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자들의 세계 (245)화 (245/274)

병약미는 개나 줘버린

‘샐리도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축제를 즐기러 거리에 나와있던 한 20대 중반의 청년이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원래 예정대로라면, 그는 지금 이곳에 여자친구인 샐리와 함께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운세가 별로니 어쩌니 하며 집에 틀어박혀버린 것.

그녀는 그에게도 집에 있을 것을 권유했으나, 그는 모처럼의 축제를 TV로만 보는 것이 아쉬워 친구들과 함께 나왔다.

그런 그에게 샐리는 꼭 가야겠으면 불을 조심하라고 충고해 주었다.

‘운세 앱 같은 걸 너무 맹신하면 안 된다고 한마디 해야 하나··· 음?’

고민에 빠져 있던 청년은 돌연 걸음을 멈추고 코를 킁킁거렸다. 그리곤 미간을 찌푸리며 친구의 팔을 툭툭 쳤다.

“야, 어디서 타는 냄새 나지 않아?”

“뜬금없이 웬 탄내? 근처에 푸드 트럭도 없는데.”

“아니, 잘 맡아봐. 진짜 난다니까? 어디 불 난 거 아니야?”

“무서운 소리 하지 마라.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사고가 터지면 어떡하냐?”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헉! 내 말이 맞잖아!”

“뭐?”

“저기 봐! 연기 올라오는 거 안 보여?!”

* * *

레이 일행이 불길을 일으킨 목적은 오로지 하나였다. 지하에 숨어 있는 테러리스트들을 단번에 지상으로 몰아내는 것.

그래서 근방을 물샐틈없이 감시하고 있는 오스틴 휘하의 군인들에게 걸린다면, 거기서부터 레이 일행은 이번 일에서 손을 뗄 수 있을 테니까.

그러한 목적에 충실하기 위해, 불 초능력자들은 터널 안에서 불이 필요 이상으로 크게 번지지 않도록 세심하게 조종했다.

다만, 이미 화염이 한 번 훑고 지나간 곳에서 나오는 매캐한 연기와 냄새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퍼졌다.

이는 시민들에게 이 일대가 위험하다는 확실한 경보가 되어 주었기에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었다.

[작전 2단계 종료. 전원 퇴각 바람.]

지상의 상황을 수많은 CCTV를 통해 주시하고 있던 오퍼레이터들이 퇴각 신호를 보냈고, 세 팀은 일사불란하게 바이크의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각자의 오퍼레이터가 알려주는 경로에 따라 가장 한산한 출구를 향해 내달렸다.

부우우웅!

“이건 또 무슨 소리···!”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피어오르는 회색 연기와 시끄럽게 울리는 사이렌 소리를 피해 발걸음을 재게 놀리다가, 갑자기 어디선가 들려오는 굉음에 놀라 멈춰 섰다. 그리고 잔뜩 경계하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수군거렸다.

“지, 지하에서 울리는 소리 같은데?”

“그게 말이 돼?”

그러나 친구의 말에 반박하던 청년은 금세 입을 다물었다. 바이크 특유의 굉음이 지하도 출구 쪽 벽면에 반향 되며 점점 더 크게 들려왔던 것.

부릉, 부와아앙!

맹렬한 속도로 계단을 타고 올라온 바이크들이 출구에서 차례로 튀어나오더니, 그대로 도로 쪽으로 빠지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렇지 않아도 화재 때문에 당황하고 있던 시민들을 경악에 빠뜨리기에 충분한 장면이었다.

* * *

끼이이익!

한적한 거리에 위치한 한 상가 건물 뒤편. 세 갈래로 나뉘어 움직이던 바이크 부대가 결집 장소에 모였다. 일행은 바이크를 세우자마자 각자의 방독면을 벗어 던지며 한소리씩 뱉어냈다.

“와, 씨, 죽는 줄 알았네!”

“이 가을밤에 더위에 쪄 죽는 줄 알았습니다!”

비록 입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험한 말들이었으나, 다들 아드레날린이 폭주한 듯한 흥분과 웃음이 얼굴에 드러나고 있었다.

남들과 마찬가지로 방독면을 벗어 던진 제이슨은 일단 담배에 불을 붙이고 깊게 빨아들였다. 그리고 곧 이 모든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과 함께 툭 내뱉었다.

