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자들의 세계 (247)화 (247/274)

씁쓸한 재회

레이도 처음부터 이럴 계획은 아니었다.

그도 오스틴이 말한 것처럼 앞선 선박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뒤따르다가, 총리를 납치한 괴한들이 차에서 배로 갈아타는 순간을 노리려 했으니까.

그런데 돌연 납치범들이 탄 차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여차하면 이대로 도주해버릴 가능성도 있었기에, 레이는 빨리 무언가 수를 내야 했다.

달리는 차의 시동을 꺼트려봤자 별 소용은 없을 것이다. 저쪽에도 전기 초능력자들이 있었으니까.

그러니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지금은 거리가 너무 멀었다. 무언가를 시도해 보려면 일단 더 가까워져야 했다.

레이는 어느 순간부터 말이 없어진 오스틴을 향해 소리쳤다.

“계속 밟으세요, 오스틴 씨!”

부우우웅!

두 사람이 탄 보트는 어느새 다른 선박들 사이까지 도달했다. 이제 양쪽에서 언제 이쪽을 겨냥한 총구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이에 레이는 그들이 이쪽에 아예 신경 쓸 겨를을 주지 않기 위해 주변으로 끊임없이 번개를 뿌려 댔다.

번쩍!

콰르르릉!

쾅! 콰콰쾅!

그 난리 속에서, 오스틴이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소리쳤다.

어떠한 결의 마저 느껴지는 그의 목소리가 거센 비바람을 뚫고 레이에게 전해졌다.

“남작님! 설마설마 했습니다만···!”

“······.”

레이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결국엔 이 순간이 오고 말았다. 긴급 상황이니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해도, 역시나 막상 밝히려고 하니 민망했다.

그가 어떻게 말을 꺼내야 그나마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을지 고민하는 찰나, 오스틴이 자신의 질문을 완성했다.

“그때 필드에 나타났던 전기 초능력자가 사실은 남작님의 사람이었던 겁니까? 그래서 지금도 저희를 도와주고 있는 것이 맞습니까?”

“···예! 지금 이쪽 상황을 주시하면서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그리고, 다행입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오스틴은 안도하는 것을 넘어 무언가 감격에 젖은 듯한 얼굴이었다.

‘뭐가 다행이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당장은 복잡한 일을 넘겼다는 생각에 레이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앞을 바라보며 달아나는 초능력자들을 추적하는 것에 집중했다.

* * *

납치된 총리가 타고 있는 자동차 안. 4명의 알바트로스 조직원 중 운전수를 제외한 3명은 모두 전기 초능력자였다.

후우웅.

그리고 그들은 현재, 자꾸만 썰물 빠지듯 나가버리는 일대의 전류를 안정화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다.

“···미치겠네!”

팟!

“됐다! 자, 이제 제발 좀 이대로 가자!”

그러나 그들의 간절한 외침과는 달리, 전기는 또 훅 나가버렸다.

“···돌아버리겠네 진짜!”

벌써 몇 번째인지 몰랐다. 마음 같아서는 전기가 꺼지든 말든 그냥 내버려 두고 싶었으나, 그럴 수도 없었다.

그들이 타고 있는 차 역시 시동이 계속 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고, 양쪽 헤드라이트는 이미 터져버린 지 오래였다.

이런 상황에서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내달리는 것은 너무 위험했기에 어쩔 수 없이 계속 구슬땀을 흘려야 했던 것.

그때, 초능력자 중 한 명이 지금껏 애써 외면하고 있던 가능성 하나를 입에 담았다.

“젠장, 이거 정말로 우리가 뭘 잘못 건드려서가 아니라···.”

어떤 미지의 강력한 초능력자가 개입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 이들이 이 타당한 추측을 계속 모른 척해 온 이유는 하나였다.

만약 이 불안정한 전류의 흐름이 단순 기기 고장이나 오류가 아니라면, 그들에게는 눈곱만큼의 승산도 없다는 뜻이기 때문.

