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자들의 세계 (250)화 (250/274)

파티 시즌의 시작

레이가 보석이 박힌 휘황찬란한 딸랑이를 선물로 들고 찾아간 곳은 다름 아닌 발렌시아 공작저였다.

화려하게 꾸며진 아기방으로 안내받은 그는 캐노피가 드리워진 아기 침대로 조심히 다가가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최고급 속싸개에 싸여 곤히 잠들어 있는 예쁜 아기의 모습이 보였다. 니콜라이와 로잘리테가 얼마 전에 얻은 딸이었다.

‘그런데···.’

작고 사랑스러운 아기의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가만히 살피던 레이는 문득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 쪽 유전자는 어디로 사라진 거지?’

조금 당황한 그가 두 눈을 깜빡이고 있는데, 이제는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 니콜라이가 자랑스레 말했다.

“로잘리테를 닮아 예쁘지?”

“···예. 이목구비가 참, 뚜렷하군요.”

아기가 예쁜 것은 사실이었다. 다만, 아무리 보아도 니콜라이와 붕어빵이었다.

설사 가이아 반대편에 떨어뜨려 놓는다고 해도, 이 얼굴 하나만으로 단번에 발렌시아 공작저로 무사히 돌아 올 수 있을 것 같을 만큼.

아니, 솔직히 말해서 빈센트의 딸이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레이가 속으로 이 집안의 유전자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놀라워하는 사이, 니콜라이는 잠든 아기의 부드러운 뺨을 손가락으로 살며시 쓸며 말을 이었다.

“얼마 전만 해도 조금 쭈글쭈글 했는데, 어느샌가 이렇게 보송보송 해졌더라고.”

“아, 예.”

“참 신기하단 말이야.”

무엇이든지 뚝딱 만들어내는 천재 기계공학자이면서도, 니콜라이는 눈앞에 있는 딸아이의 존재를 무엇보다도 놀라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안 그렇게 생겨서는, 완전히 딸바보가 되었네.’

레이는 그렇게 생각하며 점점 가까워지는 기운들을 감지했다. 그 중에는 낯선 기운도 섞여 있었으나, 지금 이곳으로 찾아올 인물은 사실 뻔했다.

“레이 루체스 남작이 발렌시아 공작님을 뵙습니다.”

빈센트와 함께 등장한 것은 그의 형, 하인리히 지그문드 발렌시아 공작이었다.

레이가 처음 보는 그를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으나, 그는 레이한테 일말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레이는 개의치 않을 수 있었다. 하인리히가 자신은 물론이고 그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다는 것이 뻔히 보였기 때문.

다만 단 한 사람의 예외가 있었는데, 당연하게도 그의 손녀딸이었다. 아기를 향한 그의 눈빛이 꽤나 부드러워서, 역시 할아버지는 어쩔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

조용히 한 발짝 뒤로 물러난 레이는 같은 얼굴을 한 장정 셋이 조그만 아기 하나를 둘러싼 채로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저 아기가 앞으로 어떠한 보호 속에서 인생을 살아가게 될지, 그 미래가 훤히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때, 그와 마찬가지로 뒤로 물러나 있던 헤이든이 조용히 귀엣말을 해왔다.

“이 가문에 소속된 모든 보좌관들의 목표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바로 저 아기가 성년이 되기 전에 무사히 은퇴하는 거라고 합니다.”

레이는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단박에 알아들었다.

“···자기 아버지와 삼촌, 할아버지보다 더한 존재가 될까 봐요?”

“일단 외모에서부터 조짐이 보이지 않나요?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아기인데, 벌써 기세가 범상치 않은 것 좀 보세요.”

“그렇습니까?”

“가장 문제는 저 세 분이 아기와 관련된 일에 한해서 팔불출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겁니다.”

“음···.”

“적절히 브레이크를 걸어줘야 할 분들이, 오히려 이것저것 얹어주며 부추길 것 같···.”

“둘이서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해?”

뒤에서 불쑥 나타난 것은 로잘리테였다. 그녀의 접근을 이미 알고 있었던 레이는 놀라는 대신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늦었지만 어여쁜 따님을 보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무엇보다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고마워요.”

