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자들의 세계 (246)화 (246/274)

빗속의 추격

오스틴은 보트를 몰 수 있냐는 레이의 질문에 바로 대답하는 대신, 그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직까지는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고 스스로를 위안한 레이의 바람과는 달리, 현재 오스틴의 머릿속에서는 온갖 의심과 추측이 난무하고 있었기에.

‘이 사람, 도대체 정체가 뭐지?’

어렸을 적부터 병약했다는 레이의 주장은 방금 그가 보여준 몸놀림 때문에 철저히 부서졌다.

그건 단순히 건강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다. 그야말로 고도의 훈련을 받은 상급 요원에 버금가는 실력.

‘그러고 보면···.’

오스틴은 듀라비스를 이용한 환생자 구출 시범식을 위해 베르디 산맥 근처에 필드를 방문했을 당시를 떠올렸다.

주변에서 총성이 요란하게 울리고 전투용 드론이 바짝 따라붙은 와중에도 지나치게 평온해 보이던 레이의 표정을.

그때도 수상하기는 했지만,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었기에 일단 그냥 넘어갔었다. 그가 유달리 담력이 강한 것일 수도 있다고 합리화를 하며.

하지만 오늘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솔직히 느닷없이 등장한 그의 기세가 너무 맹렬해서, 그가 지금 이 난리통의 원흉인 테러리스트 중 한 명인 줄 알았을 정도니까.

‘거기다··· 분명 방금 전까지는 강제로라도 이 보트를 몰게 하려는 것처럼 보였어.’

그러나 오스틴을 알아보자마자 그러한 기색이 사라졌다.

레이가 적대감을 내비치지 않는다는 것은, 적어도 지금은 그를 해할 마음이 없다는 뜻일 터.

“······.”

오스틴은 반사적으로 권총에 얹어 놓았던 손을 천천히 떼었다.

레이가 수상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지만, 최소한 대화를 시도해 볼 수 있을 것 같았기에.

“······.”

“······.”

그리고 한시가 급할 텐데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오스틴을 보며, 레이 역시 자신의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래, 저 정도 위치에 있는 군인이 그렇게 멍청하지는 않겠지.’

레이는 긴장을 풀기 위해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 순간, 다소 과격한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일단은 그냥 기절시키고 볼까? 보트는 내가 직접 몰고.’

물론 그는 이런 보트를 직접 몰아 보기는커녕, 한 번도 타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키만 꽂혀있다면 운전을 하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려울 것 없어 보였다.

‘아니, 그래도 그건 아니지.’

잠깐 혹하기는 했으나, 레이는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세워지는 계획을 빠르게 지워냈다. 그런 식으로 보트를 탈취한다면 당장 이 순간은 모면할 수 있겠지만, 추후가 문제였으니까.

룩스 제국군에서도 꽤나 높은 위치에 있는 오스틴과 제대로 틀어지느니, 그냥 이대로 총리의 명복이나 빌어주는 것이 나을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테러리스트들이 여기저기 설치고 다니고 있는데 의식을 잃은 오스틴을 아무 데나 버리고 갈 수도 없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레이가 난감한 심정으로 머리를 굴리던 그 순간, 때마침 오스틴에게 무전이 왔다.

이어 마이크를 통해 무언가 빠르게 소식을 주고받던 그는 이내 굳은 표정으로 레이를 바라보았다.

“묻고 싶은 것이 많지만, 저는 지금 급하게 강을 건너가야 합니다. 남작님은···.”

“저도 그쪽에 볼일이 있습니다. 그러니 동승을 허락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레이가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냉큼 부탁하자, 오스틴은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살피며 질문했다.

“정확히 강 건너 어디로 가시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에 레이는 다시금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강을 건너서도 오스틴과 계속 동행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핑계를 대어 그와는 거리를 두고 움직일 것인가.

그러나 이번 고민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다면 필시 다시 마주치겠지.’

그리고 위험을 무릅쓰고 부하 하나 없이 홀로 움직이는 오스틴을 보고 확신이 들었다. 역시 내부에 스파이가 있었고, 지금은 모두에게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것을.

이럴 때는 한 명의 확실한 아군이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완전히 마음을 정한 레이는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역으로 오스틴에게 물었다.

“저쪽에 스파이가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맞습니까?”

* * *

부우우웅!