줄다리기도 어느 정도 체급이 맞아야 가능한 것이다. 지금 이 3명이 열심히 삽질을 해서 간신히 물길을 하나 트는 수준이라면, 상대편은 거의 강을 통째로 기울여 원하는 곳으로 물을 들이붓는 수준이었던 것.

“지금이라도 배로 갈아타서 강으로 도망치는 것이 어떻습니까?”

초능력자 중 한 명이 운전수에게 물었으나, 그는 번개가 미친 듯이 내리치고 있는 강 위를 가리키며 외쳤다.

“배들이 뭍으로 전혀 다가오지 못하고 있네! 아예 반대편 선착장 쪽으로 뱃머리를 돌리고 있어!”

그런데 그때, 갑자기 주변이 대낮처럼 환히 밝아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꽈광쾅쾅!

콰장창!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일대의 가로등이 모조리 터져 나가며 불꽃에 휩싸였다.

“으억!”

그와 동시에 차체가 엄청난 충격을 받으며 덜컥 멈춰 섰다. 달리던 자동차에 정확하게 벼락이 내리 꽂힌 것이다.

“···우, 우리, 살았어?”

비록 벼락을 직격으로 맞은 차는 완전히 고장 나 버렸으나,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무사했다.

그러나 불시에 찾아온 충격이 너무도 강렬했기에, 다들 얼어붙은 채로 꼼짝도 하지 못했다.

방금 전의 벼락이 자연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확신에 가까운 의심이 들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렇게 얼마나 멍하니 있었을까. 이윽고 하늘과 땅, 그리고 물 위에서 번쩍이는 불빛과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 * *

며칠 후, 세레누스 외곽에 위치한 푸르가티오 교도소.

뚜벅뚜벅.

교도관을 따라 차갑고 어두운 복도를 걸어가던 레이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아는 기운이 지척에서 느껴졌으나, 이곳에서 만날 법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레이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교도소 안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지금 그가 볼일이 있는 인물은 따로 있었기에.

“면회 시간은 15분입니다, 남작님.”

안내를 맡은 교도관은 깍듯이 예를 갖춰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귀족들이나 지체 높은 이들이 방문할 때만 사용되는, 감시가 없는 면회실이었다.

“그러면 밖에서 대기하겠습니다.”

“예.”

달칵.

문이 닫히고, 레이는 하나 밖에 없는 의자로 걸어가 앉았다. 투명한 벽 너머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클리프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자네가 내 목숨을 구한 것으로 알아도 되겠나?”

“······.”

그날, 레이는 한창 도주 중이던 차량을 성공적으로 멈출 수 있었다. 그리고 충분히 가까워진 거리 덕분에 그 안에 클리프가 타고 있음을 바로 알아차렸다.

무장한 군인들이 자동차를 에워쌌을 때는 위험했다. 인질을 두고 실랑이를 벌이는 과정에서 납치범들 모두 그 자리에서 피살당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래서 레이는 오스틴에게 발포하지 말아 달라고 특별히 부탁했고, 그들을 붙잡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그의 청은 받아들여졌다.

“예전에 제 목숨을 구해주신 은혜는 그때 갚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주어진 시간이 길지 않았기에, 레이는 재차 입을 열었다.

“로스토크에서 절 구해주실 때만 해도 이런 분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나도 자네가 크게 될 인물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런 모습으로 내 앞에 마주 앉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네. 그때 조금 더 적극적으로 잡지 않은 것이 후회되는 군. 너무 전례를 믿었어.”

“무슨 전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보통 낯선 세상에 눈을 뜨면, 일단 자신을 구해준 사람을 따르기 마련 아니겠나. 정신을 차린지 얼마 안 돼서 곧장 수도로 떠나버린 자네가 특이한 거지.”

“절 구해준 것이 우연이 아니었군요.”

“그래. 그때 그 안내소 직원이 ‘매번 잘도 주워 온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나? 눈에 불을 켜고 환생자들을 찾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지.”

잠시 과거를 떠올리던 레이는 다시 클리프를 바라보며 말했다.