“아이고, 힘들다.”

“수고하셨습니다.”

피식 웃으며 말한 레이는 잠시 한숨 돌린 후, 이내 다시 진중한 표정으로 돌아와 중얼거렸다.

“이 정도로 알바트로스 쪽에서 물러나면 좋을 텐데···.”

알바트로스의 입장에서는 지금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그것도 여러 번 맞은 기분일 터였다.

자신들만 알고 있다고 생각한 지하통로에서 습격을 받았다. 그 탓에 서로 연락도 두절되었으니, 차근차근 단계별로 진행하려던 계획에 큰 차질이 빚어졌을 것이 뻔한 상황.

이제 관건은 이처럼 원래의 계획이 모두 어그러졌을 때, 그들이 과연 어떤 플랜 B를 가지고 있을지었다.

레이 일행이 파악한 지하도 외에도 알바트로스가 자체적으로 일궈낸 터널이 얼마나 있을지 모를 일이었고, 또 그들이 반드시 지하를 통해서만 일을 진행하리라는 법도 없었으니까.

‘뭐가 됐든, 이제는 오스틴 쪽에서 어느 정도 해결 가능했으면 좋겠는데···.’

옆에서 동료들이 조금 전의 영웅담을 풀어 놓는 동안, 레이는 초조한 마음으로 바이크 손잡이를 두드리며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순간.

끼이익!

쾅! 콰앙!

단번에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킬 만큼 요란한 소리가 멀리서부터 울려 퍼졌다.

* * *

[수장님, 니텐스 대교에서 대량 추돌 사고가 있었습니다! 이게 반드시 알바트로스의 소행이 아닐 수도 있긴 합니다만···!]

당황한 것이 역력한 스벤의 보고에 이어, 이번에는 차분한 멜리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참고로 니텐스 대교는 전쟁기념관과 황궁을 잇는 가장 가까운 길이다.]

이 설명을 들은 레이의 심장이 반 박자 빠르게 뛰었다.

‘황궁···!’

오스틴은 오늘 주요 일정에 대해 브리핑할 때 황궁에 대해서는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레이가 알기로 황궁 근처에는 지하도도 없었고.

“아직도 총리의 위치는 파악이 안 되는 상황입니까?”

[아직 어디에도···!]

CCTV 만 봤을 땐, 총리는 어젯밤부터 총리실을 벗어나지 않았다. 즉, 보안 유지를 위해 눈에 띄지 않게 이동했다는 소리였다.

레이는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질문들을 연달아 던져보았다.

‘총리가 전쟁기념관에서의 일정에 앞서 황궁에 들를 가능성이 얼마나 되지?’

‘그걸 알바트로스가 사전에 알고, 강 건너 준비해둔 작전이 어그러졌다는 것이 파악됐을 때 곧장 플랜 B로 넘어가 총리를 해하거나 납치할 가능성은?’

‘아냐, 억측일 가능성이 높다. 경거망동하지 말고 조금 더 기다려보는 것이···.’

퍼엉! 펑!

콰장창···!

액션 영화에서나 날 법한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사장님! 메이카 로드 21번지 빌딩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어요!]

[케이지 스트리트 일대 상가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건물 잔해에 깔린 사람들 다수. 퍼레이드 쪽으로 빠지던 사람들이···.]

[니텐스 대교의 몇몇 차량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습니다! 구조차량이 진입할 수 없을 정도로 추돌사고가 일어나서···.]

“이런 젠장할···!”

연속해서 전달되는 불행한 뉴스에, 잠시나마 풀어졌던 이들이 심각한 얼굴로 돌아왔다.

부르릉!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시 바이크에 시동을 걸며 레이를 쳐다보았다. 레이의 지시는 지체 없이 이뤄졌다.

“지하도를 뚫었던 팀 그대로 흩어져. 오퍼레이터의 지시에 따라 시민들을 구하고 추가 테러를 막는다.”

“예!”

“알겠습니다!”

힘차게 대답한 등대 팀과 흰담비 팀은 레이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각각 메이카 로드와 케이지 스트리트로 흩어졌다.

“이 팀은 니텐스 대교로 갑니다. 제이슨과 제이콥이 불길을 잡고, 리암이 구조 차량이 진입할 수 있도록 길을 트도록.”

“남작님께서는 같이 가지 않으십니까?”

