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이기심
엘리엇은 조부에게 묻고 싶은 것이 너무도 많았으나, 섣불리 입을 열지 않고 일단 묵묵히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동요를 억누르고 최대한 객관적인 시선으로 상황을 직시하려 노력하던 그는, 머지않아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일반적으로 인체실험이라고 하면 흔히 떠오르는 풍경, 예를 들어 실험체들이 고통에 허덕이며 울부짖는 모습 같은 것이 보이지 않았던 것.
그가 내심 의아해하고 있을 때, 이곳의 책임자로 보이는 한 여성이 급하게 다가와 데미안을 맞이했다.
“회장님, 오셨습니까.”
“하퍼 박사.”
데미안은 마침 잘 왔다며 엘리엇을 그녀에게 떠넘겼다.
“자네가 이 녀석을 데리고 한 바퀴 돌면서 안내 좀 해주게. 명색이 차기 회장인데, 이 녀석도 이제 알 건 알아야지.”
“예, 회장님.”
“너는 충분히 돌아보고 난 뒤에 올라오거라. 이야기는 그때 다시 이어서 하도록 하지.”
“···네, 알겠습니다.”
엘리엇의 대답을 들은 데미안은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자리를 피해줄 테니 이곳을 직접 둘러보고 받아들이라는 것처럼.
데미안이 떠나고, 두 사람은 다소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사무적인 인사를 나누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 연구소를 책임지고 있는 마르셀라 하퍼라고 합니다.”
“···엘리엇 소르본입니다.”
“그러면 바로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부탁드립니다.”
하퍼 박사는 지체 없이 엘리엇을 이끌고 연구소 투어를 시작했다.
각 실험체마다 어떤 계열의 초능력을 가졌는지, 이들을 상대로 어떤 실험이 진행되고 있는지 등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갇혀 있는 이들의 상태를 유심히 살피던 엘리엇은 결국 의아함을 숨기지 못하고 질문했다.
“크게 괴로워 보이지는 않는군요. 유리벽 너머의 사람들 말입니다.”
“아, 물론입니다. 최대한 통증이 없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신체적인 고통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표정에서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묘해서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저들이 처한 상황이 일반적이지는 아니지 않습니까?”
“아··· 어떤 의미로 하신 말씀인지 알 것 같습니다만, 저들은 모두 지원자입니다. 자신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고, 계약서도 작성했죠.”
“스스로 이곳에 왔다는 말입니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소리를 들었다는 엘리엇의 반응에, 하퍼 박사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원활한 연구를 위해서는 실험체의 협조가 중요하니까요. 믿기 어려우시다면 한번 직접 대화를 나누어 보시겠습니까?”
“그래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하퍼 박사는 가장 가까운 유리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에는 한 남성이 환자복 차림으로 침대에 걸터앉아 책을 읽고 있었는데, 그는 심드렁한 얼굴로 방문객들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직 쉬는 시간인데요.”
경계심이나 두려움을 찾아 볼 수 없는, 오히려 귀찮음이 역력한 표정.
예상과 많이 다른 반응에 엘리엇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으나, 이내 지금 상황에 가장 적합해 보이는 말을 골랐다.
“수고하십니다. 잠시 몇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 * *
지하 연구소를 벗어나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가면서, 엘리엇은 실험체와의 대화를 가만히 되새겼다.
‘환생하고 무일푼으로 시작하려니 막막하기만 했는데, 이런 별 것 아닌 능력이 쓸모가 있어서 다행이죠. 물론 가끔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을 때도 있고, 좀 많이 무료하긴 한데··· 그래도 어차피 남아도는 시간을 팔아서 돈을 번다 생각하면 그리 나쁘지 않아요. 미래를 생각해야죠.’
그렇게 말하는 남자는 굉장히 평범해 보였다. 일반 병원에서 진행하는 임상시험에 지원한 사람과 별 다를 바 없는 모습.
‘적어도 본인은 그렇게 믿는 듯했지.’
그러나 그의 연구 가치가 떨어진다면, 그리고 그때까지도 이 연구소가 여전히 비밀스러운 존재라면, 그가 작성한 계약서 따위는 한낱 휴지조각에 불과할 터.
‘그리고 저런 ‘협조적’인 사람들이 있기 전에는 분명···.’