로잘리테는 부드럽게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손님은 뒷전인 채 자기들끼리만 아기를 구경하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이 익숙한지, 그들을 대신해 레이와 헤이든을 방 한쪽에 마련된 티 테이블로 안내하며 차를 대접했다.

“남작의 말대로 이제 거동에 별다른 불편함은 없어요. 그러니 조금만 더 쉬었다가 빠른 시일 내로 박물관에서 연구를 시작할 예정이에요.”

“박물관이라면, 클로노디움 박물관 말씀이십니까?”

“그럼요. 계획대로 클로노디움 백작이 시두스 엑시티움을 낙찰 받았다고 연락해 왔으니까요.”

“그랬군요.”

“몰랐나요? 남작도 보옥에 관심이 많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요?”

“최근 여러모로 바빴던 탓에 소식이 늦었습니다. 하지만 관심이 많은 것은 여전한 사실이니, 언제 한 번 연구실로 불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레이는 보옥도 보옥이지만, 클로노디움 박물관의 임시 관장을 맡고 있는 로레인에게 볼일이 있었다.

다만 요즘 계속 마음 한편으로 미뤄두고 있었는데, 로잘리테가 초대해 준다면 적당한 명분이 생길 터.

“빈말 아니죠? 저는 정말로 연락할 거니까 꼭 와야 돼요?”

“물론입니다.”

레이가 로잘리테와 약속을 마치고 이제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망설이던 찰나, 빈센트가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자리를 옮기지.”

* * *

빈센트가 예고도 없이 레이를 데려간 곳은 놀랍게도 황궁이었다.

발렌시아 공작저를 방문하느라 평소보다 갖춰 입었기에 다행히 복장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레이는 빈센트가 이 갑작스러운 방문을 해명해 주기를 바랐다.

내내 침묵하던 빈센트가 마침내 입을 연 것은 황태자의 응접실에 둘만 남았을 때였다. 그런데 그가 꺼낸 이야기는 레이가 원하던 설명은 아니었다.

“이번 연말에는 너도 이런저런 파티를 좀 열 생각이겠지?”

다소 뜬금없는 주제였으나, 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루체스 갤러리, 루체스 에너지, 세이비어 재단의 이름으로 파티를 개최할 예정이었기 때문.

“예, 아무래도 비즈니스적으로 필요할 테니까요. 혹시 어딘가에 참석하실 의향이 있으신 겁니까?”

잠시 말없이 찻잔 속에 담긴 차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빈센트는 이내 생각을 정리한 듯, 긍정의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래, 세이비어 재단에서 열리는 파티에 참석하지. 그러니 되도록이면 화려하게 열도록 해. 너와 연결된 여러 사람과의 친분을 충분히 과시할 수 있도록.”

빈센트의 흔치 않은 지시에, 레이는 자신의 뒤에 시립해 있는 애런의 기세가 남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루체스의 이름으로 개최되는 모든 파티는 원래 그의 담당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언제나 화려함을 놓치지 않는 그였는데, 빈센트가 특별 지시까지 내렸으니 뭘 얼마나 더 하려는 것인지 레이로서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다만 지금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기에, 레이는 빈센트를 향해 차분하게 물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준비하도록 하죠. 다만,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하는 김에 자신이 지금 왜 황태자의 응접실에 앉아 있는지도 말해주면 좋을 것 같았다.

“슐러 교수님이 어떻게 백작위를 하사 받으셨는지에 대해서는 들었다고 했지?”

“예. 다만 자세히는 모르고, 그저 의학 발전에 기여할 만한 연구성과를 내셨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

“맞아. 물론 가장 큰 공로는 그 연구성과가 거대한 돈벌이로 연결되었다는 것이지만.”

“음.”

“어쨌든, 너의 공로는 세이비어 재단이 될 거다.”

“예···?”

“곧 황실에서 개최하는 신년음악회의 초대장이 갈 거다. 그리고 그 다음 주에 있을 신년 축제 때, 루체스 남작이 루체스 백작이 되었다는 공식적인 발표가 있을 거고.”

“······.”

레이는 이 느닷없는 통보를 잠시 곱씹어 보다가, 그냥 솔직하게 질문했다.

“그래도 되는 겁니까?”

돌아온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그래도 돼. 이미 그러기로 결정 났고.”

빈센트는 여전히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레이의 얼굴을 보더니 피식 웃으며 부연했다.