오스틴은 전속력으로 보트를 몰며 피게르 강을 가로질렀다. 그러면서도 옆에 탑승한 레이와 주변을 계속해서 면밀히 살폈다.

매서운 비바람이 불고 있음에도, 여전히 여기저기 불길이 잡히지 않은 니텐스 대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옆으로 보이는 그 아수라장과,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는 화려한 도시의 야경은 지독한 괴리감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오스틴은 차라리 그것이 나았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후우우웅!

느닷없이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는 거대한 기계가 동력을 잃고 꺼져버리는 듯한 환청을 들었다.

“아니, 저게 대체···!”

강 너머를 비추던 도시의 불빛들이 마치 썰물이 빠지는 것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던 것.

무거운 절망이 오스틴을 덮쳤다. 도대체 이번 테러의 규모가 얼마나 커다란 것인지 도무지 가늠도 되지 않았기에.

그러나 시시각각 악화되는 상황에 오스틴이 경악하는 것에 비해, 같은 곳을 바라보는 레이의 얼굴에는 오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저 멀리 새카만 어둠 속에서, 오직 그만이 볼 수 있는 작은 폭죽 같은 반짝임을 다수 발견했기 때문이다.

* * *

쾅! 콰앙!

끼이이익!

갑자기 도시를 덮친 어둠이 신호탄이었던 것처럼, 황궁에서 출발한 고급스러운 세단의 앞뒤로 다수의 추돌사고가 일어났다.

사실 이것은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광경이었다. 아무리 일대의 전기가 모조리 나갔다고 해도, 도로 위를 달리던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까지 꺼지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한편, 예상치 못한 순간에 눈앞이 새카맣게 변해버린 사람들은 일순 생각도, 움직임도 덜컥 멎어버렸다.

그리고 그 틈을 파고든 은밀한 공격이 개시되었다.

“컥!”

“무슨, 읍···!”

총리의 곁에 바짝 붙어서 경계를 서던 경호원들조차, 갑작스러운 정전 속에서 가해진 충격에 곧바로 대응하지 못했다.

같은 편이라고 믿고 있던 이들에게 기습을 당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털썩!

황궁을 나와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던 총리는 그렇게 정신을 잃었고, 어둠 속에서 신속하게 다른 차량으로 옮겨졌다.

다시 불빛이 돌아왔을 때엔, 강 건너에 비해 평화로웠던 일대는 더한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 * *

[사장님, 방금 제로스 로드 쪽에서 일어난 정전 중에 추돌 사고가 있었어요. 경로를 보면 그 차 안에 총리가 타고 있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요.]

보트의 모터 소리와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 때문에 알아듣는 것이 쉽지는 않았으나, 서혜리의 다급한 목소리는 상황의 심각성을 충분히 전달해 주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계속 상황을 주시해 주세요.”

레이는 아마도 전기가 계속 나갔다 들어왔다 할 것이라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뒷말은 조용히 속으로 삼켰다. 그리고 슬쩍 옆을 돌아보았다.

역시나 좋지 못한 무전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어둠 속에서도 그의 황당한 표정이 고스란히 보였다. 보나 마나 경호 대상이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소식이었을 터.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으니 편하긴 하다고 생각하며, 레이는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자, 그럼 이제 어쩐다.’

처음에는 최대한 빨리 강을 건너가는 것이 우선이었는데, 지금은 계획을 조금 수정해야 할 것 같았다. 테러범들을 추적해낼 방법이 생겼기 때문.

‘···이렇게.’

레이는 시험 삼아 눈앞에 있는 도시의 불빛을 수차례 깜빡여 보았다.

그러자 이에 당황한 듯한 작은 반짝임이 곧바로 일었다.

아마도 자신들의 통제가 잠시 흔들렸다 생각하고, 다시 전기의 흐름을 안정시키기 위한 반사적인 행동이었으리라.

어찌 되었든, 이처럼 레이에게는 상대 쪽의 초능력자들의 위치를 알아 낼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비록 거리가 너무 멀어서 힘을 쓰는 개개인 고유의 기운을 감지하는 것까지는 무리였으나, 초능력을 강하게 쓸 때면 나타나는 저 특유의 빛은 못 찾아내는 것이 더 힘들었다.

‘좌측으로 빠지고 있군. 저걸 어떻게 쫓아가자고 말해야···.’

이대로 뭍에 보트를 대고 자동차를 탄다면, 그동안 저들은 더욱 멀리 달아날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은 어디든 교통체증이 심할 시간인 데다, 심지어 비까지 퍼붓고 있는 상황.