머릿속에 떠오르는 암담한 추측에, 엘리엇은 마른 세수를 했다. 그리고 빠르게 표정을 수습했다.
아니나 다를까,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데미안의 수행원 하나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의 안내를 받아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막 전채요리를 끝내고 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한 데미안이 엘리엇을 반겼다.
“때맞춰 왔구나. 식사는 하고 갈 수 있겠어.”
“······.”
자리에 앉은 엘리엇은 제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 조각 썰어서 입에 넣었다. 그리고 그것을 천천히 씹어 삼켰다.
꿀꺽.
“······.”
다행히 아무렇지 않았다. 이를 확인한 엘리엇은 자신이 듣기에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로 조부에게 물었다.
“제가 이런 쪽으로 잘 아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렇게 철저히 숨겨놓으신 것을 보니 합법은 아닌 모양이군요.”
“그것도 시간 문제다. 여러 인물들과 막대한 돈이 얽혀 있는 일이니, 이건 불법으로 남아 있을 수가 없지.”
데미안은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듯, 막힘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담담한 목소리로 앞으로의 계획을 손주에게 들려주었다.
“법은 의회에서 상원 의원 자리를 꽤 차고 있는 귀족들이 움직여줄 거다. 최고의 연구원들을 모아 놓았으니 쓸 만한 연구 성과도 금방 나올 테지. 그렇게 우리는 마르지 않는 자금과 인력을 대면서, 시장의 선두주자로서 이 산업을 이끌어가게 될 거다.”
“그렇습니까.”
불법을 합법으로 만들어야 할 정도면 여러모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막대한 부를 쌓기 위한 일이란 원래 다 그런 것이었으니.
그러나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마음 속으로 납득하는 것은 달랐다. 그런 손주의 분위기를 눈치챈 것인지, 데미안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은 언제나 있어왔던 일이다.”
“······.”
“우리 프로비던스가 에너지 산업의 선두주자로 급부상할 때, 광산에서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갈려 나갔는 줄 아느냐? 그 산소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흙더미에 깔려 죽고, 질식해 죽고, 과로로 죽고.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그래도 광부들에게는 노동의 대가로 꾸려가는 삶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믿었을 뿐이지. 그들이 그렇게 10년, 20년, 아니 평생을 일한들 그들의 삶이 그리 달라졌을 거라 생각하나? 아니지. 그저 고통의 연속일 뿐이야.”
평균적으로 보았을 때, 그리 틀리지 않은 말일지도 몰랐다. 엘리엇이 대꾸하지 않자, 데미안은 계속해서 주장을 펼쳤다.
“엘리엇, 우리는 연구를 통해 인류의 발전에 기여할 거다. 예전에 사람들이 얼마나 허무하게 죽었는지 아느냐? 감기에 잘못 걸려도, 음식 하나를 잘못 먹어도 죽어 나갔어. 이제는 죽음을 극복할 때가 온 거야.”
가만히 얘기를 듣던 엘리엇은 자기도 모르게 불쑥 내뱉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살아야 합니까?”
“네 아비처럼 나약한 소리 마라!”
데미안은 벌컥 역정을 내며 식탁을 내리쳤다. 그리고 엘리엇을 매섭게 쏘아보며 열변을 토했다.
“전생의 나는 찢어지는 가난 때문에 다섯 형제 중 셋을 잃었다! 그리고 장남으로서 나머지 가족을 부양하다가 사고로 죽었지. 너와 네 아비는 가난의 무서움을 몰라. 그 무력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지금 네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누구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당장 동전 한 닢 없이 맨몸으로 내쳐지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냐?”
“······.”
옛 울분을 떠올린 노인은 숨을 고르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자신의 젊은 날과 똑 닮은 손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가이아에서는 발에 채이는게 1.5세대들이지만, 내가 살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죽음에서 다시 일어난다는 것은··· 그야말로 신의 영역이었지.”
잠시 와인잔에 담긴 붉은 와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이내 그것으로 목을 축이고 재차 입을 열었다.
“나는 내가 이 저주스러운 전생의 기억을 안고 환생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죽음 너머에 대한 환상 따윈 진작에 사라졌지. 어차피 삶 너머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또 다른 삶이라면, 나는 지금의 이 삶을 놓지 않을 거다.”
노인은 팔을 뻗어 테이블 위에 있는 손주의 손을 강하게 붙잡았다.