“앞으로 가장 돈이 될 만한 산업의 첫 시작을 네가 공개적으로 끊어버렸거든. 물론 너는 그런 식으로 의도한 것이 아니었겠지만.”

그동안 물밑에서 몰래 간만 보고 있던 사람들이, 먼저 행동한 레이에 이끌려 슬슬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거물들의 움직임을 이제야 알아차린 사람들은 뒤늦게라도 이 산업에 숟가락을 얹고 싶어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이들이 발 빠르게 재단을 설립하고 든든한 후원자까지 갖춘 것으로 보이는 레이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그런데 그들이 보기에 한낱 남작은 손을 잡기에 지위가 좀 부족한 거지. 그래서 많은 이들이 네 공로를 인정하고, 작위를 백작위로 올리는 것에 찬성했어.”

빈센트는 역시 누가 뭐래도 선점이 중요한 거라고 덧붙였다.

“잠시만요. 공로를 인정한다기에는 아직 재단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내놓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널 백작으로 올리려는 사람들에게는 지금까지 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거다. 그리고 대중에게는 희망적인 전망을 담은 기사 몇 줄이면 루체스 백작은 더없이 인류애 넘치는 프로젝트를 시작한 사람이 될 거고.”

시간이 지나면서 세이비어 재단을 통해 혜택을 받은 이들이 늘어나면, 이러한 이미지는 더욱 공고해질 것이라고 빈센트는 설명했다.

“······.”

레이가 백작위가 가지는 무게 때문에 머뭇거리는 듯이 보이자, 빈센트는 그럴 필요 없다며 그를 설득했다.

“뭘 그리 어렵게 생각해? 형편없는 귀족 중에도 그저 운 좋게 태어나서 그 자리를 얻은 작자들도 많은데.”

제국이 입헌군주제를 택하고 민주주의를 표방한지 벌써 두 세기가 다 되어갔다.

이제 제국의 작위는 핏줄의 고귀함이 아닌, 제국에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지를 증명하는 훈장이자 포상에 가까웠다.

물론 유서 깊은 몇몇 대귀족 가문들을 제외하고서.

“그것도 그렇습니다만.”

“그리고 너는 이미 백작에 버금가는 화려한 인맥을 가지고 있지 않나.”

고위 귀족만 해도 발렌시아 공작, 이나투스 후작, 키치너 백작, 슐러 백작이 있다. 여기에 페이 자작 같은 하급 귀족들, 그리고 군부에 적을 두고 있는 오스틴 콕스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이제는 황태자 전하까지 추가되었고 말이야.”

“···황태자 전하와는 아직 제대로 된 친분도 없습니다만.”

심지어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제정신도 아니었다.

“오늘부터 만들어. 마침 저기 오시는 군.”

* * *

“자자 미리 크리스마스입니다! 각자 와서 선물 받아 가세요!”

집사 알베르트의 도움을 받아 한 무더기의 택배 박스를 집 안으로 들여온 서혜리는 루체스가의 모든 사람들을 불러냈다. 그리고 아예 택배 박스 째로 선물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최소한의 포장도 없는 겁니까?”

애런이 떨떠름한 얼굴로 자기 몫의 택배 박스를 받아 들며 물었다.

그러면서 한쪽에 자리한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를 눈짓했다. 그 아래에는 다른 사람들이 하나 둘씩 가져다 놓은 선물들이 이미 산더미만큼 쌓여 있는 상태.

애런은 서혜리도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게 포장해서 저기에 두면 되는 것 아니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혜리는 단호하게 고개를 붕붕 저으며 대답했다.

“이 많은 걸 언제 다 포장하고 있어요? 그건 시간 낭비, 포장지 낭비라고요! 그리고 저는 진짜 실용적인 선물들만 골랐어요!”

“혜리 씨, 이건 제 것이 맞습니까?”

레이가 꽤나 전문적인 천체 망원경을 꺼내 보며 물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다소 뜬금없게 느껴지는 선물이었다.

“네, 사장님! 새로운 취미를 개척해 보시라고 드리는 거예요!”

“아, 예··· 고맙습니다.”

딱히 별 구경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레이는 서혜리의 성의를 생각해서 감사를 표했다.

어쨌든, 그녀 덕분에 본격적으로 연말연시 시즌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확연하게 다가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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