‘···이번에야 말로 기절시키고 내가 운전대를 잡아야 하나?’

그러나 오스틴의 뒤통수에게는 다행히도, 보트 위에 있는 두 사람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 일이 일어났다.

돌연 저 멀리서 다수의 선박이 한쪽 방향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 것. 지금 시간과 날씨를 고려하면, 쉽게 이해 가지 않는 광경이었다.

“······!”

퍼즐은 쉽게 맞춰졌다. 총리를 납치했으니 도주를 해야 할 텐데, 도로 상황이 안 좋은 것은 알바트로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그들이 배를 타고 도시를 벗어나려 한다는 가설은 꽤나 타당해 보였다.

이에 레이는 즉시 오스틴의 어깨를 잡고 소리쳤다.

“저 배들을 쫓아갑시다!”

레이는 최대한 일목요연하게 자신이 추측하는 바를 오스틴에게 설명했다.

차를 타고 뒤를 쫓았다간 놓칠 가능성이 다분하고, 오스틴의 부대가 앞쪽에서 길을 막기 전에 저들이 배를 타고 내뺄 위험이 있었다. 그러면 이번엔 물 위에서 지난한 추격전이 시작될 터.

다행히 레이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오스틴은 곧바로 보트의 방향을 틀었다. 생각대로 일이 풀리자 레이는 주먹을 꽉 쥐었다.

‘됐어!’

테러리스트들이 만반의 준비를 한 것이 자명한 마당에, 기회를 주면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 저들이 활로를 찾기 전에 한곳으로 몰아서 가둬 넣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리고 지금 저쪽에서 비장의 수라고 꺼내든 패가 전기를 다루는 초능력자들이라면, 미안하지만 그들에게는 승산이 없는 게임이었다.

* * *

강폭이 넓은 것으로 유명한 피게르 강인지라, 중형 보트 12척이 한쪽 방향으로 달린다 하더라도 도시에서 보면 그저 바다 위에 조각배가 뜬 것 같은 모양새일 것이다.

불안정하게 깜빡이는 도시의 불빛 때문에 지금은 그 누구도 한가하게 강가를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강 위에서 그 선박들보다 훨씬 작은 보트에 탄 오스틴에게는 그것들이 마치 어둠 속을 가로지르는 해적선들처럼 느껴졌다.

‘무장한 세력일 수도 있다. 여기서 더 가까워지는 건 위험해.’

그러나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 그를 여러 번 놀라게 한 루체스 남작이 그에게 다급하게 소리쳤다.

“저들을 앞질러 중앙으로 치고 나가야 합니다!”

“위험합니다! 저들에게 총기가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 거리를 두고 쫓아야···!”

그러나 레이는 바로 대꾸하는 대신, 먼 곳을 응시하며 외쳤다.

“아니, 저들 앞으로 길이 트였나 봅니다, 너무 빠르게 멀어지고 있어서 이대로 가면 놓칩니다!”

“그걸 어떻게 안다는···!”

잘 보이지도 않는 저쪽 상황을 대체 어떻게 그리 자세히 아는 거냐고 오스틴이 물으려던 순간.

번쩍!

꽈릉! 콰앙!

귀를 찢는 듯한 굉음과 함께 십수 개의 번개 줄기가 피게르 강 위로 떨어졌다.

비록 각 보트 사이의 거리는 상당했으나, 앞서가던 보트의 주변으로 떨어지는 번개는 눈부신 죽음의 빛과 같은 공포를 심어주었다.

쾅! 콰쾅!

번개가 한 번 칠 때마다 주변이 대낮처럼 훤하게 밝혀졌다.

그 와중에도 용케 정신을 놓지 않고 운전대가 부서져라 잡고 있던 오스틴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꾸만 속도를 더 높이라는 레이의 다그침에 마주 답했다.

“이게 최고 속도입니다!”

그리고 이 비현실적인 상황에서도 충실하게 암담한 현실을 알려주는 계기판을 쳐다보았다. 연료의 잔량을 알려주는 화살표가 점점 바닥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 보트는 에너지석 배터리로 가는 친환경 모델이라, 기름으로 가는 기종보다 연비가 좋지 못했던 것.

그런데 그 순간, 거짓말처럼 연료 게이지가 슬금슬금 차오르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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