“엘리엇. 너는 소르본 가의 그 누구보다 나를 가장 닮았다. 네 아비보다도 더.”
“······.”
“그리고 내 원죄는 너의 원죄이기도 해. 내가 희생시킨 이들의 피와 살로 너와 네 아비가 자랐지.”
데미안의 시선이 잠시 아래로 향했다가 돌아왔다.
“저 밑의 실험체들에게 죄책감이 든다면, 나중에 사회에 기부라도 해서 돌려주면 그만이다. 이 실험은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고, 우리가 하지 않는다면 다른 이가 가로챌 공덕과 돈이다.”
흔들리는 엘리엇의 눈빛을 보며, 데미안은 붙잡은 손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그리고 인간을 타락시키는 악마처럼, 잔뜩 낮춘 목소리로 은근하게 속삭였다.
“정 힘들다면 이렇게 생각하거라. 우리는 영웅이다. 이 시대의 가장 명석하고 힘 있는 이들이, 인류의 발전을 위해 짐을 짊어지고 나선 것이야.”
* * *
루체스 남작저의 서재 안.
레이는 며칠 새 겨울빛이 완연해진 창밖 풍경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 저택에서 맞는 첫 번째 겨울이었다.
쪼르륵.
엄선한 원두를 갈아 정성껏 내린 커피의 깊은 향이 퍼져 나갔다.
달칵.
애런이 커피잔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으나, 레이는 뒤돌아보지 않고 고맙다는 인사만 건넸다.
“······.”
애런은 커피를 마실 생각이 없어 보이는 자신의 상사를 위해 커피잔을 한쪽으로 밀어 놓은 뒤, 집사가 가져온 장신구들을 살피며 지나가듯이 물었다.
“여전히 마음이 좋지 않으십니까?”
“···아무래도, 생명의 은인이었으니까.”
레이는 ‘그렇게 나쁜 사람도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클리프로 인해 망가진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생각하면 그럴 수 없었다.
한편, 애런은 붉은 루비가 박힌 넥타이 브로치를 레이에게 대보더니,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도로 내려놓았다.
“저는 그를 잘 알지 못하지만, 자기 자신을 위해 살다가 결국엔 자기 자신을 위해 간 사람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기적인 인물 같다는 말이야?”
“예. 진정한 혁명군이었다면 그렇게 편하게 죽으려 했을까요? 악착같이 살아남아서 차후 일을 도모하는 것이 일반적이겠죠. 그러니 사명감보다는 그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았다고 봐야지요.”
“설사 그렇다고 해도··· 어째서 스스로 삶을 포기했을까?”
이번에는 짙은 푸른색의 브로치를 레이에게 대어본 애런은 마음에 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저는, 언제라도 죽을 준비를 하고 사는 이들이 있다고 봅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등대, 그러니까 멜리사의 오빠가 그랬거든요.”
“···도망 갔다고 하지 않았어?”
“그것 또한 도망이지요.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도망가 버렸습니다.”
애런의 목소리에는 아직 다 털어버리지 못한 배신감이 묻어 있었다.
그는 처음에 자신의 탓이라 여겼다고 설명했다. 자신이 그의 고통을 알아차려주지 못한 것인가 해서.
“하지만 그 녀석은 한 번도 그런 얘기를 꺼낸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녀석이 왜 그랬는지 알 수가 없어요.”
오랫동안 고민했고, 죄책감에 시달리며 괴로워했다.
“그런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야 깨달았죠. 그 자식은 남겨진 이들의 사정 따위는 전혀 상관하지 않고 멋대로 가버린 놈이라는 것을.”
“멜리사와 나머지 일행들은 여전히 모르는 거야?”
“예.”
애런은 레이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며 담담히 대답했다.
“아무튼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그의 죽음에 남작님이 그렇게 마음 쓰실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
“자, 다 되었습니다. 바로 출발하시겠습니까?”
“그래야지. 아, 그러고 보니 선물은 뭘 준비했어? 내가 그쪽으로는 아는 게 전혀 없어서 신경을 못썼는데.”
“후후, 걱정 마십시오. 완벽한 것으로 준비했으니 말입니다.”
애런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벨벳 상자 안에 담긴 것을 보여주었다.
“클라리스 영지의 푸른 에너지석과 다이아몬드를 세팅한 최고급 딸랑이입니다.”
“음, 그래. 굉장히··· 영롱하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