“나는 혼자 강을 건넌다. 확인해 볼 게 있어.”

* * *

쿠르르릉···.

화재진압을 위해 페니가 내리는 빗속을, 레이의 바이크가 뚫고 달려나갔다.

[사장님, 니텐스 대교를 타지 않고 돌아가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몰라요.]

다른 이들을 지원하는 와중에도 레이가 가야 할 방향을 잡아주던 서혜리가 암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는 길은 제가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지금은 황궁 근처의 차량 이동에 특이사항이 보이지 않는지 살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서혜리는 레이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은 듯했으나, 전적으로 그를 믿고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에 집중하기로 했다.

한편, 통신을 끊은 레이는 거침없는 속도로 바이크를 몰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최대한 차분히 생각을 전개했다.

‘알바트로스의 내통자가 총리 주변에 있는 것이 거의 확실해. 그것도 지금 이쪽 상황을 실시간으로 전달받고 있는 누군가가.’

레이는 최악보다는 차악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제발, 곧바로 처리하지 말고 차라리 납치를 해라!’

지금으로서는 알바트로스 쪽에서 총리를 인질로 삼은 뒤 정부와 협상을 시도하는 시나리오가 베스트였다. 적어도 그렇게 되면 시간을 벌 수 있었고, 총리를 무사히 구출할 수 있는 확률도 올라갔으니까.

부우웅!

레이는 속으로 ‘제발’이라는 단어를 되뇌며 피게르 강 선착장이 내려다 보이는 다리 위를 가로질렀다. 그러면서 정박해 있는 선박들을 눈으로 빠르게 훑었다.

평소에는 이 시간에도 피게르 강 위에 각종 보트와 요트들이 떠있었지만, 오늘은 꽤 한산해 보였다. 아마도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비 때문이리라.

“······!”

그러나 신이 총리의 목숨을 아직 저버리지 않은 것인지, 곧 반짝 하고 불이 들어온 보트 한 대가 레이의 눈에 포착되었다.

부르릉!

그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곧장 바이크의 방향을 틀어 다리에서 뛰어내렸다.

부아아앙!

고요했던 선착장의 적막을 깨는 소리에, 보트를 타고 있던 검은 인영이 흠칫 놀라며 레이를 돌아보았다.

끼이이익!

전광석화 같은 몸놀림으로 바이크에서 내린 레이는 허락도 구하지 않고 다짜고짜 보트에 올라탔다.

보트 주인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는 상대방이 거절한다고 해도 강제로 강 건너까지 자신을 데리고 가게 만들 요량이었다. 지금은 사람의 목숨이 걸린 긴급상황이었으니까.

“······!”

그러나 레이는 보트의 운전대를 잡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리고 그건 무전기를 들고 홀로 움직이고 있던 오스틴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젠장!’

강을 건널 방법을 찾았다는 것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너무 급하게 움직인 탓이었을까. 레이는 뻔히 알고 있는 오스틴의 기운을 놓치고 말았다.

진작 눈치챘다면 다른 방법을 고려해 보기라도 했을 텐데, 이건 돌이킬 수도 없는 상황.

“당신은···!”

레이는 낭패감에 얼굴을 쓸었다.

그가 이런 임무를 뛸 때 굳이 월야로 분하는 것은, 혹시나 아는 사람을 스쳐 지나가더라도 상대방이 자신을 쉽게 알아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금발의 푸른 눈을 했을 때의 인상은 그의 원래 인상과 상당히 차이가 나는 편이었으니, 얼핏 보는 것만으로는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눈치채기 쉽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이렇게 코앞에서 빤히 바라보는 상황에서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 수준의 변장이었다.

“······.”

“······.”

서로에게 황당한 일이었으나, 두 사람 모두 한시가 급한 상황.

‘괜찮아, 아직 본견적으로 들킨 것은 아무것도 없어.’

레이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냥 비 오는 날 가발 쓰고 바이크 타고 돌아다니는 미친 귀족으로 생각하겠지. 바이크를 타고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였으니 병약한 이미지는 더 이상 못 써먹겠지만···.’

정신 승리에 가까운 생각을 집어치운 레이는 이 상황에서 그나마 타당하게 느껴지는 질문을 오스틴에게 건넸다.

“보트, 운전할 줄 아십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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