레이는 그 재단의 공동대표이자 홍보대사로서 부유층을 만나고 다녔고, 기부라는 형태로 또 돈을 끌어 모았다.

‘곧 받게 될 백작위를 받게 된 이유도 결국 돈에 있고 말이지···.’

곱씹어 보면 입맛이 조금 씁쓸해졌지만, 그것이 현실이었다. 이곳은 원래 그런 사회였고.

무엇보다, 필요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이 주류사회에서 한 축을 담당하는 것은 필수였다.

레이는 빠르게 상념을 털어낸 뒤, 속속들이 도착하는 여러 귀족들과 자산가, 그리고 유명 인사들을 웃으며 맞이했다.

오늘은 손님이 아닌 파티의 주최자인 만큼, 그는 파티장을 돌아다니며 축하주를 나누었다.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세이비어 재단과 깊이 관련된 사람들이었다.

세이비어 초능력자 아카데미의 학생들, 아카데미에 양호 선생님으로 취직한 페니, 연구자 겸 명예 교수로 임명된 제이슨, 그리고 환생자 구원 프로젝트의 유하란과 세이비어 재단의 고문이 된 슐러 교수까지.

레이가 다음으로 찾은 것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이들이었다.

류양은 이런 자리가 어색할 법한데도 젊은 사업가로서 자연스럽게 파티에 녹아들고 있었다.

한편, 빈센트와 그의 일행은 언제나처럼 고위 귀족들 사이에 둘러싸여 쉽게 범접하기 힘든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장님, 오른쪽 사람들과 하고는 일단 눈인사만 하고 지나가시면 될 것 같아요.]

레이는 그 누구 하나 소홀히 대하지 않을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동선을 잡아주는 애런과 서혜리의 도움을 받으며 움직이다가, 한곳에 모여서 샴페인 잔을 부딪히고 있는 프레더릭 키치너 백작, 오스틴 콕스, 그리고 엘리엇 소르본을 발견했다.

“귀하신 분들이 여기 함께 계셨군요.”

레이는 잠시 숨도 돌릴 겸 그의 마음 속 호구 1, 2, 3번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그리고 특별히 좋은 술을 대접하겠다며 세 명을 조금 더 조용한 테이블로 이끌었다.

그렇게 레이가 잠시 세 명에게 집중하는 사이, 파티의 전체적인 흐름을 보며 이것저것 챙기던 애런은 당황스러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와 같은 것을 본 것인지, 서혜리 역시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저 사람이 여길 어떻게 온 거죠?]

두 사람의 눈에 띈 것은 제이슨의 전처이자 엘릭서의 연구원인 마르셀라 하퍼.

[애런 씨, 얼른 제이슨 씨한테 가서···.]

서혜리의 다급한 부탁에, 애런은 기민하게 움직여 제이슨의 곁을 스쳤다. 그리고 티 나지 않게 그의 주머니에 소형 마이크를 집어넣었다.

* * *

현재 제이슨은 매우 당황한 상태였다.

오케스트라가 새로운 곡을 연주하는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전처가 자신의 손을 잡고 댄스 플로어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

마르셀라의 근황이야 계속해서 파악하고 있었다. 단지, 그녀와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은 내년에 있을 신약 발표회쯤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을 뿐.

그래서 제이슨은 지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저 마르셀라가 이끄는 대로 음악에 맞춰 발을 움직이며, 혼란스러운 시선을 보낼 수밖에.

그때,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을 하고 있던 마르셀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살아 있을 줄 알았어.]

[···당신이었나?]

[응.]

[헐, 대박.]

한껏 낮춘 목소리로 이뤄지던 전부부의 대화에 서혜리의 흥미진진해하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 탓에 마침 엘리엇과 잔을 부딪치는 중이던 레이는 하마터면 잔을 놓칠 뻔했다. 하지만 그는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제이슨이 예전에 해준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아무래도 그가 갇혀 있던 연구소에 불을 낸 사람이 마르셀라인지에 대한 내용인 듯했다.

[그 방법 외에는 내가 거기서 당신을 꺼내 줄 방법이 없었어. 감시가 심했거든.]

[···혹시 지금도 감시당하고 있나?]

[언제나.]

[와, 미쳤다, 미쳤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레이는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막장 드라마를 보며 코멘터리를 하는 듯한 서혜리의 추임새 때문에 도무지 집중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파티장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조금 다급한 듯 절절한 제이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탓에 레이는 기분이 찝찝해졌다. 중요한 일이니 들어야 하는 것은 맞는데, 남의 가정사를 엿듣는 꼴이었기 때문.

[마르셀라, 그냥 내 쪽으로 와. 보면 알겠지만, 이 사람들은 당신도 충분히 지켜줄 수 있을 거야.]

[제이슨.]

그러나 대답하는 마르셀라의 목소리는 덤덤하면서도 건조했다.

[난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헙···!]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는 모든 이들이 숨죽이며 귀를 기울였다.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글쎄, 나한테는 중요한 문제인 것 같아.]

[그러면 오늘 왜 나온 거야?]

[당신이 궁금해하고 있을 것 같아서. 그리고, 한 번은 제대로 인사를 해야 하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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