“만약 제가 수도로 떠나지 않고 계속 클리프 씨를 따라다녔다면, 지금쯤 무슨 일을 하고 있었을까 궁금하군요.”

“부와 인권의 재분배를 위해 함께 노력하고 있었을 걸세.”

“지금까지 본인이 그런 일을 해온 것이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당연하지 않나? 나는 말일세, 다 같은 인간인데 누구는 잘 살고 누구는 못 사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네. 더군다나 가진 이들이 내어줄 생각이 없다면, 빼앗아서라도 평등을 추구해야지.”

“···이번에 많은 사람들이 다쳤습니다.”

“그랬겠지. 하지만 그거 아나? 그들의 삶은 갑자기 망가졌을지 몰라도, 그보다 훨씬 많은 이들의 삶은 훨씬 이전부터 서서히 망가져버렸다는 것을. 그런 이들은 이번 축제에 참여하지도 못했을 거야.”

“······.”

레이가 전혀 설득당하지 않은 얼굴로 물끄러미 쳐다보자, 클리프는 급하게 덧붙였다.

“이번 일은··· 그래, 일단 이 얘기를 들어보게. 나는 2세대가 1.5세대를 배척하는 이유 중에 시기심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네. 자신이 모르는 세계를 알고 있고, 자신은 영원히 가지지 못하는 힘을 타고나는 이들이 속한 집단. 그들에 대한 막연한 시기가···.”

레이는 한 손을 들어 올리며 끝없이 이어지려던 클리프의 말을 막았다.

“그런 이야기들 말고, 조금 더 자신의 얘기를 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그런 게 중요한가?”

“저에게는 중요합니다.”

특히나 앞으로 당신의 처신을 결정하기 위해서, 라는 말을 속으로 삼킨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클리프는 작은 한숨을 내쉰 뒤 말했다.

“이미 죽었는데 또 다시 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내게는 아주 질 나쁜 농담 같았네.”

그는 누구나 일단 본인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소위 말하는 안식이라는 것을 기대하지 않겠느냐고 덧붙였다.

“그리고 나는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사람뿐이라고 생각하네. 세상의 모든 성공을 이뤄도, 내게 중요한 사람들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 그리고 난 내게 소중한 사람들을 모두 전생에 두고 왔고.”

그는 먼 곳을 보는 눈빛으로 손을 허공에 들어 올렸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매만지듯 손짓하며 말했다.

“그렇지 않은 환생자가 있을 것 같나? 대부분의 환생자가 미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기억이 온전하지 못해서일세. 지금의 삶이 너무도 쉽게 전생을 덮어버리는 거지.”

사진 한 장 남지 않은 과거는 본래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난 아직도 기억이 난다네. 그리고, 미안했던 기억밖에 떠오르지 않아. 그러나 되돌릴 수도 없고 사죄할 수도 없게 되었지.”

“······.”

“그래서 매일 밤 가슴을 쥐어 뜯었네. 나는 죄인이야. 용서를 구할 기회조차 박탈당한 죄인.”

레이는 무어라 대꾸하면 좋을지 몰랐다. 그러나 클리프는 상관없다는 듯,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할 뿐이었다.

“내게 살아있다는 것은 지옥이나 다름없네.”

클리프는 덤덤한 목소리로 그동안 가슴 속에 눌러 두었던 한 서린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내 삶의 모든 것이었던 것들이 전부 그 건너편에 있는데, 아직도 고스란히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데. 그런데 언제부턴가 모든 것들이 희미해지는 것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슬프네. 너무나 그리워. 그립고 그리워해도 닿을 수 없다는 사실에 숨이 턱턱 막혀.”

깊은 슬픔이 배인 말들을 뱉으면서도, 그의 표정은 마치 남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보였다.

“···예전에는 가끔 그들의 꿈을 꾸다 잠에서 깨면, 반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네. 어떻게든 그곳으로 돌아가 보려고 말이야.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집으로 가는 길은 없었지. 자네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는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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